[태그:] 제주사투리

  • <제8회> 고대어의 원형을 품은 ‘제주어(濟州語)’, 소멸 위기에 처하다

    1459년(세조 5년)에 간행된  <훈민정음언해> 이미지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와 로컬의 깊은 가치를 전하는 블로그 ‘제주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지난 제7회에서는 제주의 강렬한 땡볕과 풋감의 탄닌 성분이 만나 천연 수지 코팅막을 형성하는 ‘제주 갈옷’ 속의 경이로운 섬유물리학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자연이 준 기후적 시련을 극복하고, 이를 자외선 차단율 98%라는 완벽한 기능성 의복으로 녹여낸 선조들의 의생활 지혜는 현대인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지요.

    이처럼 대지, 돌담, 밥상, 의복까지 삶의 모든 물질적 영역을 과학적 지혜로 채워가던 제주의 선조들은,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정신적 자산에도 위대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오늘은 제주의 눈에 보이는 유산들을 넘어, 제주 사람들의 영혼과 역사의 궤적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는 무형의 위대한 자산, ‘제주어(濟州語)’ 속에 숨겨진 언어학적 가치와 마주한 소멸 위기의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려 합니다. 육지 사람들에게는 그저 알아듣기 힘든 낯선 사투리로 취급받던 제주어가 어떻게 고대 한국어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유일한 타임캡슐이 되었는지 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지금 시작합니다.


    1.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아래아(ㆍ)와 반치음(ㅿ)을 품은 언어학적 타임캡슐

    제주어가 이토록 주목을 받는 이유는, 육지와 고립된 화산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덕분에 15세기 중세 한국어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제주어는 국어사 연구의 표준을 제시하는 거대한 ‘살아있는 화석’입니다.


    1) 아래아(ㆍ)

    가장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모음인 ‘아래아(ㆍ)’의 생생한 생존입니다. 육지 표준어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아래아 발음이 완전히 소멸하여 음가 자체가 사라졌지만, 제주어에서는 여전히 아래아의 독특한 발음이 일상 속에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예>

    * ᄒᆞᆫ저 옵서예(얼른 오세요)
    * ᄆᆞᆯ(말)
    * ᄒᆞ다(하다)
    * 오ᄂᆞᆯ(오늘)
    * ᄌᆞ근ᄌᆞ근(자근자근)
    * ᄀᆞᆯ개비(개구리)
    * ᄃᆞ람지(박쥐, 다람쥐)
    * ᄃᆞ오다(데려오다)
    * ᄒᆞ나(하나)
    * 모ᄆᆞᆯᄎᆞ베기(메밀수제비)


    2) 반치음(ㅿ)

    15세기 문헌 속 반치음(ㅿ)을 포함하던 어휘들이 육지에서는 자음이 아예 날아가 버린 형태(가위, 아우, 겨울)로 변한 반면, 제주어에서는 ‘ㅅ’ 형태로 자음의 흔적을 굳건히 유지하며 육지 말(표준어)과 서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출처] 장정민·배영환, <20세기 초 제주방언의 음운론적 연구 – 《朝鮮語方言の硏究(1944)》를 중심으로 -> 내용 재구성

    (발췌 요약)

    중세 국어 어휘표준어
    (ㅿ ➔ ∅ 변화)
    (ㅿ 소리 완전히 소멸)
    제주어
    (ㅿ➔ ㅅ 변화)
    (‘ㅅ’으로 남아 보존)
    ᄀᆞᆺ애가위ᄀᆞ새, 가새
    아ᅀᆞ아우아시
    저ᅀᅳᆶ겨울ᄀᆞ울~ᄀᆞ실, 겨실
    ᄀᆞᆺ가 (테두리)갓


    3) 순경음 비읍(ㅸ)의 잔재

    <제주어 표기법 해설> (2014, 제주발전연구원)에 제시된 어휘들을 살펴 보면, 순경음 비읍(ㅸ)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① 1음절 어간의 사례
    * 형용사: 곱다, 밉다, 춥다, 덥다, 맵다, (각도가) 굽다, 답다, 쉽다
    * 동사: 눕다, 줍다, 깁다, (불에)굽다, 낍다/끼우다, 돕다, 뱁다/배우다, 뵙다, 쌉다/싸우다  

    ② 2음절 이상의 어간의 형용사 사례
    * 차겁다, 뜨겁다, 서럽다, 즐겁다, 게벱다/게붑다(표준어의 가볍다), 무겁다, 더럽다, 어렵다, ᄆᆞᄉᆞᆸ다/무섭다, 부럽다/불룹다,


    어릴 적 조부모님과 생활할 때에는 조부모님께서 더운 날이면 “에고~ 더버라~”, 추울 때에는 “추버라”라고 발음하시는 것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당시에는 표준어가 아닌 잘못된 사투리 발음을 하시는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발음이 재미있어서 장난삼아 따라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후에 자라서 순경음 비읍(ㅸ)을 알고 나니 그렇게 발음하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문자에 갇힌 지식이 아니라, 선조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그대로 보존되어 온 생생한 언어의 유산이지요. 제가 보기에 요즘엔 거의 이런 발음을 하시는 분이 없는 듯합니다. 지금은 현대적 어휘로 많이 바뀌었지만, 조금만 거슬러 살펴보면 그 소중한 잔재를 여전히 실감할 수 있습니다.


    4) 소결

    이처럼 표준어에서는 사라진 아래아(ㆍ), 반치음(ㅿ), 순경음 비읍(ㅸ)의 흔적이 어휘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 국어학자들은 책 속의 활자로만 존재하던 고대어의 실제 발음과 문법을 연구하기 위해 반드시 제주를 찾습니다. 척박한 변방의 섬이라 불리던 공간이, 역설적이게도 훈민정음 창제 이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아득한 세월 동안 한민족의 소중한 언어적·문화적 원형을 안전하게 품어낸 영리한 보관소가 되어준 것입니다.


    2. 어휘의 풍요로움과 보존량


    1) 어휘의 풍요로움

    제주어에는 바람의 종류를 표현하는 단어와 바다에서 어로 작업에 관한 단어 및 돌과 관련된 단어들만도 각각 수십 가지에 달할 정도로, 제주의 거친 자연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된 실용적 생활 어휘가 발달해 있습니다.

    사방이 바다로 막힌 고립이라는 한계를 중세 한국어 원형의 뚝심 있는 보존력으로 이겨낸 제주의 언어. 가뜩이나 디지털 소통으로 인해 전 세계의 소수 언어들이 빠르게 사라져 가는 요즘, 풍요로운 어휘를 가진 제주의 전통 언어는 사실상 한민족의 문화적 다양성을 지탱하는 가장 귀하고 단단한 ‘무형의 생명선’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2) 중세 국어 어휘 보존량

    전통 제주어는 15세기 조선 시대 문헌에 등장하는 고어(古語)의 형태와 ‘아래아(ㆍ)’ 등 중세 국어의 음운을 가장 풍부하게 품고 있어, 국어학계에서 ‘살아있는 중세 국어의 보고(寶庫)’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현재 제주어 어휘의 기록화 작업은 지속해서 확장되고 있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가 1995년 발간한 《제주어사전》에는 표제어 18,456 항목을 수록하였고, 2009년 발간한 《개정·증보 제주어사전》에는 25,350 항목을 수록했습니다. 이어서 제주학연구센터와 진행한 《제주어대사전》 편찬 사업을 통해 현장 어휘와 관용어 등을 보완하며 40,000여 개 이상을 목표로 어휘 자산이 확충 및 기록화되고 있습니다. 한편, 《제주어대사전》 웹사전 구축 기반을 마련하여 “제주어왓(‘제주어밭’이라는 뜻)”을 이미 시험 운영 중에 있습니다.


    3. 제주어의 특징


    1) 조사의 과감한 생략과 단어의 축약

    예를 들면,

    * 어디에 가십니까? –> 어디 감쑤강?
    * 여기에 와서 이것을 보십시오 –> 여기 왕 이거 봅써.
    * 어디에 가고 계십니까? –> 어디 감수꽈?
    *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였다. —> 학교 강 공부 핸(해연).

    제주어에서 조사가 생략되고 단어가 짧게 축약된 이유는 제주의 거센 ‘바람’과 생존 환경에 적응한 결과입니다. 숨비소리를 내는 해녀들의 물질이나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밭일 속에서 긴 문장으로 말하면 소리가 다 흩어져 버립니다. 특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거친 바다에서의 뱃일과 해녀가 물질할 때 등에 정확한 의사전달은 생사가 걸릴 수도 있습니다.


    2) 독특한 형용사의 발달

    표준어 역시 형용사가 대단히 발달한 언어이지만, 제주어는 표준어 단어와 일대일로 매칭하기 어려운 제주어만의 독특한 형용사(맛, 온도, 성품, 상태 등)들을 풍부하게 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① <제1회> 글에서 다룬 ‘맨도롱하다’는 ‘미지근하다’와 ‘따끈하다’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며, 우리가 몸으로 느끼기에 매우 알맞은 적당한 온도입니다. 육지의 언어에서는 표현하지 못하는 미묘한 온도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② ‘베지근하다’라는 말은 ‘고기 등을 푹 고아낸 국물이 구미가 당길 정도로 묵직하고 고소하며 감칠맛이 있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름지거나 느끼한 맛이 아니라, 깊은 진국에서 느껴지는 풍부하고 진한 감칠맛을 표현할 때 쓰는 제주 특유의 대표적인 맛 형용사입니다. 제주어가 아니면 이 맛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③ ‘사락사락하다’는 ‘무엇이 자꾸 가볍게 쓸리거나 맞닿는 소리가 나다. 또는 그런 소리를 내다.’, ‘물건의 겉이 매끄럽지 못하고 좀 거칠다.

    ④ ‘요망지다’는 ‘똑똑하고 야무지다. 나이에 비해 총명하고 어른스럽다.’

    ⑤ ‘오소록하다’는 ‘조용하고 구석진 곳으로써 으슥하다.’

    ⑥ ‘발아뎅기다’는 ‘담장이나 나무 위 따위 발붙이기 어려운 곳을 기어 다니거나 걸어 다니다.’


    3) 공동체의 연대 철학이 담긴 어휘

    이웃을 가족처럼 친근하게 부르는 ‘삼춘’, 이웃 간의 공동체 품앗이를 뜻하는 ‘수눌음’이 있습니다. 또한 <제4회> 글에서 언급한 ‘정낭’은 공동체 구성원 상호간의 완벽한 신뢰가 있어야만 유지 가능한 문화에서 탄생한 단어입니다. 각자도생하기 힘든 거친 환경 속에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연대해 온 섬사람들의 상생 철학이 단어 한 마디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제주어’만의 아름다운 유산입니다.


    4. 출륙금지령의 역설: 거대한 고립이 만든 고대어의 보존 과학

    도대체 어떻게 제주의 언어는 육지와 수백 년의 세월을 비껴가며 이토록 완벽하게 15세기의 영혼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요? 그 역사적 열쇠는 역설적이게도 <제5회> 글에서 다루었던 중앙 정부의 가혹한 통제 정책, 바로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에 있습니다.


    인조 7년(1629년)부터 순조 23년(1823년)까지 무려 200여 년 동안 제주 사람들은 나라의 법에 묶여 섬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습니다. 육지 사람들과의 접촉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채 섬 전체가 거대한 ‘지리적·문화적 감옥’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혹한 단절은 언어학적으로 엄청난 반전의 축복을 만들어냈습니다. 언어는 끊임없이 교류하고 섞이면서 변화하는 성질을 지녔지만, 제주의 언어는 외부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는 완벽한 ‘폐쇄적 생태계’ 속에서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육지의 언어가 전란과 개화기를 거치며 아래아(ㆍ)를 잃고 기존 문법의 원형을 빠르게 잃어갈 때, 제주의 언어는 섬 안의 단단한 공동체 네트워크 속에서 15세기의 음가와 단어들을 타임캡슐처럼 고스란히 굳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조들이 겪어야 했던 눈물겨운 단절의 역사가, 한민족 전체의 언어 고향을 지켜낸 위대한 방파제가 된 셈입니다.


    5. 소멸 위기 4단계: 우리가 미처 몰랐던 제주어의 냉정한 현실


    1) 소멸 위기를 맞은 제주어

    소멸 위기 4단계 언어로 분류된 제주어에 대해 문순덕 외의 《제줏말 소멸위기 실증적 진단과 대응 방안 연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수는 대략 6,000〜7,000개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유네스코에서는 약 3,000개의 언어가 소멸위기에 있다고 추정함.

    유네스코에서는 구체적으로 언어가 맞고 있는 소멸 위기를 아래와 같이 단계별로 구분합니다. 2010년, 유네스코(UNESCO)의 《소멸 위기 언어 지도 (Atlas of the World’s Languages in Danger)》 기준에 따라 살펴 보면, 7단계로 구분하여 정의하였지만 실제 언어 지도상 표시는 5단계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표는, 유네스코와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자료 해석의 편의를 위해서 재구성하였음을 밝힙니다)


    소멸 위기 4단계 언어로 분류된 제주어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문순덕 외 <제줏말 소멸위기 실증적 진단과 대응 방안 연구>의 자료를 인용합니다.


    위 표를 보면 제주 사투리가 아닌 ‘제주어’로 명확히 구획되어 있으며, 소멸 위기 4단계 수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2010년 조사 당시 제주어 사용 인구는 약 5,000~10,000명에 불과하며,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인원 역시 70~75세 이상의 고령층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국제 공인 기구인, 세계 표준화 기구(ISO)에서도 ‘제주어’를 단순 방언이 아닌 독자적인 개별 언어로 인정하여, 고유 언어 코드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출처] SIL Global (ISO 639-3 등록 관리 기관) — iso639-3.sil.org

    • 한국어 공통 코드: kor (ISO 639-3) / ko (ISO 639-1)
    • 제주어 독자 코드: jje (ISO 639-3)

    이처럼 ‘제주어’가 ‘한국어’와 별개의 고유 언어로 등록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독립된 언어 자산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제주어를 제주도 전역에서 흔하게 쓰이는 정겨운 사투리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전 세계의 언어 다양성을 보존하는 유네스코(UNESCO)의 시선은 전혀 다릅니다. 유네스코는 지난 2010년, 제주어를 단순한 사투리가 아닌 하나의 독립된 ‘언어(Jeju language)’로 인정함과 동시에, 전 세계 소멸 위기 언어 5단계 중 4단계인 ‘아주 심각한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로 공식 등록했습니다. 즉, 소멸 직전 단계의 위기 상태인 것입니다.

    4단계는 언어를 사용하는 최후의 보루가 오직 ‘조부모 세대’뿐이며, 그 아래 세대로는 더 이상 언어가 자연스럽게 전수되지 않는 고립된 상태를 뜻합니다. 실제로 지금 제주의 젊은 세대나 아이들 중 전통적인 제주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인구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거친 섬바람을 견디며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영혼의 언어가, 현대화와 표준어 보급이라는 거센 물결 속에서 소리 소문 없이 지워져 가고 있는 것이 지금 제주어가 마주한 냉정한 현실입니다.

    제주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제주인들의 문화와 가치, 사고방식과 역사 인식 및 생태 양식이 함께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나아가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사라진다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유네스코는 물론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각 국가 및 지방에서 언어의 소멸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2) 소멸 방지 기한의 경고

    현재 전통 제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현지 고령 인구의 연령대를 감안할 때, 향후 10~15년 이내에 체계적인 디지털 아카이빙을 완성하지 못하면 언어의 원형 자체가 완전히 소멸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현재 활발히 추진 중인 《제주어대사전》 완성과 함께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더 많은 어휘들을 추가 발굴하고, 지속적으로 일상의 언어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급하고도 막중한 사명이라 하겠습니다.

    저 역시 SNS 등에서 일부러 제주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려고 애쓰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6.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라는 고정관념을 뒤집다

    이 놀라운 언어학적 타임캡슐을 마주하고 나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 육지의 표준어 기준에 비교되어 ‘교양 없고 투박하며 알아듣지 못하는 변방의 사투리’라 불리던 제주어는, 이제 더 이상 제주에 어울리지 않는 무지한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예부터 제주어는 억양이 강하고 단어가 축약되어 있어 거칠고 불친절하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육지의 부드러운 서울말 기준으로만 바라보았을 때는 분명 낯선 언어가 맞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자연과 제주 선조들은 완전히 다른 방식의 축복을 숨겨두었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긴 대화를 나누기 힘들었기에 단어를 직관적이고 효율적으로 축약하여 소통의 속도를 높였고, 제1회에서 다룬 ‘맨도롱하다’처럼 오감과 식문화의 미묘한 경계를 날카롭게 집어내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실용적인 감정 어휘를 완성했던 것입니다.

    변방의 고립이라는 한계를 한민족 최고의 문화적 자산인 고대어의 요람으로 승화시킨 제주의 언어. 이제 제주의 전통 제주어는 결핍의 산물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리하고 가치 있는 ‘무형 언어 자산의 정점’으로 다시 정의되어야 마땅합니다.


    7. 글을 마치며: 세상의 소음 속에서, 내 안의 고유한 목소리를 지킬 시간

    제1회 글에서부터 오늘의 제8회 글까지, 제주오리진(Jeju Origin)의 이야기는 거친 바람 속에서도 나만의 원형을 잃지 않고 지켜온 숭고한 흔적을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주변의 거센 유행이나 타인의 기준(표준)에 맞추느라, 나만의 고유한 색깔과 소중한 내면의 목소리(원형)를 잃어버린 채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제주의 언어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비록 세상이 변방의 언어라 부르고 알아주지 않더라도, 수백 년간 아래아(ㆍ)를 품어온 제주어처럼 내 안에 깃든 고유한 가치와 신념을 뚝심 있게 지켜낸다면 그 자체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위대한 타임캡슐이 될 수 있다고 말이죠.

    오늘 하루, 차가운 세상의 유행 속에서 내 고유한 개성이 희미해져 힘겨워하고 있다면, 거센 섬바람 속에서도 고대어의 영혼을 단단하게 지켜내던 제주의 언어를 가만히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타인의 자극적인 소음 앞에서도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떳떳하고 깊은 내면의 목소리를 채워내는 유연하고도 멋진 ‘맨도롱한’ 하루를 보내시는 것은 어떨지요?

    다음 글에서는 말 한마디, 언어 하나에도 대자연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정서가 담겨 있듯, 거친 바다와 태풍이라는 삶의 불확실성 앞에서도 인간의 마음을 따뜻한 위로와 연대로 지켜내 준 제주의 거대한 정신적 세계관, ‘1만 8천 신(神)들의 고향, 제주 신화’ 속에 숨겨진 포용의 미학을 함께 탐색해 보겠습니다.


    제주 오리진(Jeju Origin)


    참고 자료

    * 양창용⦁양세정. (2013). 〈소멸위기 언어 보존 사례 분석을 통한 제주어(제주방언) 보전 방안〉, 제주발전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현 제주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

    * 장정민·배영환-20세기 초 제주방언의 음운론적 연구– 《朝鮮語方言の硏究(1944)》를 중심으로 -, 《한말연구》 제66권 15호(2025. 5), 한말연구학회

    * <제주어, 함께 지켜야 할 소중한 우리말>,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홈페이지

    * <소멸위기에 처한 언어 지도 (Atlas of the World’s Languages in Danger)>,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홈페이지

    * <Atlas of the world’s languages in danger>, 2010. Unesco UNESDOC Digital Library

    * SIL Global (ISO 639-3 등록 관리 기관) — iso639-3.sil.org

    * 《제주어 표기법 해설》 (고재환 외, 2014, 제주발전연구원)


  • <제4회> 닫혀 있으나 신뢰로 열리는 문, 제주의 지혜 ‘정낭’

    제주 초가집 입구 돌담 사이에 세 개의 나무 막대(정낭)가 가로로 모두 끼워져 출타 중임을 알리는 제주의 전통 정낭과 정주석 풍경

    (ai 이미지 생성)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를 전하는 ‘제주 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지난 3회에서는 거친 태풍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바람과 상생하는 <제주 돌담의 물리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바람의 길을 막지 않고 통과시키는 돌담의 유연함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제주 사람들의 삶 그 자체였지요.

    그 부드러운 곡선의 돌담은 각자의 집 앞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오늘은 그 돌담이 끝나는 곳, 마을 길에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의 집 입구에서 마주하게 되는 독특한 문화유산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제주의 전통 대문인 ‘정낭’, 그리고 대문으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제주의 진짜 ‘올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 조부모님 댁 입구에 들어설 때면, 거칠고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 사이에 정겹게 걸쳐놓은 길다란 나무 장대를 늘 보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시절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던 정낭에는 단순히 집 안과 밖을 구별하는 것 이상의 놀라운 과학과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위대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1. ‘올레’의 원래 의미와 현재 알려진 ‘올레길’의 차이

    ‘정낭’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정낭과 처음 마주치는 공간인 ‘올레’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흔히 ‘올레길 걷기’ 열풍으로 널리 알려져 사용 중인 ‘올레길’의 의미는 제주 전통의 ‘올레’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1) 전통적 의미의 올레

    ‘올레’는 ‘큰길이나 마을 길에서 집 마당까지 이어지는 돌담으로 둘러쌓인 좁은 골목길’을 뜻합니다.

    제주 초가집은 거센 바람을 막기 위해 큰길에서 마당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돌담을 디귿(⊏)자나 곡선 형태로 길게 쌓아 입구를 만들었는데, 이 공간을 ‘올레’라고 불렀습니다.


    2) 올레의 과학

    이 올레에는 제주 선조들의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올레는 넓고 크게 만들기보다 일부러 좁게 하거나 구부러지는 형태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면이 바다인 제주의 강한 바람이 큰길에서 집안으로 곧장 불어닥칠 때, 좁고 굽어진 돌담 골목인 올레를 통과하면서 바람의 속도가 줄어듭니다. 즉, 거센 바람이나 태풍으로부터 안마당과 초가집을 보호하는 ‘천연 바람 완충 지대’였던 셈입니다. 이 올레가 끝나는 지점, 즉 집 마당의 진짜 입구에서 우리는 제주의 대문인 ‘정낭’을 마주하게 됩니다.


    3) 의미가 확장된 요즘의 ‘올레길’

    지금 우리가 흔히 걷는 도보 여행 코스인 ‘제주 올레길’은 옛날부터 내려온 지명이 아니라, 2007년 (사)제주올레에서 제주도의 아름다운 도보 여행 코스를 개발하면서 붙인 ‘현대적인 브랜드 이름’입니다.

    “제주의 집 앞 골목을 뜻하는 ‘올레’처럼, 여행자들이 도보 여행을 통해 제주의 깊숙한 속살과 문화를 조용히 만나고 가라”는 의미를 담아 트레킹 코스를 ‘올레길’이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이 브랜드가 전 국민적으로 엄청난 히트를 치다 보니, 어느새 전국적으로 ‘길게 걷는 산책로나 등산로’ 전체를 뜻하는 대명사처럼 쓰이게 된 것입니다. 제주올레라는 말에는 ‘제주에 올래?’라는 초대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합니다.


    4) 아쉬움과 새로운 희망

    제주 토박이로서 전통적 의미의 올레가 사라져 가고 잊혀져 가는 현실에 아쉬움이 짙게 남습니다. 하지만 순기능이 크게 있기에 아쉬운 한 켠을 메꿀 수 있어서 다행으로 여깁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현재 제주의 올레길 정비, 해안 청소, 올래길과 접한 마을 주민들과의 상생을 위한 아이템 개발 등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들은 제주 관광의 주요 문화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제주올레가 제주를 넘어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제주 올레를 해외로 확장해 나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2. 정낭과 정주석, 바람의 섬이 만들어낸 과학적 구조와 아날로그 신호

    육지의 전통 가옥을 보면 나무로 짠 튼튼하고 빽빽한 대문이 집안을 꽉 막고 있지만, 제주의 시골집 입구에는 사방이 막힌 대문이 없었습니다. 대신 집 입구 양쪽에 구멍이 세 개씩 뚫린 커다란 돌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긴 나무 장대를 가로로 걸쳐두었습니다.

    이때 구멍 뚫린 돌기둥이나 나무기둥을 ‘정주석’ 또는 ‘정주목’이라 부르고, 그 사이의 나무 장대를 ‘정낭’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주목 없이 돌담 자체를 지지대 삼아 정낭을 얹거나 구멍에 끼워 사용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1) 정낭의 역할

    정낭’은 제주 전통가옥의 정식 대문입니다.

    단순히 기다란 장대 하나에 불과하지만, 정낭은 실제적인 대문과 울타리 역할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과거 중산간 지역에서는 소나 말을 방목하여 키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을길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가축들이 집 마당 안으로 불쑥 들어와 텃밭의 농작물을 망치거나 초가집을 훼손하는 것을 이 정낭이 완벽하게 차단해 주었습니다.


    2) 제주에 대문이 없었던 이유

    제주에는 왜 육지처럼 번듯한 대문이 없었을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제주의 거센 ‘바람’ 때문입니다. 사방이 꽉 막힌 대문은 사철 몰아치는 제주의 강한 태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문짝이 뜯겨 나가거나 돌담까지 무너뜨리기 십상입니다. 제주 사람들은 돌담을 쌓을 때처럼, 대문을 만들 때에도 자연과 싸우기보다 순응하는 법을 택했습니다. 나무 장대 몇 개로 이루어진 정낭은 바람이 아무리 세게 불어도 그 사이로 바람을 유유히 흘려보내기에 태풍에도 끄떡없는 가장 완벽한 대문인 셈입니다.


    3. 숫자와 위치로 소통하는 아날로그 메신저

    정낭이 가진 가장 흥미롭고 아름다운 점은 바로 이 나무 장대의 개수와 위치를 통해 이웃과 소통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스마트폰의 프로필 상태창이나 메신저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알리듯, 옛 제주 사람들은 정낭의 개수로 집주인의 현재 상황을 이웃들에게 실시간으로 전했습니다.


    1)정낭이 모두 내려져 있는 경우 (0개)

    집 안에 사람이 있으니 누구든 편하게 들어오라는 환대의 표시입니다.


    2) 정낭이 1개 걸려 있는 경우

    “집주인이 지금 아주 가까운 이웃집에 잠시 마실을 갔거나, 동네 거까이서 볼 일 보러 갔으니 곧 돌아옵니다.”라는 뜻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주인을 만날 수 있다는 다정한 안내문인 것이죠.


    3) 정낭이 2개 걸려 있는 경우

    “지금 집에서 조금 떨어진 밭에 일을 하러 나갔거나 멀리 나무를 하러 가서, 오후 늦게나 저녁때가 되어야 돌아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다음에 다시 찾아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4) 정낭이 3개 걸려 있는 경우

    “지금 먼 곳에 있는 다른 마을에 가거나, 며칠 동안 집을 비웁니다.”라는 뜻입니다.
    장대 3개가 꽉 채워져 걸려 있으면 이웃들은 집안에 아무도 없음을 인지하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5) 정낭을 1개 또는 2개만 사용하는 경우

    제주 초가집 입구 돌담 사이에 나무 막대(정낭) 한 개가 사선으로 비스듬히 걸쳐져 있어 집주인이 금방 돌아올 예정임을 알리는 모습

    (ai 이미지 생성)

    실제로는 1개 또는 2개만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정낭을 가로로 걸치면 집에 늦게 돌아온다는 뜻이고, 사선으로 비스듬히 걸치면 금방 돌아온다는 뜻이었습니다.


    6) 종합

    이처럼 정낭은 단순한 나무 장대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는 소리 없는 언어이자 가장 따뜻한 아날로그 메신저였습니다.


    4. 정낭이 증명하는 제주의 위대한 가치, 신뢰와 삼무(三無) 정신


    1) 역사 기록 속의 삼무

    1704년에 이형상이 제주 목사로 부임하던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저술한 제주도 지방지인 『남환박물』 에 기록한 것을 번역한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제주도의 토질이 척박해서 백성들은 가난한 삶을 살았다. 땅에는 바위와 돌이 널려 있고 흙이 덮인 곳이 드물어서 삼과 면화를 기르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의복과 음식이 항상 부족했다. 의복과 음식은 소박했으며,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다. 이렇듯 제주도 백성들은 항상 가난에 시달렸지만 물건을 훔치는 자가 없었다. 말이나 소, 농기구, 곡물을 들에 방치하여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보안 기능이 없는 정낭이 대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주의 ‘삼무(三無) 정신’ 덕분입니다. 제주의 삼무는 ‘도둑이 없고, 거지가 없으며, 대문이 없다’는 뜻입니다.


    2) 현대의 기술적 첨단 보안과 제주의 자치적 보안 시스템

    여기서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현대 과학의 패러다임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전 세계 정보보안 시장의 핵심 철학은 ‘제로 트러스트(Zero Trust)’입니다. 직역하면 “아무도 믿지 마라(Zero Trust), 그리고 항상 검증하라(Always Verify)”라는 뜻입니다.

    현대의 제로 트러스트 보안 시스템은 내부에 이미 들어와 있는 최고 경영자나 신뢰받는 직원이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절대 신뢰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불신 장벽에서 출발합니다. 방 안의 서류 하나를 열어볼 때마다, 컴퓨터 시스템에 접속할 때마다 끊임없이 생체 인증(지문·안면 인식)을 요구하며 “당신이 정말 권한이 있는 사람이 맞는지”를 매 순간 가혹하게 검증하는 기술입니다.

    불신이 깊어질수록 인간 사회가 감당해야 할 시스템 구축 비용과 심리적 피로감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마련입니다. 물리적인 형태만 보면 제주의 정낭은 이 제로 트러스트 관점에서 ‘보안 점수 0점’의 허술한 바리케이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제주의 정낭은 기술의 복잡성으로 불신을 제어하는 현대 공학의 패러다임을 정면으로 뒤집는 완벽한 ‘상호 신뢰의 공동체 규범’을 보여줍니다.

    결국 정낭은 기계 장치로 인간을 감시하는 삭막한 기술이 아니라, ‘정직’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의 힘으로 공간을 완벽하게 방어해 낸 인류 역사상 가장 고차원적인 ‘제로 비용의 인문학적 보안 시스템’이었던 셈입니다.


    3) 소결

    정낭은 힘으로 침입자를 때려눕히거나 시스템적으로 차단하는 ‘강제 보안’이 아닙니다. 정낭은 도둑을 막기 위한 ‘차단막’이 아니라, 이웃 간의 단단한 ‘신뢰와 약속’이었습니다.

    “지금 집을 비우니 안으로 들어오지 말아 달라.”는 주인의 무언의 요청을, 마을 사람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존중해 주었던 것입니다. 도둑이 없다는 상호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열려 있는 믿음직한 정낭이라는 대문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높은 철제 대문을 세우고, 삼중 잠금장치를 달고, CCTV를 24시간 가동하면서도 늘 불안해하며 살아갑니다. 아무도 믿지 말고 끊임없이 검증하라는 제로 트러스트의 철저한 불신 속에 스스로를 격리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에 대해 제주의 정낭은 완전히 반대의 결론을 내려주며, ‘진정한 안전과 평화는 철저한 감시가 아니라 서로를 믿는 신뢰에서 온다.’는 깊은 울림을 전해줍니다.


    5. 올레에서 마주하던 그리운 추억들

    돌담을 따라 굽어지는 올레길을 걸어 들어가면, 고풍스러운 초가집이 보이고, 그 입구 한쪽 끝에 단정하게 성낭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집에 돌아 왔을 때에, 반갑게 맞아주시던 할머니의 환한 미소가 고스란히 겹쳐옵니다.

    한 올레 안에는 여러 집들이 모여 있는 경우가 많으며 대개는 작은 골목이입니다.

    조부모님 집 앞의 올레는 비교적 넓고 꽤 긴 편이었습니다. 덕분에 또래의 마을 아이들이 여럿이 모여서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하고, 때로는 연날리기도 했던 장소여서 꽤나 많은 추억이 쌓인 공간입니다.

    가을이면 초가집 지붕에 얹은 묵은 새(‘띠’의제주 방언)를 교체하고 난 뒤에 지붕을 튼튼히 묶을 용도로 길게 집줄(‘새’로 만든 동아줄)을 꼬아 만들었습니다. 이때에 공동 작업으로 어른들과 함께 ‘호랭이’를 돌리던 올레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호랭이’는 끝의 구부러진 갈고리에 새끼줄을 걸어서 ‘ㄴ’자 형태의 손잡이를 돌리며 집줄을 꼬아나갈 때 쓰는 도구입니다. 제주 사투리인데 ‘우리말 샘’ 등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진 설명: 성읍 민속마을에서 초가 지붕 집줄 묶기과 집줄 만들기 시연 중이며, 여성 두 명이 호랭이를 돌리고 있는 모습임)


    6. 맺음말: 내 삶의 울타리를 허물고, 신뢰의 올레길을 걸을 시간

    선조들은 돌담에 구멍을 내어 바람을 통과시키는 유연함의 지혜를 보였습니다. 이제 우리도 현대의 거센 변화 속에서, 내면의 높은 벽을 허물고 미래를 바라보며 세계와 상생하고 공존하는 지혜를 이어가야 할 때입니다.

    비록 일상에서 진짜 정낭을 보기는 어려워졌지만, 제주 사람들이 수백 년간 지켜온 단단한 상생과 신뢰의 정신은 여전히 검은 돌담 사이에 따뜻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제주에 오실 기회가 있다면, 화려한 관광지 대신 제주의 옛 숨결이 담긴 조용한 시골 마을의 올레를 천천히 걸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대문 없이 열려 있는 제주의 정서가 지친 여러분의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줄 것입니다.

    이처럼 대지 위에서 이웃을 향해 빗장을 풀었던 제주인들의 위대한 신뢰와 상생의 법도는, 섬을 둘러싼 거칠고 가혹한 또 다른 영토인 ‘바다’ 위에서 더욱 경이로운 공동체 문명으로 피어납니다.

    다음 5회에서는 돌이 많고 바람이 몰아치는 삼다(三多)의 혹독한 결핍 속에서, 제주인들이 어떻게 절망을 딛고 뚝심 하나로 생존의 뿌리를 내렸는지 풀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집약되어 전 세계가 경탄하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의 위대한 연대와 상생의 사회학>을 품고 찾아오겠습니다.


    제주 오리진(Jeju Origin)


    참고 자료

    * 제주 부사 이형상이 쓴 제주도 박물지, 남환박물, 한경아
    * (사)제주올레 홈페이지


  • <제1회> 제주어 ‘맨도롱하다’의 진짜 의미와 일상의 온도

    푸른 수풀과 돌담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다섯 개의 제주 돌하르방 석상들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와 로컬의 깊은 가치를 전하는 블로그 ‘제주 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오늘 첫 글로 여러분께 제주도에서 가장 포근하고 정겨운 단어인 ‘맨도롱하다’를 소개해 드립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중매체나 여행 광고 속에서 ‘맨도롱하다’라는 단어는 주로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수식어로 소비되곤 합니다. 보통 이 단어의 뜻은 표준어 ‘따끈하다’의 제주 사투리 또는 제주 방언이라고 단순하게 알려져 있으나, 실제 제주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상 속 어감에는 분명하고도 미묘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참고로 ‘제주어’는 표준어인 ‘한국어’와는 별개의 언어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제주어’로 표기합니다.

    국제 공인 기구인, 세계 표준화 기구(ISO)에서도 ‘제주어’를 단순 방언이 아닌 독자적인 개별 언어로 인정하여, 고유 언어 코드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출처] SIL Global (ISO 639-3 등록 관리 기관) — iso639-3.sil.org

    • 한국어 공통 코드: kor (ISO 639-3) / ko (ISO 639-1)
    • 제주어 독자 코드: jje (ISO 639-3)

    이처럼 ‘제주어’가 ‘한국어’와 별개의 고유 언어로 등록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독립된 언어 자산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맨도롱하다’,
    어떤 이들은 이 단어를 거창한 문학적 표현으로 오해하곤 하지만, 사실 ‘맨도롱하다’는 기온이나 음식의 온도가 ‘차가움과 뜨거운 것 사이의 적당하게 미지근하면서도 따스한 상태’를 뜻하는 지극히 물리적이고 실용적인 제주어입니다.

    오늘은 ‘멘도롱하다’로 쓰기도 하는 이 제주어가 가진 진짜 어감과 그 속에 숨은 로컬의 매력을 찾아보려 합니다. 아울러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소박한 단어가 어떤 실질적인 메시지와 삶의 지혜를 전하고 있는지 함께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사전적 정의와 제주 사람들이 느끼는 정확한 어감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 따르면 ‘맨도롱’과 ‘멘도롱’은 둘 다 표준 표기로 등록되어 있으며, ‘따스하다’, ‘메지근하다’의 제주 방언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다른 국어사전에는 ‘미지근하다’의 제주 사투리로 정의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지에서 체감하는 언어의 온도는 조금 다릅니다. 표준어의 ‘따끈하다’는 말은 김이 풀풀 나거나 만졌을 때 꽤 높은 온도까지 포괄하는 역동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제주의 ‘맨도롱하다’는 미지근함의 상단과 따스함의 하단이 만나는 그 정겨운 중간 지점을 정확하게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팔팔 끓어 입안을 데일 것 같은 뜨거운 국물이 아니라, 식탁에 내놓은 뒤 한 김 식혀서 숟가락으로 바로 떠먹기 가장 편안하고 알맞은 온도의 국물을 만났을 때, 제주 사람들은 비로소 “국물이 맨도롱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른 아침, 서귀포나 제주시의 오래된 골목 식당에서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 고기국수나 몸국 한 그릇의 국물을 들이켰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따끈하게 다가오지만 맛을 음미하며 먹다 보면 서서히 입안 전체를 가득 채우는 그 자극 없는 편안함, 그 온도의 상태가 바로 ‘맨도롱하다’ 그것입니다. 즉,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고 인간의 몸에 가장 무리를 주지 않는 최적의 물리적 온도를 날카롭게 집어내는 지혜로운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 역시 어릴 적 제주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러한 온도를 피부로 느끼며 자랐습니다. 거센 칼바람이 부는 겨울날, 온돌방에서 화롯불을 쬐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시는 두 분의 나지막한 대화를 들으며 아랫목 이불 속에서 느꼈던 그 아늑하고 포근한 온기야말로 이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구석을 채우는 추억이자 그리움의 실체입니다.

    한옥 온돌방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따뜻한 화로 앞에 앉아 서로 대화를 나누고, 이불을 덮고 누운 아이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정겨운 모습

    (ai 이미지 생성)

    2. 척박한 화산섬 환경이 만들어낸 실용적인 온도의 지혜

    이 짧은 제주어 한 마디에는 제주의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거친 세월을 살아온 섬사람들의 아주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과거의 제주는 사면이 매서운 바닷바람에 노출되어 있었고, 돌이 많고 흙이 귀한 척박한 토양 때문에 늘 생존 자체가 고단하고 치열했던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매서운 겨울철의 추위 속에서, 혹은 칼바람이 부는 바다에 몸을 던져 물질을 마친 해녀들에게 체온을 회복하기 위한 ‘온기’는 생명과 직결된 필수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저체온증 상태에서 갑자기 너무 과하게 뜨거운 물이나 불을 접하는 것은 도리어 화상을 입히거나 몸의 혈관에 큰 무리를 주어 사람을 상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거친 바다에서 막 돌아와 얼어붙은 신체를 서서히, 그리고 안전하게 깨워주는 완만하고 적당한 온기, 바로 ‘맨도롱한 상태’의 물과 불이야말로 그들의 삶을 지켜주는 가장 실질적인 구원줄이었습니다. 화려한 수식어나 과장 없이 그저 인간의 삶과 생존에 딱 알맞은 실용적인 온도를 가장 귀하게 여겼던 로컬의 정서가 이 단어에 그대로 묻어나는 이유입니다.


    3. 과열된 현대사회에 던지는 ‘맨도롱함’의 미학

    뜨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이 ‘맨도롱한 상태’는, 오늘날 매 순간 고온으로 과열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매우 깊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우리는 흔히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열정이라는 보기 좋은 이름 하에 온몸을 불태워버릴 듯 언제나 ‘뜨겁게’만 살기를 강요받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번아웃이라는 지독한 피로를 맞이하고, 순식간에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양극단의 상태를 위태롭게 오가곤 합니다.

    유럽 덴마크어의 아늑한 문화적 정서인 ‘휘게(Hygge: 편안하고 따뜻한 상태)’가 다소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감성적 영역에 치우쳐 있다면, 제주의 ‘맨도롱하다’는 그보다 훨씬 담백하고 현실적입니다. 지나치게 뜨거워서 소중한 혀를 데이지도 않고, 반대로 너무 차가워서 음식의 맛이 굳어버리지도 않는, 딱 먹기 좋은 국물의 황금 온도처럼 우리 일상의 밸런스도 너무 과열되지 않게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는 조율이 필요하다는 생활의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4. 제주 오리진(Jeju Origin)이 풀어주는 ‘맨도롱하다’ 핵심 FAQ

    여기서 독자분들이 가장 궁금해하시는 제주어의 재미있는 비밀 몇 가지를 문답 형식으로 알기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A. 일반적으로 제주의 언어에서 ‘따뜻하다’는 ‘또똣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덥지 않을 만큼 알맞게 높은 온도를 뜻하기도 하고, 사람의 감정이나 태도, 그리고 공간의 분위기 따위가 정답고 포근할 때도 널리 쓰이는 정겨운 단어입니다. “날씨가 또똣하다”, “마음이 또똣해진다”처럼 광범위한 온기를 담아내는 제주의 대표적인 어휘입니다.

    Q2. 그렇다면 ‘또똣하다’와 ‘맨도롱하다’는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나요?

    A. ‘또똣하다’ 보다 온도가 살짝 낮은 느낌을 주는 단어가 바로 ‘맨도롱하다’입니다. 이 단어는 주로 국물, 차, 물처럼 우리가 마시거나, 혹은 온돌방 아랫목처럼 우리가 몸으로 직접 수용하는 대상의 온도가 자극 없이 딱 알맞고 기분 좋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미지근함’보다는 조금 더 따뜻하고 ‘뜨겁다’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상태입니다. 기후나 감정의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오감 및 식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된 제주인들만의 아주 실용적이고 지혜로운 온도 개념이라고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A. 가장 대표적인 일상 표현으로 식사를 할 때에 “국이 맨도롱할 때 혼저(얼른) 먹으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음식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식지도 않은 가장 맛있고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을 뜻합니다. 일상에서 타이밍과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정겨운 표현입니다.

    Q4. 한때 ‘맨도롱 또똣’이라는 말이 꽤 유행했었는데, 실제 현지에서도 자주 쓰이는 표현인가요?

    A. 지난 2015년, 국내의 한 지상파 방송국에서 ‘맨도롱 또똣’이라는 제목의 드라마를 방영하면서 이 표현이 대중적인 시청률과 함께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뜻이 널리 전파되어 한때 꽤 유행했었고, 요즘에는 마치 하나의 세트처럼 당연하게 붙여 쓰는 표현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주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자란 제주 토박이로서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저를 포함한 현지 주민들과 지인들은 일상에서 결코 이 두 단어를 합쳐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 것처럼 ‘맨도롱하다’와 ‘또똣하다’는 엄연히 인간이 피부나 오감으로 느끼는 온도의 결이 다릅니다. 그렇기에 제주 사람들은 상황과 대상에 따라 이 두 단어를 철저하게 구분해서 사용해 왔으며, 이를 한 문장으로 붙여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아마도 드라마 제작 과정에서 제주어가 가진 특유의 정겹고 예쁜 어감을 극대화하고, 드라마의 극적인 재미를 살리기 위해 두 개의 단어를 재치 있게 조합하여 사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미디어 속 낭만적인 표현과 실제 로컬의 정교한 언어생활에는 이처럼 재미있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5. 제주 여행의 즐거움을 높여 드릴 무공해 조미료

    나무 탁자 위 검은색 뚝배기에 담겨 먹기 좋게 알맞은 온도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맨도롱한 제주 고기국수

    (ai 이미지 생성)
    혹시 여러분이 제주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다면, 단순히 풍경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제주의 대표 향토 음식인 ‘고기국수’나 ‘몸국’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멘도롱하다’의 진짜 의미를 되새겨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맨도롱하고 진한 국물 한 모금 속에서, 옛 제주 어르신들이 이웃과 나누었던 그 넉넉하고 따뜻한 온심(溫心)을 온전히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이때의 국수나 몸국 한 사발은 아마도 여행의 깊이를 더해줄 훌륭한 조미료가 될 것입니다. 만일 ‘맨도롱하다’의 온기를 느끼신다면 그 순간부터 여러분에게는 제주의 속 깊은 곳까지 방문하는 진짜 여행의 시작이 펼쳐질 것입니다.

    6. 글을 마치며: 당신의 일상 온도는 몇 도인가요?
    그리고, 제주 온기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제주어 ‘맨도롱하다’는 환상 속의 미화된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화산섬의 거친 환경을 버텨낸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찾아낸 가장 편안하고 실용적인 온도의 역사적인 기록입니다.

    오늘 하루, 복잡한 일상과 산더미 같은 업무 속에서 내 마음과 일상의 온도가 혹시 과열되어 끓어 넘치고 있지는 않은지 가만히 점검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런데 음식과 사람의 정서뿐만 아니라, 제주의 거친 겨울바람을 막아주고 이 ‘맨도롱한 온기’를 사계절 내내 스스로 품고 있는 제주의 진짜 자연 비밀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혹시 아시나요? 과연 제주의 땅과 거친 화산 지형은 어떻게 이 가장 편안한 온도를 스스로 뚝심 있게 유지하는 걸까요?

    제주의 대지와 화산 토양이 숨겨 둔 흥미롭고 신비한 과학적인 비밀을 바로 다음 글 <제주의 대지가 품은 ‘맨도롱한’ 비밀과 축복>에서 명쾌한 근거와 함께 이어 가겠습니다.

    제주 오리진(Jeju Ori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