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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회> 닫혀 있으나 신뢰로 열리는 문, 제주의 지혜 ‘정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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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를 전하는 ‘제주 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지난 3회에서는 거친 태풍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바람과 상생하는 <제주 돌담의 물리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바람의 길을 막지 않고 통과시키는 돌담의 유연함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제주 사람들의 삶 그 자체였지요.

    그 부드러운 곡선의 돌담은 각자의 집 앞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오늘은 그 돌담이 끝나는 곳, 마을 길에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의 집 입구에서 마주하게 되는 독특한 문화유산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제주의 전통 대문인 ‘정낭’, 그리고 대문으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제주의 진짜 ‘올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 조부모님 댁 입구에 들어설 때면, 거칠고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 사이에 정겹게 걸쳐놓은 길다란 나무 장대를 늘 보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시절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던 정낭에는 단순히 집 안과 밖을 구별하는 것 이상의 놀라운 과학과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위대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1. ‘올레’의 원래 의미와 현재 알려진 ‘올레길’의 차이

    ‘정낭’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정낭과 처음 마주치는 공간인 ‘올레’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흔히 ‘올레길 걷기’ 열풍으로 널리 알려져 사용 중인 ‘올레길’의 의미는 제주 전통의 ‘올레’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1) 전통적 의미의 올레

    ‘올레’는 ‘큰길이나 마을 길에서 집 마당까지 이어지는 돌담으로 둘러쌓인 좁은 골목길’을 뜻합니다.

    제주 초가집은 거센 바람을 막기 위해 큰길에서 마당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돌담을 디귿(⊏)자나 곡선 형태로 길게 쌓아 입구를 만들었는데, 이 공간을 ‘올레’라고 불렀습니다.

    2) 올레의 과학

    이 올레에는 제주 선조들의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올레는 넓고 크게 만들기보다 일부러 좁게 하거나 구부러지는 형태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면이 바다인 제주의 강한 바람이 큰길에서 집안으로 곧장 불어닥칠 때, 좁고 굽어진 돌담 골목인 올레를 통과하면서 바람의 속도가 줄어듭니다. 즉, 거센 바람이나 태풍으로부터 안마당과 초가집을 보호하는 ‘천연 바람 완충 지대’였던 셈입니다. 이 올레가 끝나는 지점, 즉 집 마당의 진짜 입구에서 우리는 제주의 대문인 ‘정낭’을 마주하게 됩니다.

    3) 의미가 확장된 요즘의 ‘올레길’

    지금 우리가 흔히 걷는 도보 여행 코스인 ‘제주 올레길’은 옛날부터 내려온 지명이 아니라, 2007년 (사)제주올레에서 제주도의 아름다운 도보 여행 코스를 개발하면서 붙인 ‘현대적인 브랜드 이름’입니다.

    “제주의 집 앞 골목을 뜻하는 ‘올레’처럼, 여행자들이 도보 여행을 통해 제주의 깊숙한 속살과 문화를 조용히 만나고 가라”는 의미를 담아 트레킹 코스를 ‘올레길’이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이 브랜드가 전 국민적으로 엄청난 히트를 치다 보니, 어느새 전국적으로 ‘길게 걷는 산책로나 등산로’ 전체를 뜻하는 대명사처럼 쓰이게 된 것입니다. 제주올레라는 말에는 ‘제주에 올래?’라는 초대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합니다.

    4) 아쉬움과 새로운 희망

    제주 토박이로서 전통적 의미의 올레가 사라져 가고 잊혀져 가는 현실에 아쉬움이 짙게 남습니다. 하지만 순기능이 크게 있기에 아쉬운 한 켠을 메꿀 수 있어서 다행으로 여깁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현재 제주의 올레길 정비, 해안 청소, 올래길과 접한 마을 주민들과의 상생을 위한 아이템 개발 등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들은 제주 관광의 주요 문화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제주올레가 제주를 넘어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제주 올레를 해외로 확장해 나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2. 정낭과 정주석, 바람의 섬이 만들어낸 과학적 구조와 아날로그 신호

    육지의 전통 가옥을 보면 나무로 짠 튼튼하고 빽빽한 대문이 집안을 꽉 막고 있지만, 제주의 시골집 입구에는 사방이 막힌 대문이 없었습니다. 대신 집 입구 양쪽에 구멍이 세 개씩 뚫린 커다란 돌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긴 나무 장대를 가로로 걸쳐두었습니다.

    이때 구멍 뚫린 돌기둥이나 나무기둥을 ‘정주석’ 또는 ‘정주목’이라 부르고, 그 사이의 나무 장대를 ‘정낭’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주목 없이 돌담 자체를 지지대 삼아 정낭을 얹거나 구멍에 끼워 사용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1) 정낭의 역할

    정낭’은 제주 전통가옥의 정식 대문입니다.

    단순히 기다란 장대 하나에 불과하지만, 정낭은 실제적인 대문과 울타리 역할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과거 중산간 지역에서는 소나 말을 방목하여 키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을길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가축들이 집 마당 안으로 불쑥 들어와 텃밭의 농작물을 망치거나 초가집을 훼손하는 것을 이 정낭이 완벽하게 차단해 주었습니다.

    2) 제주에 대문이 없었던 이유

    제주에는 왜 육지처럼 번듯한 대문이 없었을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제주의 거센 ‘바람’ 때문입니다. 사방이 꽉 막힌 대문은 사철 몰아치는 제주의 강한 태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문짝이 뜯겨 나가거나 돌담까지 무너뜨리기 십상입니다. 제주 사람들은 돌담을 쌓을 때처럼, 대문을 만들 때에도 자연과 싸우기보다 순응하는 법을 택했습니다. 나무 장대 몇 개로 이루어진 정낭은 바람이 아무리 세게 불어도 그 사이로 바람을 유유히 흘려보내기에 태풍에도 끄떡없는 가장 완벽한 대문인 셈입니다.

    3. 숫자와 위치로 소통하는 아날로그 메신저

    정낭이 가진 가장 흥미롭고 아름다운 점은 바로 이 나무 장대의 개수와 위치를 통해 이웃과 소통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스마트폰의 프로필 상태창이나 메신저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알리듯, 옛 제주 사람들은 정낭의 개수로 집주인의 현재 상황을 이웃들에게 실시간으로 전했습니다.

    1)정낭이 모두 내려져 있는 경우 (0개)

    집 안에 사람이 있으니 누구든 편하게 들어오라는 환대의 표시입니다.

    2) 정낭이 1개 걸려 있는 경우

    “집주인이 지금 아주 가까운 이웃집에 잠시 마실을 갔거나, 동네 거까이서 볼 일 보러 갔으니 곧 돌아옵니다.”라는 뜻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주인을 만날 수 있다는 다정한 안내문인 것이죠.

    3) 정낭이 2개 걸려 있는 경우

    “지금 집에서 조금 떨어진 밭에 일을 하러 나갔거나 멀리 나무를 하러 가서, 오후 늦게나 저녁때가 되어야 돌아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다음에 다시 찾아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4) 정낭이 3개 걸려 있는 경우

    “지금 먼 곳에 있는 다른 마을에 가거나, 며칠 동안 집을 비웁니다.”라는 뜻입니다.
    장대 3개가 꽉 채워져 걸려 있으면 이웃들은 집안에 아무도 없음을 인지하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5) 정낭을 1개 또는 2개만 사용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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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는 1개 또는 2개만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정낭을 가로로 걸치면 집에 늦게 돌아온다는 뜻이고, 사선으로 비스듬히 걸치면 금방 돌아온다는 뜻이었습니다.

    6) 종합

    이처럼 정낭은 단순한 나무 장대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는 소리 없는 언어이자 가장 따뜻한 아날로그 메신저였습니다.

    4. 정낭이 증명하는 제주의 위대한 가치, 신뢰와 삼무(三無) 정신

    1) 역사 기록 속의 삼무

    1704년에 이형상이 제주 목사로 부임하던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저술한 제주도 지방지인 『남환박물』 에 기록한 것을 번역한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제주도의 토질이 척박해서 백성들은 가난한 삶을 살았다. 땅에는 바위와 돌이 널려 있고 흙이 덮인 곳이 드물어서 삼과 면화를 기르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의복과 음식이 항상 부족했다. 의복과 음식은 소박했으며,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다. 이렇듯 제주도 백성들은 항상 가난에 시달렸지만 물건을 훔치는 자가 없었다. 말이나 소, 농기구, 곡물을 들에 방치하여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보안 기능이 없는 정낭이 대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주의 ‘삼무(三無) 정신’ 덕분입니다. 제주의 삼무는 ‘도둑이 없고, 거지가 없으며, 대문이 없다’는 뜻입니다.

    2) 현대의 기술적 첨단 보안과 제주의 자치적 보안 시스템

    여기서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현대 과학의 패러다임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전 세계 정보보안 시장의 핵심 철학은 ‘제로 트러스트(Zero Trust)’입니다. 직역하면 “아무도 믿지 마라(Zero Trust), 그리고 항상 검증하라(Always Verify)”라는 뜻입니다.

    현대의 제로 트러스트 보안 시스템은 내부에 이미 들어와 있는 최고 경영자나 신뢰받는 직원이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절대 신뢰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불신 장벽에서 출발합니다. 방 안의 서류 하나를 열어볼 때마다, 컴퓨터 시스템에 접속할 때마다 끊임없이 생체 인증(지문·안면 인식)을 요구하며 “당신이 정말 권한이 있는 사람이 맞는지”를 매 순간 가혹하게 검증하는 기술입니다.

    불신이 깊어질수록 인간 사회가 감당해야 할 시스템 구축 비용과 심리적 피로감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마련입니다. 물리적인 형태만 보면 제주의 정낭은 이 제로 트러스트 관점에서 ‘보안 점수 0점’의 허술한 바리케이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제주의 정낭은 기술의 복잡성으로 불신을 제어하는 현대 공학의 패러다임을 정면으로 뒤집는 완벽한 ‘상호 신뢰의 공동체 규범’을 보여줍니다.

    결국 정낭은 기계 장치로 인간을 감시하는 삭막한 기술이 아니라, ‘정직’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의 힘으로 공간을 완벽하게 방어해 낸 인류 역사상 가장 고차원적인 ‘제로 비용의 인문학적 보안 시스템’이었던 셈입니다.

    3) 소결

    정낭은 힘으로 침입자를 때려눕히거나 시스템적으로 차단하는 ‘강제 보안’이 아닙니다. 정낭은 도둑을 막기 위한 ‘차단막’이 아니라, 이웃 간의 단단한 ‘신뢰와 약속’이었습니다.

    “지금 집을 비우니 안으로 들어오지 말아 달라.”는 주인의 무언의 요청을, 마을 사람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존중해 주었던 것입니다. 도둑이 없다는 상호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열려 있는 믿음직한 정낭이라는 대문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높은 철제 대문을 세우고, 삼중 잠금장치를 달고, CCTV를 24시간 가동하면서도 늘 불안해하며 살아갑니다. 아무도 믿지 말고 끊임없이 검증하라는 제로 트러스트의 철저한 불신 속에 스스로를 격리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에 대해 제주의 정낭은 완전히 반대의 결론을 내려주며, ‘진정한 안전과 평화는 철저한 감시가 아니라 서로를 믿는 신뢰에서 온다.’는 깊은 울림을 전해줍니다.

    5. 올레에서 마주하던 그리운 추억들

    돌담을 따라 굽어지는 올레길을 걸어 들어가면, 고풍스러운 초가집이 보이고, 그 입구 한쪽 끝에 단정하게 성낭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집에 돌아 왔을 때에, 반갑게 맞아주시던 할머니의 환한 미소가 고스란히 겹쳐옵니다.

    한 올레 안에는 여러 집들이 모여 있는 경우가 많으며 대개는 작은 골목이입니다.

    조부모님 집 앞의 올레는 비교적 넓고 꽤 긴 편이었습니다. 덕분에 또래의 마을 아이들이 여럿이 모여서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하고, 때로는 연날리기도 했던 장소여서 꽤나 많은 추억이 쌓인 공간입니다.

    가을이면 초가집 지붕에 얹은 묵은 새(‘띠’의제주 방언)를 교체하고 난 뒤에 지붕을 튼튼히 묶을 용도로 길게 집줄(‘새’로 만든 동아줄)을 꼬아 만들었습니다. 이때에 공동 작업으로 어른들과 함께 ‘호랭이’를 돌리던 올레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호랭이’는 끝의 구부러진 갈고리에 새끼줄을 걸어서 ‘ㄴ’자 형태의 손잡이를 돌리며 집줄을 꼬아나갈 때 쓰는 도구입니다. 제주 사투리인데 ‘우리말 샘’ 등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진 설명: 성읍 민속마을에서 초가 지붕 집줄 묶기과 집줄 만들기 시연 중이며, 여성 두 명이 호랭이를 돌리고 있는 모습임)

    6. 맺음말: 내 삶의 울타리를 허물고, 신뢰의 올레길을 걸을 시간

    선조들은 돌담에 구멍을 내어 바람을 통과시키는 유연함의 지혜를 보였습니다. 이제 우리도 현대의 거센 변화 속에서, 내면의 높은 벽을 허물고 미래를 바라보며 세계와 상생하고 공존하는 지혜를 이어가야 할 때입니다.

    비록 일상에서 진짜 정낭을 보기는 어려워졌지만, 제주 사람들이 수백 년간 지켜온 단단한 상생과 신뢰의 정신은 여전히 검은 돌담 사이에 따뜻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제주에 오실 기회가 있다면, 화려한 관광지 대신 제주의 옛 숨결이 담긴 조용한 시골 마을의 올레를 천천히 걸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대문 없이 열려 있는 제주의 정서가 지친 여러분의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줄 것입니다.

    이처럼 대지 위에서 이웃을 향해 빗장을 풀었던 제주인들의 위대한 신뢰와 상생의 법도는, 섬을 둘러싼 거칠고 가혹한 또 다른 영토인 ‘바다’ 위에서 더욱 경이로운 공동체 문명으로 피어납니다.

    다음 5회에서는 돌이 많고 바람이 몰아치는 삼다(三多)의 혹독한 결핍 속에서, 제주인들이 어떻게 절망을 딛고 뚝심 하나로 생존의 뿌리를 내렸는지 풀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집약되어 전 세계가 경탄하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의 위대한 연대와 상생의 사회학>을 품고 찾아오겠습니다.

    제주 오리진(Jeju Origin)

    참고 자료
    * 제주 부사 이형상이 쓴 제주도 박물지, 남환박물, 한경아
    * (사)제주올레 홈페이지

  • <제1회> 제주 사투리 ‘맨도롱하다’의 진짜 의미와 일상의 온도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와 로컬의 깊은 가치를 전하는 블로그 ‘제주 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오늘 첫 글로 여러분께 제주도에서 가장 포근하고 정겨운 단어인 ‘맨도롱하다’를 소개해 드립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중매체나 여행 광고 속에서 ‘맨도롱하다’라는 단어는 주로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수식어로 소비되곤 합니다. 보통 이 단어의 뜻은 표준어 ‘따끈하다’의 제주 방언이라고 단순하게 알려져 있으나, 실제 제주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상 속 어감에는 분명하고도 미묘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단어를 거창한 문학적 표현으로 오해하곤 하지만, 사실 ‘맨도롱하다’는 기온이나 음식의 온도가 ‘차가움과 뜨거운 것 사이의 적당하게 미지근하면서도 따스한 상태’를 뜻하는 지극히 물리적이고 실용적인 제주 사투리입니다.

    오늘은 ‘멘도롱하다’로 쓰기도 하는 이 제주방언이 가진 진짜 어감과 그 속에 숨은 로컬의 매력을 찾아보려 합니다. 아울러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소박한 단어가 어떤 실질적인 메시지와 삶의 지혜를 전하고 있는지 함께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사전적 정의와 제주 사람들이 느끼는 정확한 어감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 따르면 ‘맨도롱’과 ‘멘도롱’은 둘 다 표준 표기로 등록되어 있으며, ‘따스하다’, ‘메지근하다’의 제주 방언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다른 국어사전에는 ‘미지근하다’의 제주 사투리로 정의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지에서 체감하는 언어의 온도는 조금 다릅니다. 표준어의 ‘따끈하다’는 말은 김이 풀풀 나거나 만졌을 때 꽤 높은 온도까지 포괄하는 역동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제주의 ‘맨도롱하다’는 미지근함의 상단과 따스함의 하단이 만나는 그 정겨운 중간 지점을 정확하게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팔팔 끓어 입안을 데일 것 같은 뜨거운 국물이 아니라, 식탁에 내놓은 뒤 한 김 식혀서 숟가락으로 바로 떠먹기 가장 편안하고 알맞은 온도의 국물을 만났을 때, 제주 사람들은 비로소 “국물이 맨도롱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른 아침, 서귀포나 제주시의 오래된 골목 식당에서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 고기국수나 몸국 한 그릇의 국물을 들이켰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따끈하게 다가오지만 맛을 음미하며 먹다 보면 서서히 입안 전체를 가득 채우는 그 자극 없는 편안함, 그 온도의 상태가 바로 ‘맨도롱하다’ 그것입니다. 즉,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고 인간의 몸에 가장 무리를 주지 않는 최적의 물리적 온도를 날카롭게 집어내는 지혜로운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 역시 어릴 적 제주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러한 온도를 피부로 느끼며 자랐습니다. 거센 칼바람이 부는 겨울날, 온돌방에서 화롯불을 쬐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시는 두 분의 나지막한 대화를 들으며 아랫목 이불 속에서 느꼈던 그 아늑하고 포근한 온기야말로 이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구석을 채우는 추억이자 그리움의 실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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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척박한 화산섬 환경이 만들어낸 실용적인 온도의 지혜

    이 짧은 사투리 한 마디에는 제주의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거친 세월을 살아온 섬사람들의 아주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과거의 제주는 사면이 매서운 바닷바람에 노출되어 있었고, 돌이 많고 흙이 귀한 척박한 토양 때문에 늘 생존 자체가 고단하고 치열했던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매서운 겨울철의 추위 속에서, 혹은 칼바람이 부는 바다에 몸을 던져 물질을 마친 해녀들에게 체온을 회복하기 위한 ‘온기’는 생명과 직결된 필수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저체온증 상태에서 갑자기 너무 과하게 뜨거운 물이나 불을 접하는 것은 도리어 화상을 입히거나 몸의 혈관에 큰 무리를 주어 사람을 상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거친 바다에서 막 돌아와 얼어붙은 신체를 서서히, 그리고 안전하게 깨워주는 완만하고 적당한 온기, 바로 ‘맨도롱한 상태’의 물과 불이야말로 그들의 삶을 지켜주는 가장 실질적인 구원줄이었습니다. 화려한 수식어나 과장 없이 그저 인간의 삶과 생존에 딱 알맞은 실용적인 온도를 가장 귀하게 여겼던 로컬의 정서가 이 단어에 그대로 묻어나는 이유입니다.


    3. 과열된 현대사회에 던지는 ‘맨도롱함’의 미학

    뜨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이 ‘맨도롱한 상태’는, 오늘날 매 순간 고온으로 과열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매우 깊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우리는 흔히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열정이라는 보기 좋은 이름 하에 온몸을 불태워버릴 듯 언제나 ‘뜨겁게’만 살기를 강요받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번아웃이라는 지독한 피로를 맞이하고, 순식간에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양극단의 상태를 위태롭게 오가곤 합니다.

    유럽 덴마크어의 아늑한 문화적 정서인 ‘휘게(Hygge: 편안하고 따뜻한 상태)’가 다소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감성적 영역에 치우쳐 있다면, 제주의 ‘맨도롱하다’는 그보다 훨씬 담백하고 현실적입니다. 지나치게 뜨거워서 소중한 혀를 데이지도 않고, 반대로 너무 차가워서 음식의 맛이 굳어버리지도 않는, 딱 먹기 좋은 국물의 황금 온도처럼 우리 일상의 밸런스도 너무 과열되지 않게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는 조율이 필요하다는 생활의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4. 제주 오리진(Jeju Origin)이 풀어주는 ‘맨도롱하다’ 핵심 FAQ

    여기서 독자분들이 가장 궁금해하시는 제주 사투리의 재미있는 비밀 몇 가지를 문답 형식으로 알기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A. 일반적으로 제주의 언어에서 ‘따뜻하다’는 ‘또똣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덥지 않을 만큼 알맞게 높은 온도를 뜻하기도 하고, 사람의 감정이나 태도, 그리고 공간의 분위기 따위가 정답고 포근할 때도 널리 쓰이는 정겨운 단어입니다. “날씨가 또똣하다”, “마음이 또똣해진다”처럼 광범위한 온기를 담아내는 제주의 대표 사투리입니다.

    Q2. 그렇다면 ‘또똣하다’와 ‘맨도롱하다’는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나요?

    A. ‘또똣하다’ 보다 온도가 살짝 낮은 느낌을 주는 단어가 바로 ‘맨도롱하다’입니다. 이 단어는 주로 국물, 차, 물처럼 우리가 마시거나, 혹은 온돌방 아랫목처럼 우리가 몸으로 직접 수용하는 대상의 온도가 자극 없이 딱 알맞고 기분 좋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미지근함’보다는 조금 더 따뜻하고 ‘뜨겁다’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상태입니다. 기후나 감정의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오감 및 식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된 제주인들만의 아주 실용적이고 지혜로운 온도 개념이라고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A. 가장 대표적인 일상 표현으로 식사를 할 때에 “국이 맨도롱할 때 혼저(얼른) 먹으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음식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식지도 않은 가장 맛있고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을 뜻합니다. 일상에서 타이밍과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정겨운 표현입니다.

    Q4. 한때 ‘맨도롱 또똣’이라는 말이 꽤 유행했었는데, 실제 현지에서도 자주 쓰이는 표현인가요?

    A. 지난 2015년, 국내의 한 지상파 방송국에서 ‘맨도롱 또똣’이라는 제목의 드라마를 방영하면서 이 표현이 대중적인 시청률과 함께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뜻이 널리 전파되어 한때 꽤 유행했었고, 요즘에는 마치 하나의 세트처럼 당연하게 붙여 쓰는 표현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주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자란 제주 토박이로서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저를 포함한 현지 주민들과 지인들은 일상에서 결코 이 두 단어를 합쳐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 것처럼 ‘맨도롱하다’와 ‘또똣하다’는 엄연히 인간이 피부나 오감으로 느끼는 온도의 결이 다릅니다. 그렇기에 제주 사람들은 상황과 대상에 따라 이 두 단어를 철저하게 구분해서 사용해 왔으며, 이를 한 문장으로 붙여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아마도 드라마 제작 과정에서 제주 사투리가 가진 특유의 정겹고 예쁜 어감을 극대화하고, 드라마의 극적인 재미를 살리기 위해 두 개의 단어를 재치 있게 조합하여 사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미디어 속 낭만적인 표현과 실제 로컬의 정교한 언어생활에는 이처럼 재미있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5. 제주 여행의 즐거움을 높여 드릴 무공해 조미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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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여러분이 제주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다면, 단순히 풍경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제주의 대표 향토 음식인 ‘고기국수’나 ‘몸국’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멘도롱하다’의 진짜 의미를 되새겨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맨도롱하고 진한 국물 한 모금 속에서, 옛 제주 어르신들이 이웃과 나누었던 그 넉넉하고 따뜻한 온심(溫心)을 온전히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이때의 국수나 몸국 한 사발은 아마도 여행의 깊이를 더해줄 훌륭한 조미료가 될 것입니다. 만일 ‘맨도롱하다’의 온기를 느끼신다면 그 순간부터 여러분에게는 제주의 속 깊은 곳까지 방문하는 진짜 여행의 시작이 펼쳐질 것입니다.

    6. 글을 마치며: 당신의 일상 온도는 몇 도인가요?
    그리고, 제주 온기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제주 사투리 ‘맨도롱하다’는 환상 속의 미화된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화산섬의 거친 환경을 버텨낸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찾아낸 가장 편안하고 실용적인 온도의 역사적인 기록입니다.

    오늘 하루, 복잡한 일상과 산더미 같은 업무 속에서 내 마음과 일상의 온도가 혹시 과열되어 끓어 넘치고 있지는 않은지 가만히 점검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런데 음식과 사람의 정서뿐만 아니라, 제주의 거친 겨울바람을 막아주고 이 ‘맨도롱한 온기’를 사계절 내내 스스로 품고 있는 제주의 진짜 자연 비밀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혹시 아시나요? 과연 제주의 땅과 거친 화산 지형은 어떻게 이 가장 편안한 온도를 스스로 뚝심 있게 유지하는 걸까요?

    제주의 대지와 화산 토양이 숨겨 둔 흥미롭고 신비한 과학적인 비밀을 바로 다음 글 <제주의 대지가 품은 ‘맨도롱한’ 비밀과 축복>에서 명쾌한 근거와 함께 이어 가겠습니다.

    제주 오리진(Jeju Ori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