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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3회> 제주의 지방과 미네랄 영양학: 게우젓, 자리젓, 멜젓

    부제: 어패류의 생화학적 미네랄 흡수율과 필수 지질의 조리 과학

    제주의 화산재 토양은 지표면의 유기물 함량은 높으나, 다우지 특성상 비가 내리면 대사에 필수적인 칼슘과 마그네슘 등의 유효 미네랄 성분들이 하부 층위로 쉽게 용탈(Leaching)되는 독특한 지질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토양 자체에 존재하는 미네랄마저 일반토양과 달리 인산을 강하게 흡착 고정하는 화산회토 특유의 강한 성질 때문에 토양의 유효인산 함량이 매우 떨어져서 비옥도가 낮아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식물들이 미네랄을 제대로 흡수하여 자라나기 힘든 척박한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주 땅에서 수확한 곡물이나 채소는 인간의 골격 대사에 필요한 활성 미네랄이 태생적으로 빈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제주의 물은 겹겹이 쌓인 현무암과 화산재층을 통과하며 천연 미네랄을 풍부하게 흡수해 낸 세계 최고 수준의 청정 약알칼리성 암반수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수한 식수라 할지라도 물속에 녹아있는 이온 형태의 미네랄만으로는 인간이 하루에 필요한 칼슘과 영양소의 절대량을 모두 충족하기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일상적인 식수와 채식 위주의 식단에서 결핍되기 쉬운 필수 미네랄과 영양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제주의 선조들은 척박한 땅 대신 청정한 제주의 바다로 눈을 돌렸고, 바다의 선물인 어패류를 지혜롭게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바다에서 얻은 전복의 내장, 자리돔, 멸치를 소금에 삭혀 만든 ‘발효 젓갈 문화’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염장 보존식을 넘어, 섬 환경의 영양학적 한계를 극복한 지혜였습니다.

    이번 제6-3회 연재에서는 제주의 식탁을 지켜온 핵심 축인 ‘지방(Fat)과 미네랄(Mineral)’에 주목하여, 발효를 통해 미네랄의 체내 흡수율을 극대화하고 필수 지질을 확보했던 선조들의 경이로운 조리 과학을 파고들고자 합니다.

    1. 전복 게우젓: 푸른 바다의 미네랄 결정체와 불포화지방산의 조화

    제주 바다의 깊은 영양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음식을 꼽으라면 단연 전복의 내장으로 담근 ‘게우젓’입니다. ‘게우’는 전복의 내장을 뜻하는 순수한 제주어입니다. 역사적으로 제주의 ‘포작인'(해산물 채취하는 남성)과 해녀들이 목숨을 걸고 바다에서 채취한 양질의 전복은 알맹이만 발라내어 잘 말린 건전복(乾全鰒)으로 만들어 왕실에 진상품으로 고스란히 바쳐져야만 했습니다. 정작 전복을 채취한 제주인들의 손에 남은 것은 보관이 까다롭고 쉽게 상하는 내장뿐이었지요. 이 아픈 진상의 역사와 결핍 속에서 태어난 눈물겨운 지혜가 바로 ‘게우젓’입니다.

    어린 시절, 물질을 마치고 돌아오신 동네 해녀 삼춘들이 건네주던 신선한 게우를 기억합니다. 그것을 천일염에 살짝 버무려 장독에 삭혀두다가 밥반찬으로 내어주실 때, 그 진한 녹색의 젓갈이 뿜어내던 바다의 풍미와 감칠맛은 어린 제 입맛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따끈한 보리밥 위에 게우젓 한 점을 얹어 쓱쓱 비벼 먹으면 그 어떤 산해진미도 부럽지 않았지요.

    제주전복’은 생태적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의 ‘맛의 방주’에 99호로 공식 등록되어 있습니다. 제주 청정 바다에서 자라는 해조류를 먹고 자라서 바다의 영양을 고스란히 응축해 낸 전복은 선조들에게 단순한 보양식을 넘어 영양의 보고 그 자체였습니다. 전복의 영양 핵심은 살코기보다 오히려 독특한 녹진함을 품은 ‘게우(제주 방언, 전복의 내장)’에 몰려 있습니다.

    전복의 모든 영양소가 농축된 내장으로 담근 게우젓은, 토양과 식수만으로는 채우기 힘들었던 미네랄과 필수 영양소를 가장 활성화된 상태로 섭취할 수 있게 돕는 최고의 발효 과학이었습니다. 바다의 생명력을 인간의 생체 이용률로 전환해 낸 선조들의 경이로운 지혜가 이 작은 젓갈 한 종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선조들이 이 귀한 제주전복의 영양학적 정수인 내장을 버리지 않고 발효 과학을 접목해 ‘게우젓’으로 재탄생시킨 지혜는, 원재료의 가치를 한층 더 극대화한 식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1) 해조류의 영양 응축과 자기소화(Autolysis)’의 메커니즘

    과학의 관점에서 게우젓은 일반적인 식물성 발효와는 궤를 달리합니다. 그 핵심은 식재료 자체가 가진 효소를 극한으로 활용하는 ‘자기소화(Autolysis)’에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전복은 바다의 미역이나 다시마 같은 갈조류를 주식으로 삼아 성장하는 패류입니다. 이 때문에 전복의 내장(게우) 조직에는 거친 해조류의 섬유질과 성분들을 소화하기 위한 자체적인 소화 분해 효소들이 자연스럽게 밀집해 있는 생태적 특성을 지니게 됩니다.

    이러한 소화 기관에 축적된 해조류 유래 무기질 성분 덕분에, 게우는 인체 대사 기능에 관여하는 아연(Zn), 철분(Fe), 구리(Cu) 등의 영양소를 풍부하게 품은 보고가 됩니다. 내장에 소금을 쳐서 삭히기 시작하면, 게우가 본래 품고 있던 자체 효소들이 활성화되면서 고분자 단백질 구조를 장에서 흡수하기 쉬운 저분자 상태로 해체하는 자기소화 공정의 첫 단추를 채우게 됩니다.

    실제 국립목포대학교 연구팀의 연구 논문인 <한국에서 생산되는 전복의 영양성분 비교 분석(2013)>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생화학적 사실이 드러납니다.

    (인용, 일부 발췌 수정)
    Table 3. 전복 육(살)과 내장의 미네랄 함량 비교 (단위: mg/100 g)

    부위전복 육(살코기)전복내장(게우)
    산지제주도제주도
    칼슘 (Ca)31.6846.74
    구리 (Cu)0.521.96
    철분 (Fe)3.8220.92
    칼륨 (K)65.66119.14
    마그네슘 (Mg)62.7284.72
    나트륨 (Na)529.12587.16
    (P)114.31159.44
    아연 (Zn)0.722.04

    (인용 끝)

    위 미네랄 분석 데이터(Table 3)는 왜 제주의 선조들이 전복의 살코기보다 내장을 영양의 정수로 취급했는지를 과학적으로 명백하게 대변해 줍니다.

    인간의 혈액을 생성하고 빈혈을 예방하는 핵심 원소인 철분(Fe)의 경우, 제주산 전복 내장에는 살코기보다 무려 5.4배가 넘는 고농축 결정체(20.92 mg)가 축적되어 있었습니다. 아울러 체내 대사와 면역계 항산화 효소의 활성을 돕는 구리(Cu)는 3.7배, 아연(Zn)은 2.8배나 더 내장에 밀집해 있었으며, 화산섬 제주 땅에서 늘 결핍되기 쉬웠던 칼슘(Ca)과 영양 대사를 돕는 마그네슘(Mg), 인(P), 칼륨(K) 등의 무기질 전반이 살코기를 압도하는 강력한 영양의 밀도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전복의 생태적 특성 덕분에 내장에 풍부하게 응축된 무기질 성분들은, 섬 지형 특성상 일상적인 식단에서 미네랄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웠던 제주인들에게 훌륭한 영양학적 보완재가 되어주었을 것으로 분석됩니다. 선조들은 이러한 내장의 가치를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고, 이를 버리지 않고 발효 과학과 결합하여 게우젓이라는 지혜로운 식문화를 완성해 냈던 것입니다.

    위의 같은 논문을 인용합니다.

    “전복 내장의 구성아미노산 함량은 93.16~127.02 mg/g이었으며 이는 전복 육(살코기)의 평균 145 mg/g에 비해 낮은 편이었다. 반면에 전복 내장의 유리아미노산 함량은 16.81~20.10 mg/g으로 전복 육의 7.90~10.59 mg/g에 비하여 2배 높은 값을 보였다.“

    여기서 ‘구성아미노산’은 단백질 덩어리 속에 단단히 묶여 있어 인간이 섭취했을 때 위장과 소장에서 소화 효소로 다 쪼개야만 비로소 흡수될 수 있는 ‘잠재적 영양소’를 뜻합니다. 반면 ‘유리아미노산’은 단백질로 묶이지 않고 세포액 속에 자유롭게 녹아 있어 혀에 닿자마자 강한 감칠맛을 느끼게 해주고 소화 과정 없이 몸에 즉시 흡수되는 ‘활성 영양소’입니다.

    즉, 총 단백질 덩어리(구성아미노산) 자체는 전복의 살코기가 내장보다 더 많지만, 몸에 즉시 흡수되고 깊은 맛을 내는 활성 유리아미노산은 내장이 살코기보다 무려 2배나 많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제주의 선조들이 행한 ‘발효(젓갈)’가 더해지면 놀라운 생화학적 반전이 일어납니다. 내장에 소금을 쳐서 삭히면, 게우가 본래 가지고 있던 강력한 자체 소화 효소들이 삼투압 환경 속에서 활성화되어 내장 속에 묶여 있던 고분자 단백질 사슬을 스스로 다 끊어내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잠재적 영양소였던 구성아미노산들이 몸에 즉시 흡수되는 저분자 활성 유리아미노산으로 대량 전환되는 것입니다.

    2) 내염성 미생물 발효의 결합과 미네랄 흡수율의 극대화(Chelation 효과)

    자연 상태의 미네랄은 거친 무기질 형태여서 인간의 장벽을 통과해 흡수되는 비율(생체이용률)이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게우가 소금과 만나 삭혀지는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자체 효소의 자기소화’와 동시에 ‘내염성 미생물에 의한 발효 작용’이 함께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소금 속에서 살아남은 특수한 유산균과 미생물들이 대사 과정에서 유기산을 분해·형성하고, 앞서 목포대 연구팀의 고증에서 드러났듯 살코기보다 2배나 풍부하게 녹아 있는 저분자 유리아미노산들이 무기질 미네랄 성분들과 결합하는 생화학적 환경이 조성됩니다.

    이처럼 발효 과정을 통해 생성된 천연 유리아미노산 성분들이 미네랄 입자와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구조적 변화는, 미네랄이 인간의 장벽에서 보다 수월하게 수용되어 체내 생체 이용률을 보완할 수 있도록 돕는 긍정적인 영양학적 기제로 작용합니다. 결과적으로 선조들은 게우젓이라는 발효식품을 통해, 신체 대사 기능과 방어 기제에 필요한 미네랄 성분들을 한층 더 효율적인 상태로 섭취할 수 있었던 셈입니다.

    특히 게우젓에 응축된 아연과 구리는 인체 내에서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강력한 항산화 효소의 활성 유도체로 작용하여, 화산섬의 척박한 노동 환경 속에서 세포의 산화적 손상을 방어하는 핵심적인 생체 방어 기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3) 초저지방 식단의 단비, 필수 불포화지방산

    게우는 전복 살코기와 달리 지질(지방) 함량이 높은 편인데, 이 지질의 상당부분은 혈액 속 노폐물을 몸 밖으로 배출하며 혈관 건강을 돕고 두뇌 기능에 필수적인 불포화지방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의 ‘전복의 영양성분을 비교 분석’한 논문에 따르면,

    전복육의 지방산조성은 불포화지방산이 약 41%로 포화지방산 약 31%에 비하여 높았으며, 전복육보다 전복내장이 높은 결과를 보였다.

    이처럼 일상 식단에서 지방 섭취가 극도로 제한되었던 제주인들에게, 알싸하게 삭은 게우젓은 세포막을 구성하고 호르몬을 대사하는데 필요한 필수 지방산을 공급하는 훌륭한 영양 공급원이었습니다.

    2. 자리젓: 척박한 화산재 땅의 칼슘 결핍을 메운 골격 영양학

    제주인들의 밥상에서 가장 친숙하면서도 영양학적으로 위대한 젓갈은 바로 ‘자리젓’입니다. 몸집이 작고 뼈가 단단한 자리돔을 통째로 소금에 삭혀 만드는 자리젓에는 섬 지형의 치명적인 약점을 보완하려는 선인들의 눈부신 생존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자리젓 냄새가 하도 고소해서 먹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어린 제가 먹기에는 단단한 가시가 거슬려서 조심스럽게 국물만 떠서 밥에 비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가시가 부드럽게 씹히기에 자리젓의 온전한 맛을 느끼며 먹게 되었습니다.

    자리젓의 원재료인 자리돔은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만들어낸 독창적인 향토 자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맛의 방주 59호 ‘자리돔’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선인들은 이 자리돔을 통째로 삭히는 발효 과정을 통해 단단한 뼈를 연화시키고 칼슘 성분의 체내 흡수율을 높이는 지혜로운 식문화를 완성해 냈습니다.

    1) 화산재 토양의 한계와 칼슘 결핍의 극복

    현무암과 화산재로 덮인 제주의 토양은 물과 함께 미네랄을 쉽게 흘려보내는 물리적 특성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제주 땅에서 자란 채소나 곡물은 육지의 것에 비해 칼슘 함량이 태생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었으며, 식수를 통해서도 미네랄을 충분히 보충하기 어려웠습니다. 선조들은 이 고질적인 칼슘 결핍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바다로 눈을 돌려 뼈째 삭혀 먹는 자리젓,멜젓이라는 지혜로운 대안을 찾아냈습니다. 특히 원재료인 자리돔은 몸집에 비해 뼈가 매우 억세어서 생으로 섭취할 때는 반드시 뼈를 추려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물론 자리돔을 뼈째 먹는 문화가 있었지만, 단단한 생선 뼈의 주성분인 인산칼슘 구조는 무기질 결정을 이루고 있어 단독으로 섭취할 때 인간의 장벽에서 일어나는 소화 흡수율이 아주 높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척박한 화산섬 지형 특성상 일상적인 식수와 채식에서 활성 미네랄을 충분히 얻기 어려웠던 제주인들에게, 생선 뼈 속 칼슘의 생체 이용률을 끌어올리는 것은 영양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주의 선조들은 두 가지 지혜로운 대안을 찾아냈습니다. 첫째는 날것으로 먹는 자리물회에 ‘식초(초산)’를 결합하여 산성 환경을 만들어 뼈를 부드럽게 녹여내고 칼슘의 용해도를 높인 조리 과학이며, 둘째는 오랜 시간 소금에 삭혀 먹는 ‘자리젓’의 발효 과학입니다. 선조들은 고질적인 미네랄 결핍 환경에 굴하지 않고, 뼈째 삭히는 과정에서 인산칼슘 구조가 저분화되어 흡수율이 극대화되는 자리젓을 통해 연중 사시사철 활용할 수 있는 훌륭한 천연 칼슘 보완책을 완성해 냈습니다.

    2) 유기산 발효를 통한 골격 연화와 천연 활성 칼슘 전환

    인간의 소화계가 쉽게 흡수할 수 없던 자리돔과 멜의 단단한 무기질 결정 구조는, 소금에 절여 장기간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생화학적 반전을 맞이합니다.

    학계의 전통 수산발효 연구 고증에 따르면, 젓갈이나 식해와 같은 전통 어류 발효 식품들은 숙성 과정에서 자생하는 젖산균(유산균)들과 미생물들이 대사산물로 천연 유기산을 지속적으로 뿜어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산성 환경의 조성이 단단한 생선 뼈의 조직을 부드럽게 완화하는 ‘연화(Softening) 작용’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잘 삭은 자리젓이나 멜젓을 입에 넣었을 때 억센 뼈가 이물감 없이 부드럽게 씹히는 비결이 바로 이 수산발효 고유의 생화학적 메커니즘에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발효 과정을 통해 딱딱한 뼈가 부드러워져 온전히 섭취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일반적인 상태에서는 체내 흡수가 어려웠던 무기 칼슘 성분들이 장벽에서 한층 수월하게 수용될 수 있는 훌륭한 영양학적 보완재로 거듭났던 셈입니다.

    이처럼 발효 과학을 거치며 섭취와 흡수가 용이한 형태로 전환된 천연 칼슘과 인 성분들은, 섬 지형 특성상 미네랄이 풍부한 식수나 농작물을 얻기 힘들었던 제주인들에게 일상 속에서 결핍되기 쉬운 무기질을 지속적으로 채워주는 든든한 영양학적 지지대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본래 우리 전통 젓갈의 본질은 어패류를 염장한 후, 재료 내부의 자가 소화효소와 미생물의 작용을 동시에 활용해 육질과 뼈를 완전히 분해해 내는 고도의 생체 이용률 극대화 공정입니다.

    멸치 젓갈 등전통 수산발효식품에 관한 공인 연구에 따르면, 염장 숙성 과정을 거치며 단백질이 해체되면서 소화 흡수가 용이한 저분자 유리아미노산이 현저히 증가하게 됩니다. 자생한 유익 젖산균(유산균)들은 장내 환경을 산성화하여 식중독균 등 유해 세균의 증식을 강력하게 저해할 뿐만 아니라, 장 점막의 면역 시스템 기능을 체계적으로 강화하는 프로바이오틱스(Probiotics)로서의 탁월한 생리활성 효능을 발휘합니다.

    더욱이 이들 자생 젖산균이 발효 과정에서 뿜어내는 특수한 대사산물들은 체내 혈관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나쁜 콜레스테롤 수치를 감소시키는 데 기여한다는 사실까지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전통 젓갈은 단순한 염장 저장식을 넘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옛 선조들의 장내 면역 장벽을 지키고 신체 활력을 유지해 주었던 지혜로운 면역 영양식이었던 셈입니다.

    실제 제주대학교 대학원 신은영의 연구 논문 《동굴숙성 제주 전통젓갈의 미생물 특성연구(2007)》에 따르면, 전통 방식대로 삭혀낸 제주의 자리돔젓 등에서는 전복이나 생선의 자체 소화효소뿐만 아니라, 분리 균주의 무려 67%(300균주 중 200균주)에 달하는 강력한 단백질 분해 활성 미생물들(Bacillus subtilis 등)이 공존하며 숙성과 구조 해체를 주도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더불어 전통 젓갈 발효 과학의 경이로움은 단순히 영양소의 저분화와 흡수율 극대화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한국식품과학회지에 발표된 임은서 연구팀의 학술 고증 《멸치 젓갈로부터 분리된 젖산세균의 프로바이오틱 특성 및 안전성 평가(2016)》에 따르면, 젓갈 속 자생 유산균들은 강력한 위산(pH 2.0~3.0)과 거친 쓸개즙의 공격을 견뎌내고 살아서 장까지 도달할 뿐만 아니라, 장벽 상피세포에 단단히 부착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는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식량기구(FAO)가 정한 ‘인체에 유익한 프로바이오틱스’ 균주로서의 필수적인 기본 요건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결과입니다. 더불어 이 유산균들이 항균 물질이면서 유전적 돌연변이나 독성 물질 유발 가능성이 없는 안전한 유익균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젓갈 속 미생물들은 외부 유해 잡균의 침입을 원천 차단하는 정교한 생물학적 방제 시스템을 구축합니다. 농업생명공학연구원 윤상홍 연구팀의 논문 《한국 전통젓갈에서 분리한 Bacillus subtilis JKK238 균주 유래 세 종류 Lipopeptide의 분리 및 특성(2005)》에 따르면, 젓갈 속 자생 고초균들은 발효 과정에서 폭넓은 항생능을 지닌 ‘이투린(iturin)’, ‘서팩틴(surfactin)’, ‘펜지신(fengycin)’, ‘프리파스타틴(plipastatin)’ 등의 강력한 천연 항균 물질(Lipopeptide)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냅니다. 이 천연 항균 물질들은 외부 유해균의 세포막을 즉각 해체하여 젓갈 내부의 안전성을 완벽히 지켜내며, 나아가 식중독 유해균의 증식을 효과적으로 저해하여 장내 환경을 방어합니다.

    특히 실험실 내(in vitro) 검정 결과, 면역 저하자에게 치사율이 높아 치명적인 식중독균으로 분류되는 리스테리아(Listeria monocytogenes)에 대해 매우 강력한(+++) 억제 활성을 나타냈으며, 일상에서 가장 흔히 발생하는 대표적 식중독 원인균인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의 증식 또한 효과적으로 저해(+)했습니다.

    유전적 독성이 없는 안전한 유익균들이 장내 환경을 개선하고, 자생 고초균이 천연 방제 물질을 내뿜어 완성한 이 위대한 발효식품은, 척박한 화산섬에서 거친 노동을 견뎌내야 했던 제주 선조들의 장내 미생물 생태계를 건강하게 되살리고 면역 시스템을 뒷받침하던 최고의 생명선이었던 셈입니다.

    3. 멜젓: 제주재래돼지와 멜의 만남, 지질(Fat) 대사와 아미노산의 시너지 과학

    고향 마을은 바닷가 가까이에 접해 있습니다. 어렸을 적 가끔씩 “멜(멸치) 들어 왔수다~” 하고 누군가 소리치면 마을 사람들이 바쁘게 농사 짓던 일손을 멈추고 양손에 양동이며 소쿠리 등을 들고 덩달아 소리를 지르며 바닷가로 달려가던 일이 생각납니다.

    저희 마을 포구 밖 입구 쪽 바다에 원담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원담은 폭과 높이를 약 1m 정도가 되도록 돌담을 큰 원을 그리며 듬성듬성 쌓아 둔 것을 말합니다. 밀물 때에 몰려 온 물고기들이 썰물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 안에 갇히게 만든 일종의 거대한 돌담 그물이라 하겠습니다.

    멜(멸치)은 크게 무리를 이루어 이동하는 습성이 있어서 이 무리가 일단 원담 안에 갇히면 그 양 또한 엄청납니다. 썰물이 빠져나간 원담 바닥 위에서 엄청난 살짝 푸른 빛을 띤 은빛 멸치 무리들이 펄떡이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저는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바구니를 대고 쓸어 담았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그 양이 워낙 많기에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소리치며 모여들어 큰 바구니 등에 마구 쓸어 담아도 미처 다 챙기지 못할 정도일 때도 꽤 있었습니다. 어차피 다 담아 오지 못하면 밀물에 도로 사라지게 되므로 온 동네에 소문을 내며 빨리 주으라고 서로 챙겨주었던 것입니다. 멜은 원래 지방질이 많아서 바로 소비하지 않으면 상하기 쉬웠습니다. 워낙 많이 주워 운 멜을 보관하는 방법은 즉시 젓갈로 담그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멜을 사 먹기보다 원담 안에서 주워 와서 먹은 게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현대식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없애 버렸기에, 사라진 원담은 이제 그저 저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추억이 되어버렸으며 항상 진한 아쉬움 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주 식문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조리 과학적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주인공은 바로 ‘멜젓(멸치젓)’입니다. 지금도 제주에서는 대부분의 돼지고기나 오리고기 식당에서 멜젓을 당연하다는 듯이 상차림에 기본으로 나옵니다.

    봄철 제주 바다를 가득 메우던 큰 멸치(멜)를 삭혀 만든 멜젓은, 특히 제주의 상징이며 맛의 방주 25호 등록된 ‘제주재래돼지’와 만나면 강력한 지방 분해 효소인 리파아제를 통해 환상의 조화를 이루며 제주 특유의 돔베고기 문화와 돋보이는 지질 대사 과학을 완성하는 주인공이 됩니다.

    이러한 멜젓의 독보적인 분해 능력은 또 다른 독창적인 향토 자산인 ‘맛의 방주’ 117호 ‘제주 수애’와 만났을 때도 빛을 발합니다. ‘수애’는 제주방언으로 ‘수웨’라고도 불렀으며 전통적 제주식 순대입니다. 수애는 돼지피에 보리가루와 메밀가루를 섞고, 잘게 썬 소량의 부추 등 야채와 함께 약간의 다진마늘과 다진쪽파, 생강, 소금, 후추 등을 넣어 걸쭉한 반죽을 만든 후에 돼지 내장에 넣어서 만듭니다.

    성장하여 육지부에 처음 갔을 때 접한 당면 순대는 유년 시절 늘 먹어왔던 고향의 순대와 그 형태와 맛이 너무나도 달라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돼지 내장 한쪽 끝에 깔때기를 끼워 신선한 돼지피를 집어넣고 실로 묶어 가마솥에서 도새기를 삶은 진한 국물에 몸국을 끓이기 직전에 먼저 끓여내던 생생한 가택 도축의 풍경을 수없이 목격하며 자랐기에, 당연히 모든 순대는 제주의 전통 수애처럼 선지를 중심으로 속을 묵직하게 채웠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찌는 방식의 낯선 육지식 순대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놀라움과 동시에 깊은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쌀이 귀한 환경에서 선지의 점성을 잡기 위해 메밀가루를 섞고 채소 고명과 함께 속을 채워 빚어낸 묵직한 고단백의 제주 수애는 자칫 장내에서 소화 대사가 더딜 수 있으나, 발효된 멜젓의 풍부한 아미노산과 분해 효소들이 수애의 단백질 구조를 부드럽게 연화시키고 영양 성분의 체내 흡수율을 극대화하는 보완적 대사 과학을 훌륭하게 수행해 냅니다.

    1) 지방 분해 효소와 지질 대사의 활성화

    제주의 선조들이 삶은 돔베고기나 구운 돼지고기를 먹을 때 반드시 멜젓을 곁들이거나 불판 위에 멜젓을 자작하게 끓여 찍어 먹었던 풍습은 인체 소화 과학의 정수입니다. 잘 삭은 멜젓의 국물 안에는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며 뿜어낸 강력한 단백질 분해 효소인 프로테아제와 지방 분해 효소인 리파아제가 고농축으로 함유되어 있습니다. 조리 과학적으로 멜젓 속의 프로테아제는 돼지고기 특유의 단단한 단백질 섬유를 아미노산과 펩타이드 상태로 사전 분해하여 위장관의 소화 부담을 덜어줍니다. 이와 동시에 강력한 리파아제 성분은 돼지 지방의 트리글리세라이드 구조를 유기산과 모노글리세리드로 빠르게 가수분해합니다. 기름진 돼지 지방이 위장에 들어가기 전 멜젓의 효소들이 일차적으로 지질 구조를 미세하게 쪼개어 소화 불량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전 분해 작용은 포화지방산이 미처 소화되지 못한 채 장내에서 더부룩함이나 가스를 유발하는 부담을 줄여줍니다. 즉, 멜젓의 천연 리파아제는 지방을 우리 몸이 흡수하기 좋은 형태로 빠르게 전환시켜, 기름진 고기를 섭취할 때 발생하기 쉬운 소화기계의 부담을 자연스럽게 덜어주는 훌륭한 영양학적 보완 역할을 합니다.

    2) 불포화지방산 필수 아미노산의 영양학적 상보성

    등푸른생선인 멜(멸치)의 핵심 영양소는 풍부한 핵산(Nucleic acid), 그리고 오메가-3 계열인 EPA와 DHA를 다량 함유한 양질의 지질입니다. 이 불포화지방산들은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조절하고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돕는 역할을 합니다.

    발효된 멜젓은 돼지고기의 포화지방이 혈관에 쌓이는 것을 방지하는 불포화지방산을 공급해 주며, 돼지고기 단백질과 미생물 발효 단백질이 만나 아미노산의 영양학적 상보성(서로 부족한 영양소를 채워주는 효과)을 완벽하게 완성합니다.

    6-3회 맺음말: 바다의 지혜가 완성한 영양학적 균형

    결국 제주의 게우젓, 자리젓, 멜젓은 단순히 입맛을 돋우는 반찬이나 짠맛을 내는 조미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척박한 화산 섬이 지닌 미네랄의 결핍을 바다의 유기물로 메우고, 초저지방 식단 속에서 인간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필수 지질과 불포화지방산을 미생물의 발효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공급받았던 훌륭한 영양 공급원이었습니다.

    바다의 영양을 옹기 속 미생물 발효를 통해 인간에게 가장 완벽한 흡수 형태로 변환시킨 선조들의 지혜는, 영양 과잉과 미네랄 불균형으로 고통받는 현대인들의 식단에 깊은 과학적 메시지와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번 제6-3회 연재를 통해 제주의 바다가 선물한 게우젓, 자리젓, 멜젓 속 ‘발효 미생물과 양질의 지질, 그리고 고칼슘의 영양학’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면, 이어지는 다음 제6-4회 연재에서는 이번 단백질과 미네랄 식문화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제주의 독창적인 ‘천연 약용 보존 과학: 꿩엿과 뎅이주 약엿’의 세계로 찾아갑니다.

    겨울철 부족한 영양을 당(Sugar)의 힘을 빌려 상하지 않게 묶어두었던 선인들의 지혜와, 기침을 멎게 하던 뎅이주 껍질 속 약리 과학을 저의 생생한 유년 시절의 따뜻한 추억과 흥미로운 의학적 데이터와 함께 풀어내겠습니다.

    (제주오리진, Jeju Origin)

    <참고 자료>

    * 우리말샘, 제주방언

    *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대한민국 맛의 방주

    * 류순호, 송관철, “제주도의 토양과 농업자원: 제주도 토양의 분류와 특성 및 관리 문제”, 제주도연구(제주학회), 제8집, 1991, pp. 42-58.

    * 이정뢰, 보섭, 강성국, “한국에서 생산되는 전복의 영양성분 비교 분석”, 한국식품저장유통학회지, 제20권 제4호, 2013, pp. 441-450.

    * 신은영, “동굴숙성 제주 전통젓갈의 미생물 특성연구” (2007) 제주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 임은서·김영목·이은우, “멸치 젓갈로부터 분리된 젖산세균의 프로바이오틱 특성 및 안전성 평가”, 한국식품과학회지, Vol. 48, No. 4, pp. 306~316 (2016)

    * 윤상홍, 김정봉, 임융호, 홍성렬, 송재경, 김삼선, 권순우, 박인철, 김수진, 여윤수, 구본성, “한국 전통젓갈에서 분리한 Bacillus subtilis JKK238 균주 유래 세 종류 Lipopeptide의 분리 및 특성”, 한국미생물·생명공학회지, 제33권 제4호, 2005, pp. 291-297.

  • <제6-2회> 제주의 단백질 영양학: 푸른콩장과 몸국


    부제: 식물성 단백질과 동물성 단백질의 활용 지혜

    제주의 선조들은 척박한 화산재 땅과 거친 바다라는 고립된 섬 환경 속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습니다.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제주의 토양은 물을 머금지 못해 쌀농사가 불가능했으며, 이는 늘 만성적인 영양 결핍, 특히 단백질의 부족으로 이어지기 쉬운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제주의 선인들은 때로는 미생물의 힘을 빌리고, 때로는 고유의 조리 과학을 활용해 이 한계를 위대하게 극복해 냈습니다.

    지난 연재에서 탄수화물 중심의 곡물 발효(쉰다리, 빙떡, 상외떡)를 통해 에너지원의 보존 과학을 다루었다면, 이번에는 제주의 척박함을 이겨내게 한 핵심 영양소인 ‘단백질’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땅에서 얻은 식물성 단백질 발효의 정수인 ‘푸른콩장’에서 시작하여, 마을의 대사를 통해 얻은 동물성 단백질의 결정체인 ‘몸국’으로 이어지는 제주의 식문화 흐름 속에는 선인들의 경이로운 영양학적 진화와 조리 과학이 숨어 있습니다.

    1. 땅에서 얻은 천연 영양 보고, 제주 푸른콩장의 미생물학적 메커니즘

    1) 슬로푸드 운동과 ‘맛의방주’

    슬로푸드운동은 슬로푸드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좋고(good), 깨끗하고(clean), 공정한(fair) 음식입니다.

    슬로푸드 운동은 1986년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현재는 전세계 170개 국가에서 100만명이 넘는 활동가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슬로푸드 철학은 전통적이며 지속 가능한 음식과 식재료를 지키며, 경작법과 가공법을 보존하고 가축과 야생 동물의 생물종다양성을 보호합니다. 지역의 문화를 소중하게 여기고, 지역의 전통음식, 토종 종자, 발효음식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음식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데 나서고 있습니다.

    슬로푸드 운동에 지역음식문화유산을 지켜나가는 ‘맛의방주’라는 국제 프로젝트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맛의방주는 노아의 방주처럼 소멸 위기에 처한 종자나 식재료를 찾아 목록을 만들어 ‘맛의방주’에 승선시켜 지역음식문화유산을 지켜나가는 국제 프로젝트이다. 맛의방주는 2024년 12월 기준 전 세계적으로 161개국에서 6,110여 종이, 한국에서는 제주푸른콩을 비롯하여 118종이 국제 슬로푸드 ‘맛의방주’에 등재되었다. 맛의방주는 전 세계 문화와 전통이 깃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음식을 기록한 온라인 목록이다.』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는 한국의 슬로푸드운동을 대표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맛의 방주 100개를 엄선하였습니다. 협회의 발굴기준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지역 고유 맛을 가진 식재료와 식품, 지역 고유 토종 또는 야생종, 지역 생산물을 이용해 전통방식으로 만든 가공식품
    ② 지역의 전통적인 조리방법과 가공법 등을 가지고 있고 독창적인 맛과 특성을 가지고 있는 식품

    2) 제주푸른콩장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가 엄선한 ‘대한민국 맛의방주 100’의 제1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 바로 ‘제주푸른콩장’입니다.

    제주푸른콩장은 푸른독새기콩 등으로 불리는 제주 지역 토종콩인 푸른콩으로 만든 장입니다.

    제주 선조들은 타지역과 달리 여름철에 된장냉국, 된장물회를 즐겼고 채소는 물론 생선회, 돼지고기 수육도 대부분 생된장에 찍어 먹었습니다. 따라서 생된장과 함께 섭취하는 전통음식이 많습니다. ‘푸른콩장’은 이러한 전통음식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습니다.

    실제로 제주에서 나고 자란 저 역시, 어린 시절 육지 사람들처럼 된장을 늘 끓여만 먹는 것이 아니라 싱싱한 자리돔 물회에 생된장을 듬뿍 풀고, 밭에서 갓 딴 고추나 물외(토종 오이, 노각 오이) 등을 생된장에 툭툭 찍어 먹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할아버지께서는 할머니께서 만드는 국이 제일 맛있다고 하시며, 다른 집 음식은 할머니 국 맛을 못 따라간다고 자주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할머니께서 만드신 된장 맛이 좋아서 그런 거라고 하셨죠. 비록 푸른콩장은 아니었지만, 할머니께서 담그셨던 베지근한 그 된장의 살아있는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향수입니다.

    제주 토종 콩인 ‘푸른콩’은 ‘장콩’이라고도 부르며, 콩 자체가 자당을 9.1% 함유하고 있어 일반 메주콩에 비해 고소하며 단맛이 높고 찰집니다. 또한 감칠맛이 나고, 오래 숙성시켜도 장 특유의 군내가 나지 않아서, 일반 된장과 차별되는 독특한 맛을 품고 있습니다.

    제주의 푸른콩은 육지의 대두와 달리 껍질과 속이 모두 은은한 푸른빛을 띄며, 제주의 강한 바람과 가뭄을 견뎌낸 강인한 생명력을 품고 있습니다. 이 푸른콩을 기반으로 만드는 제주의 전통 ‘푸른콩장’은 일반 육지의 된장과 비교했을 때 제조 과정과 균주(菌株)의 분포에서도 매우 독창적인 특성을 보입니다.

    3) 된장의 미생물학적 메커니즘

    콩을 삶아서 벽돌 모양의 메주로 만든 다음 볏짚으로 엮어 처마에 매달아 두는 이유는 고초균을 활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초균은 마른풀에 서식하고 있는 미생물로서 볏짚에 서식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바실러스 서브틸리스라고 합니다.

    메주를 볏짚으로 엮어 두면, 지푸라기에 서식하고 있던 바실러스 서브틸리스가 콩에 달라붙어 강력한 분해 효소(Protease)를 분비하는데, 콩이 가진 전분이라는 커다란 덩어리를 분해하여 포도당으로 분해한다던지, 콩의 거대하고 거친 식물성 단백질 구조를 인간의 장벽에서 즉각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작은 단위인 아미노산으로 정밀하게 쪼개어 줍니다. 이 아미노산이 감칠맛을 나게 하는 성분인 것입니다.

    4) 제주 푸른콩장 제조 과정의 특징

    제주의 토종된장은 육지의 된장처럼 짜고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특유의 향긋함과 은은한 단맛, 그리고 묵직한 감칠맛이 도는 독창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별화된 발효학의 비밀은 제주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볏짚의 결핍에 기인합니다.

    제주는 논농사를 짓지 못해 메주를 묶을 ‘볏짚’이 귀했습니다. 육지에서는 볏짚에 붙어 있는 유익 미생물인 고초균을 메주에 이식하여 발효를 유도하지만, 제주의 선조들은 볏짚 없이 맑은 바닷바람과 산바람이 교차하는 서늘한 돌담 공간에서 청정한 자연계에 상시 존재하던 고유의 토종 고초균(Bacillus subtilis) 균주들을 메주 표면에 자연스럽게 안착시켜 발효를 유도하였습니다.

    이 제주의 토종 고초균들은 푸른콩이 가진 풍부한 아미노산 성분과 결합하여 강력한 생화학적 반응을 일으킵니다. 고초균이 분비하는 효소들이 콩 단백질을 미세하게 쪼개면서, 인공 조미료의 감칠맛을 능가하는 천연 글루탐산(Glutamic acid)을 폭발적으로 생성해 냅니다. 소금을 많이 쓰지 않아도 장맛이 깊고 베지근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제주의 푸른콩장은 제조 방법과 발효 환경에서 육지의 장류와 궤를 달리합니다. 삶은 콩을 메주로 만들어 쓰는 육지와 달리, 제주에서는 전통적으로 삶은 콩을 으깨어 누룩가루와 섞은 뒤 몇 개월만 숙성시키면 완성되는 막장을 많이 담갔습니다. 때로는 볶은 푸른콩가루(개역)를 직접 활용하여 장을 담그기도 하였는데, 이는 미생물과의 접촉 면적을 극대화하여 발효 속도를 앞당기는 선인들의 영양학적 지혜였습니다.

    또한, 잿물을 바르지 않아 숨구멍이 살아있는 제주 고유의 전통 옹기에 담았는데, 제주의 옹기는 고온다습한 섬 기후 속에서도 내부 공기 순환을 원활하게 하여 유해 부패균을 막고 고유의 유익한 바실러스 균주들이 안정적으로 자생할 수 있는 최고의 미생물 생태계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5) 전통 제주 푸른콩장의 과학적 우수성

    콩에 다량 함유된 이소플라본(Isoflavone) 성분은 미생물의 효소와 만나면 발효 과정을 거치면서 체내 흡수율이 몇 배나 높은 ‘비배당체(Aglycone)’ 형태로 전환됩니다. 이는 혈관 건강 개선을 비롯해 항염증, 항암, 대사증후군 예방 및 장내 미생물 환경 조절 등 전방위적인 건강상 이점을 제공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제주 푸른콩은 원료인 상태는 물론 된장으로 발효된 상태에서도 우수성이 입증됩니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농업기술센터의 논문을 인용합니다.

    (인용)

    표 5. 품종에 따른 원료 및 된장의 이소플라본 함량 변화(㎎/100g)

    구 분세부 성분푸른콩
    (제주토종)
    백운콩
    (장류용)
    풍산콩
    (나물용)
    원 료제니스틴 (genistin)188.7155.6182.9
    다이드진 (daidzin)135.4103.7121.3
    제니스테인 (genistein) 8.7 8.4 8.6
    다이드제인 (daidzein) 23.1 4.5 4.7
    된 장제니스틴 (genistin) 5.4 5.1 6.1
    다이드진 (daidzin) 12.7 11.3 11.6
    제니스테인 (genistein) 114.1 81.5 99.7
    다이드제인 (daidzein) 74.8 41.8 52.8

    (인용 끝)

    제니스테인과 다이드제인은 생리기능이 가장 우수한 대표적인 이소플라본이라고 합니다. 원본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해 보면,

    콩 원료 상태에서 다른 콩과 대비 시 다이드제인(daidzein)은 백운콩 대비 5.13배, 풍산콩 대비 4.91배로 압도적이며, 발효 과정을 거쳐 된장이 되었을 때, 흡수율이 극대화된 형태인 제니스테인은 백운콩 대비 1.40배, 풍산콩 대비 1.14배이며, 다이드제인은 백운콩 대비 1.79배, 풍산콩 대비 1.42배로 나타나 다른 된장보다 유의미하게 높게 검출되었습니다. 이는 발효 후에도 제주 푸른콩장이 일반 된장 대비 영양학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다는 명확한 과학적 증거입니다.

    제주대학교 연구팀이 한국식품영양과학회지(J Korean Soc Food Sci Nutr)에 발표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제주 전통 방식으로 제조된 된장(푸른콩장)에서 자생하는 토종 바실러스(Bacillus) 속 균주들은 일반 표준 균주보다 단백질 분해 효소(Protease) 분비능이 월등히 뛰어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강력한 세포외효소들은 콩의 거대하고 거친 식물성 단백질 구조를 인간의 장벽에서 즉각적으로 소화 흡수할 수 있는 최소 단위인 아미노산과 저분자 펩타이드로 정밀하게 쪼개어 줍니다.

    더욱 놀라운 과학적 사실은 이 제주 토종 발효 미생물들이 현대인의 만성 성인병인 심혈관계 질환을 예방하는 강력한 ‘혈전용해 활성’을 뿜어낸다는 점입니다. 논문의 실험 결과, 제주 발효 균주 중 하나가 나타낸 혈전용해 활성은 인체 내에 존재하는 천연 혈전용해 효소인 플라스민(Plasmin)의 효능 대비 무려 192%에 달하는 압도적인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즉, 제주의 푸른콩장은 단순한 향토 음식을 넘어, 미생물의 대사 작용을 통해 단백질의 흡수율을 극대화하고 혈행 건강을 돕는 고부가가치 ‘기능성 바이오 푸드’의 원형인 것입니다.

    6) 전통 제주 장류 보존을 위한 노력의 필요

    전통 장류발효식품은 우리민족의 건강을 지켜온 우수한 단백질 공급원입니다. 하지만 염분의 함량이 높아 현대인의 성인병 예방 차원에서 볼 때 저염화 추세가 요구되는 요즘의 식생활을 감안하면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전통적인 제주 식단은 자극적인 절임 음식을 최소화하여, 전국에서 가장 담백하고 나트륨 자극이 적은 건강식으로 분류됩니다. 가뜩이나 인스턴트와 과도한 나트륨으로 현대인들의 장 건강과 면역계가 위협받는 요즘, 제주의 전통 푸른콩장은 사실상 미래 인류의 식단을 치유할 ‘천연 바이오 생명선’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소중한 전통 발효 식품이 자칫하면 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주 전통 푸른콩의 종자를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푸른콩을 원료로 한 전통 된장 제조 방법의 명맥을 유지하고 연구⦁개발하며 대외에 알리고 있는 제주 도내의 영농조합이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 여깁니다. 제주인의 일원으로서 관계자 분들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냅니다.

    2. 식물성에서 동물성으로의 영양학적 확장

    제주의 잔치나 상례 등 대사(大事)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음식을 꼽으라면 단연 ‘몸국’입니다.

    식물성 발효 단백질(푸른콩장)을 통해 일상적인 기초 영양을 확보한 제주의 식문화는, 마을의 대사(大事)를 기점으로 식물성 단백질 위주의 식단이 동물성 단백질로 영양학적 영역이 확장됩니다. 그 중심에 바로 제주의 잔치나 상례에서 공동체의 결속을 상징하던 음식인 ‘몸국’이 있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마을의 큰 행사가 있을 때 또는 ‘가문 잔치’에서 이웃들과 함께 도새기(제주 방언, 돼지)를 잡고 고기를 공평하게 나누는 고유의 풍습을 유지해 왔습니다. 가문-잔치(家門잔치)란 「명사」이며, ” 제주 전통 혼례에서, 혼례 전날 가까운 친척들이 잔칫집에 모여 치르는 잔치”를 뜻하는 제주 방언입니다. (‘우리말샘’)

    냉장 기술이 없던 시절, 귀한 도새기를 잡은 후 살코기는 삶아 내어 잔치 상에 올리지만, 돼지의 뼈와 내장, 부산물 역시 단 한 점도 버릴 수 없는 귀한 동물성 단백질과 지방 공급원이었습니다. 이를 모두 커다란 가마솥에 넣고 오랜 시간 뭉근하게 푹 고아내어 진한 육수를 만들어 냅니다. 이 과정에서 동물성 단백질과 진한 지방 성분이 국물에 녹아내립니다.

    여기에 거친 제주 바다에서 채취하여 말려둔 ‘몸'(제주 방언, 모자반)을 가득 넣어 끓여내어, 마지막에 메밀가루를 풀고 소금이나 전통 간장으로 간을 맞춰 완성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어린 시절 동네에 큰 잔치가 열려 도새기를 잡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마당에 모여 거대한 무쇠 가마솥 근처에 모여서 놀던 풍경이 떠오릅니다. 뼈와 내장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고아낸 진한 육수에 말린 모자반을 한가득 집어넣고 메밀가루를 휘휘 풀 때 퍼지던 그 구수하고 묵직한 냄새는 잔칫날의 설렘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이 몸국이라는 제주의 전통 요리 안에는 미생물 발효 못지않게 감탄을 자아내는 조리 과학적 상호작용이 숨어 있습니다. 커다란 가마솥 안에서 일어난 ‘유화 작용’ 덕분에 우리 선조들과 이웃들은 그 귀한 돼지 한 마리를 가장 완벽하고 소화가 잘되는 상태로 나누며 영양을 보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 지방의 유화(Emulsification)와 소화 흡수 과학

    지방의 유화(Emulsification)는 물과 섞이지 않는 지방을 미세한 입자로 쪼개어 물속에 고르게 분산시키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접촉 면적이 넓어져 소화 효소의 작용이 원활해지게 됩니다.

    돼지 부산물에서 나온 짙은 동물성 지방은 자칫 인간의 위장에 큰 부담을 주고 소화 불량을 유발하기 쉽습니다. 기름진 돼지 고기 국물임에도 불구하고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맛을 내며 소화가 잘되는 비결은 바로 바다의 모자반에 있습니다.

    1985년 한국수산학회지에 발표된 김동수·박영호 연구팀의 모자반 알긴산 연구 논문에 따르면, 모자반은 건조물 기준으로 원물의 25~26% 이상이 순수한 천연 ‘알긴산(Alginic acid)’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풍부한 알긴산과 다당류 성분은 가마솥에서 온도가 뜨겁게 상승함에 따라 분자 구조가 유연하게 풀려나와 퍼지는 독특한 물리적 특성을 지닙니다. 고온의 국물 속에서 해리된 알긴산 분자들이 천연 유화제 역할을 수행하여, 물과 섞이지 않는 무거운 동물성 지방 입자들을 미세하게 쪼개어 국물 전체에 고르게 분산시킵니다. 이 유화 과정을 통해 지방의 접촉 면적이 넓어져 체내 소화 효소의 작용이 원활해지며, 결과적으로 위벽을 보호하고 소화 흡수율을 극대화하는 상태로 변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논문은 모자반의 알긴산 성분이 지닌 독특한 분자 배열 구조에 의해 유해 금속 이온에 대해서도 뛰어난 흡착 및 이온교환능을 지니고 있음을 화학적 수치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선인들이 기름진 고단백 고지방 영양을 보충하는 동시에, 식이섬유질이 풍부한 해조류를 다량 곁들임으로써 장내 환경을 정화하고 영양적 밸런스를 완벽하게 맞추고자 했던 식생활의 지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2) 메밀가루를 통한 영양학적 밸런스와 잡내 제어

    (농촌진흥청, 그린매거진 인용)

    『메밀은 비타민 B1, B2, E, D를 비롯해 다른 곡물이나 쌀에 비해 단백질 함량이 14%나 높은 매우 영양가 있는 곡물이다. 또한 쌀이나 밀가루보다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해 단백가가 높으며 비타민 B1과 B2는 쌀에 비해 3배 정도 함유되어 있다.

    메밀 성분 중 매우 특징적인 것은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하는 비타민 P 일종인 플로보노이드 유도체 루틴이 많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루틴은 고혈압, 동맥경화증, 폐출혈, 궤양성질환, 동상, 치질, 감기 치료 등에 효과가 인정돼 임상에 이용되고 있는 성분이다. 또한 체내 노폐물을 내보내 피를 맑게 하여 혈관을 부드럽게 하고 혈압을 안정시켜준다.』

    전통적인 몸국은 조리 마지막 단계에 반드시 메밀가루를 물에 풀어 솥에 흩뿌리는 과정을 거칩니다. 메밀에 풍부하게 들어있는 ‘라이신(Lysine)’ 등 필수 아미노산은 돼지고기 단백질에 부족한 아미노산 조성을 완벽하게 보완하여 단백질의 영양가를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또한 메밀의 전분 입자는 돼지 육수 특유의 휘발성 누린내 성분을 물리적으로 흡착하여 가두어 버림으로써, 맛을 한층 더 부드럽고 담백하게 감싸주는 과학적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3. 맺음말: 식단 구조의 진화와 영양학적 대안

    결국 제주의 푸른콩장과 몸국은 단순한 향토 음식을 넘어, 섬이라는 지리적 고립과 척박함 속에서 자연 환경과 인간의 영양학이 치열하게 타협하여 만들어낸 식문화 예술입니다.

    일상적인 식물성 단백질의 미생물 분해(푸른콩장)에서 시작하여, 특별한 날 공동체가 함께 나누던 동물성 지방과 해조류, 그리고 잡곡의 조리 과학적 결합(몸국)으로 이어지는 단백질 식단의 확장은 제주의 생존을 지탱한 핵심이었습니다. 자극적인 현대 식단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제주의 전통 단백질 식문화는, 장내 미생물의 균형을 유지하고 소화계가 최적의 기능을 하도록 돕는 상태인 장 건강(Gut Health)과 깊은 영양적 위로를 주는 미래의 웰빙 대안이 될 것입니다.

    이번 제6-2회 글이 땅에서 올린 푸른콩장과 바다와 마을이 합작한 몸국을 통해 ‘단백질의 영양학’을 살펴보았다면, 다음 제6-3회 연재에서는 제주인들의 일상 식탁을 지켜온 또 다른 핵심 축, ‘지방(Fat)과 미네랄’의 조리 과학을 파고듭니다. 척박한 섬 환경 속에서 귀한 지방 성분을 효율적으로 섭취하고 보존하기 위해 선조들이 선택했던 지혜로운 식재료 활용법과, 제주의 청정 자연이 선사한 미네랄의 영양학적 비밀을 흥미로운 과학적 데이터와 함께 찾아오겠습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제주오리진, Jeju Origin)


    참고 자료


    * 우리말샘. 제주방언 사전 데이터.

    *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 홈페이지

    *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 홈페이지, 대한민국 맛의 방주 100 공식 선정 자료

    * 홍석일 (2020). 유용 미생물의 대명사가 된 ‘바실러스’. 농기자재신문 기고문.

    * 오유성·박지은·오현정·김정현·오명철·오창경·오영주·임상빈 (2010). 제주전통된장으로부터 세포외효소 분비능이 우수한 미생물의 분리 및 특성. 한국식품영양과학회지.

    * 한식진흥원 (KFPI). ‘푸른 콩장’으로 되살아난 제주 토종 ‘푸른 콩’ 온라인 매거진 리포트.

    * 기능식품 저널 (74, 2020). 주요 이소플라본 아글리콘과 그 대사산물의 생체이용률과 건강상의 이점. ScienceDirect 수록.

    * 김미실 (2005~2006). 제주토종 푸른콩의 가공적성 및 장류 제조특성 연구.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연구보고서.

    * 김동수·박영호 (1985). 알긴산의 화학적 조성 및 그 물성에 관한 연구 (4) 외톨개모자반 및 괭생이모자반의 알긴산. 한국수산학회지, 18(2), 124-130.

  • <제6-1회> 제주 전통 발효 음식의 바이오 과학: 제주의 천연 효모와 곡물 효소학

    부제: 쉰다리·상외떡·빙떡에 숨겨진 선조들의 미생물 제어 기술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와 로컬의 깊은 가치를 전하는 블로그 ‘제주 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지난 5회 글에서는 척박한 환경을 위대한 생명력으로 개척해 낸 제주의 ‘삼다(三多) 정신’, 그리고 거친 바다를 은빛 숨비소리로 채워내던 해녀들의 생체물리학과 상생의 연대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자연의 가혹한 시련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삶의 영토를 넓혀온 제주인들의 뚝심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전율을 주었지요.

    돌담의 구멍으로 태풍을 흘려보내고, 거친 바다에 몸을 던져 삶을 지탱하던 제주의 선조들. 그 고단하고 치열한 노동의 하루를 마친 뒤, 섬사람들은 과연 어떤 음식을 먹으며 척박한 영양의 한계를 극복했을까요?

    오늘은 자연이 준 결핍을 가장 영리한 과학으로 뒤집은 제주의 ‘식탁’ 안으로 걸어가 보려 합니다. 고온다습한 여름과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냉장고도 없이 생명을 지켜낸 제주 전통 발효 음식 속의 숨은 바이오 과학과, 그 소박한 밥상이 품은 삶의 지혜를 함께 추적해 보겠습니다.

    1. 소금의 결핍이 빚어낸 제주만의 독특한 발효 환경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한민국 전통 발효 음식의 핵심 조미료는 단연 ‘소금’입니다. 육지에서는 배추를 소금에 푹 절여 김치를 담그고, 소금물에 메주를 띄워 간장과 된장을 만들며 음식을 장기 보존해 왔습니다.

    하지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화산섬 제주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소금’이 인삼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제주에서는 방언으로 ‘소곰’이라고 하였으며, 소금이 귀한 이유는 세 가지 지리적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제주의 해안가는 온통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 지대였기에, 바닷물을 가두어 햇볕에 말리는 육지식 ‘천일염전’을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일부 지역에 있는 염전마저 비가 잦은 제주에서는 전통적인 천일염 방식으로 소금을 대량 생산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둘째, 따라서 바닷물을 가마솥에 붓고 밤새도록 장작을 태워 수분을 날리는 고단한 ‘자염(煮鹽)’ 방식으로만 소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는 많은 연료가 필요하지만, 제주 섬의 특성상 화력 보충을 위한 땔감마저 늘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셋째, 소금은 말·말총·귤·해산물 등의 제주 특산물을 육지부로 보내어 교환하는 방식으로 조달해야 했으나,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로 인해 거친 바다를 건너 소금을 안전하게 들여오는 물류의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이러하였기에, 제주 선조들에게 소금을 팍팍 쓰는 짠맛의 절임 문화는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화산재 토양인 제주는 물이 고이지 않아 쌀농사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평소에는 꽁보리밥이나 지실밥(감자밥)을 주식으로 삼아야 했고, 희고 고운 쌀밥이란 뜻인 ‘곤밥’이나 메밀로 정성껏 부쳐낸 ‘빙떡’은 제사, 명절이나 경조사 같은 집안의 큰 행사가 있을 때만 구경할 수 있는 눈물겹도록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귀하디귀한 곤밥이나 상할 때까지 방치되는 일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었지요.

    제주는 아열대성 기후와 맞물려 여름철이면 고온다습한 남서풍이 불어와 음식을 상하게 만드는 유해 미생물과 곰팡이가 번식하기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소금이라는 강력한 천연 보존제는 턱없이 부족하고, 날씨는 음식을 부패시키기 딱 좋은 최악의 환경 속에서 제주 사람들은 이 치명적인 생존의 결핍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자연계의 유익한 미생물을 통제하는 독보적인 ‘친환경 바이오 발효 과학’을 발전시켰습니다.

    2. 천연 유산균 음료 ‘쉰다리’: 유익균을 활용한 위대한 반전

    1) 쉰다리의 추억

    어렸을 때, 무더운 여름날 조부모님을 따라서 밭일을 거들다 보면, 땀을 흘리며 밭일을 하시다가 잠시 쉬시는 동안 시원한 잣담 그늘 아래 두었던 주전자에서 꺼내어 주시던 시큼하고 달콤한 음료가 있었습니다. 한 사발 들이키는 순간 머리끝까지 청량함이 번지던 그 음료, 바로 제주인들의 미생물 제어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통 발효 음료인 ‘쉰다리’입니다.

    만드는 방법이 너무나 간단했기에, 중⦁고등학생 시절에 부모님이 바쁘실 때에는 조금이나마 시간을 덜어드리려고 제가 만든 쉰다리를 온 가족이 함께 먹기도 했습니다.

    2) 쉰다리의 뜻과 정의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어원에 따르면, ‘쉰다리’는 명사이며, 제주 방언 ‘쉬다(상하다)’라는 뜻과 ‘다리다(데우다/삭히다)’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지역에 따라 ‘순다리’라고 부르기도 하며, 미미한 알코올 성분과 단맛이 돌아 ‘단술’이라 부르기도 하였지요.

    쉰다리란, 주로 여름철에 주식이었던 꽁보리밥이 약간 쉬기 시작할 때 버리지 않고, 물과 누룩을 섞어 하루 내지 이틀밤 동안 따뜻한 곳에서 발효시켜 만든 제주 고유의 저농도 전통 발효 음료입니다. 꼭 여름철이 아니더라도 밥이 상하려고 하면 쉰다리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과거 먹거리가 귀하던 시절, 제주의 평소 주식은 꽁보리밥이었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의 높은 습도는 보리밥을 한나절 만에 쉬어버리게(상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먹었을 때 자칫 탈이 날지 모르니 당연히 버려져야 할 터이지만, 제주의 선조들은 아까운 식량을 단 한 톨도 버릴 수 없었기에 위대한 바이오의 반전을 이뤄냅니다.

    3) 쉰다리 만드는 방법과 미생물학적 원리

    밥이 상하기 시작하면, 많이 상해서부패균이 본격적으로 번식하기 전에 가볍게 물에 행군 후에 작은 항아리에 집에 상비해 두던 전통 누룩을 잘게 쪼개어 밥과 누룩을 3:1 비율로 섞습니다. 밥 양의 1.5배~2.2배 정도의 미지근한 물을 부어 함께 섞은 후에 따뜻한 곳 구석에서 삭혀두었습니다.
    더운 여름철에는 하루 내지 이틀, 겨울철에는 5~6일 정도 발효를 시켰지요.

    발효가 끝나면 체로 걸러 마시거나 그냥 텁텁한 상태로 먹기도 했습니다. 취향에 따라 꿀·설탕·과일 등을 넣어 먹었으며, 너무 발효되지 않은 채 오래 보관하고 싶을 때에는 끓여서 발효를 멈추게 하였습니다.

    현대 미생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과정은 미생물 생태계의 원리를 매우 정교하게 이용하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발효가 시작되면 누룩 속에 잠들었던 유익균인 누룩곰팡이와 천연 효모들이 활성화되어 밥 속에서 폭발적으로 증식합니다. 이들이 부패균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공간과 영양분을 선점하는 우점종이 되는 것입니다.

    누룩의 아밀라아제 효소는 보리밥의 전분을 당분으로 분해하여 당도 10.6~13.3 브릭스(Brix)에 이르는 단맛을 만들어내고, 이후 증식한 유산균이 젖산을 생성해 냅니다. 이로 인해 항아리 내부의 환경은 강한 산성(pH 4 이하)으로 급격하게 변화하게 됩니다. 식중독을 일으키는 유해 균주나 병원성 박테리아들은 이러한 산성 환경에서 활동이 완벽하게 저해되거나 사멸합니다. 음식을 상하게 하는 부패의 경로를 차단하고, 몸에 이로운 발효의 상태로 변환시켜 가는 미생물학적 지혜입니다.

    4) 결핍의 승화

    이처럼 발효 과정을 거친 상하던 밥은 안전하면서도 새콤달콤한 풍미를 가진 천연 발효식품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고된 노동으로 지친 농부들과 해녀들에게 이 새콤한 단술은 최고의 천연 에너지 드링크였습니다. 발효 과정에서 축적된 풍부한 유기산과 비타민 B군이 체내 피로 물질을 중화하고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여 기력을 빠르게 회복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버려질 뻔한 쉰 보리밥을 미생물의 힘으로 살려내어 장 건강을 지켜주던 강장제이자 영양식으로 탈바꿈시킨 것으로써, 결핍을 승화시킨 위대한 지혜의 산물입니다.

    3. 빙떡: 메밀의 소리 없는 독성을 제어한 무의 효소학

    유년 시절, 마을의 명절이나 친척의 제사, 혹은 이웃의 큰 잔칫날이 되면 동네 어르신들이 마당에 모여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놓고 그 위에서 지글지글 메밀전병을 얇게 부쳐내던 풍경이 선명합니다. 글루텐이 없어 뚝뚝 끊어지는 메밀가루를 장인의 손길처럼 얇고 평평하게 펴내고, 그 속에 간을 한 무채를 가득 넣어 돌돌 말아주시던 ‘빙떡’의 추억은 제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고향의 향수일 것입니다.

    ‘빙떡’은 메밀전병입니다. 메밀가루 반죽을 둥글넓적하게 부쳐 무채 소를 넣고 둥글게 만 떡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며, 떡을 한자로 나타낼 때 사용하는 餠(병)의 변음인 ‘빙’에 ‘떡’을 더하여 만든 말입니다.평소에는 구경하기 힘든 귀한 별미이자 손님을 대접하던 정성스러운 음식이었습니다. 고기 한 점 들어가지 않고 소금과 참기름으로만 맛을 낸 그 심심하고 담백한 떡이 어린 제 입에도 참 달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속이 부대끼지 않고 편안했던 기억이 오랜 시간 신기하게 남아있었지요.

    그 신비로운 소화의 비결 속에는 우리 선조들이 구현해 낸 훌륭한 식재료의 조화로운 분해 과학이 깃들어 있습니다. 메밀은 지금으로부터 600∼700년 전 고려 말에 탐라가 100년 간 원(元)의 지배를 받을 때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제주는 화산재 토양의 특성상 생육 기간이 짧은 메밀을 널리 재배하여 쌀의 대체재로 썼습니다. 메마른 땅에도 잘 적응하고 병충해에도 잘 견디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제주도와 같은 척박한 땅에서도 쉽게 재배되었으며 제주인의 식량 확보에 큰 도움이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메밀은 식이섬유·단백질·루틴 등 영양소가 풍부하고 특히 혈관을 건강하게 하는 곡식이고, 칼륨·엽산·마그네슘·섬유질을 비롯해 8종의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하다고 합니다.

    어릴 때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기억납니다. 원래는 옛 중국에서 제주 남자들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서 독성이 있는 메밀의 씨앗을 전해 줬는데 오히려 제주 사람들이 먹고 더 힘을 내고 건강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때에는 우스개소리로 재미있게 지어낸 얘기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구전에 의할 만큼 꽤 설득력이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원 나라의 관리들이 메밀을 제주도에 줘서 재배하도록 한 것은 “독성이 있는 메밀을 제주 남자들이 먹도록 해 그 ‘씨’를 말리려는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메밀 껍질에 있는 독성이 그들에게는 무서운 존재였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메밀에는 제실(Benzylamine)이라는 미량의 살리실산 계열 독성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서, 과하게 섭취하면 장에 가스가 차거나 아랫배가 차가운 사람들은 극심한 소화 불량과 배탈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지만 제주인들은 지혜롭게도 사시사철 구할 수 있는 무와 함께 먹어서 독성을 중화시켰기에 오히려 최고의 건강식으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무에는 강력한 천연 전분 분해 효소인 디아스타아제(Diastase)를 비롯하여 단백질과 지방의 소화를 돕는 에스테라아제 등의 활성 효소들이 아낌없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빙떡을 한 입 베어 물고 씹는 순간, 메밀의 차가운 성질과 미세한 독성을 무채 속의 활성 효소들이 즉각적으로 결합하여 촉매 작용을 일으키며 분해하고 중화시켜 줍니다. 현대 영양학이 메밀과 무의 상극적 중화 원리를 밝혀내기 수백 년 전부터, 제주의 선조들은 삶의 직관을 통해 가장 완벽한 효소 분해 식단을 완성하여 정갈하게 누려왔던 것입니다.

    4. 상외떡: 막걸리와 쉰다리 효모가 빚어낸 제주 최초의 바이오 발효 빵

    제사나 명절이 다가오면 고향 집 부엌이나 마당은 떡을 찌는 김으로 가득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밀가루를 막걸리로 반죽하여 둥글고 커다랗게 쪄내던 ‘상외떡’은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간식이었습니다. 찜솥의 뚜껑이 열릴 때 퍼지던 은은한 술향과 폭신하면서도 쫄깃한 식감은 쌀이 귀해 쌀떡을 마음껏 먹지 못하던 제주 아이들에게는 요즘의 고급 브랜드 빵에 못지않았지요.

    ‘상외떡’은 밀가루를 막걸리로 발효시켜 만든 빵을 뜻하는 제주 고유의 향토 음식으로, 상에떡, 상애병이라고도 합니다.

    이 상외떡은 역사적으로 육지에서 ‘서리꽃처럼 뽀얗게 부풀어 올랐다’ 하여 ‘상화병(霜花餠)’이라 불렸던 유서 깊은 전통 발효 빵입니다.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시대에 원나라로부터 귀한 밀가루 발효 기술이 유입되던 시기까지 닿아 있지요. 당시 이 발효 빵을 파는 가게를 뜻하던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에 처음 이름을 드러낼 만큼 깊은 역사를 자랑하며, 조선 시대에 이르러 『수운잡방』이나 『음식디미방』 같은 옛날 요리책에 ‘밀가루를 좋은 막걸리로 반죽하여 따뜻한 곳에 두어 부풀기를 기다린 후 쪄낸다’는 상세한 제법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인공적인 이스트나 베이킹파우더 같은 부풀림제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 제주의 부엌에서 이 역할을 해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앞서 소개해 드린 천연 유산균 음료 ‘쉰다리’였습니다. 단단하고 건조한 누룩 가루를 밀가루 반죽에 바로 넣으면 효모가 깨어나 활동하기도 전에 반죽이 굳어버리거나 효모의 절대적인 밀도(양)가 부족하여 반죽이 쉽게 부풀지 못합니다.

    제주의 어머니들은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수분이 풍부하고 효모의 가장 좋은 먹이(포도당)가 풍부한 ‘쉰 보리밥’을 미생물 배양기로 활용했습니다. 즉, 쉰다리 원액을 천연 발효종(스타터)으로 삼아 밀가루에 붓고 치대었던 것입니다. 생막걸리와 쉰다리 속에 살아 숨 쉬는 천연 효모균은 반죽 속의 당질을 먹이 삼아 대사 활동을 하며 이산화탄소(CO2) 가스를 배출합니다. 이 가스가 밀가루의 글루텐 그물망 구조 내부를 촘촘한 공기 주머니로 가득 채운 뒤 가마솥의 뜨거운 열을 만나면, 거칠던 밀가루 덩어리가 스펀지처럼 폭신한 발효 빵으로 대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쉰다리 단계를 거치며 생성된 유산균과 젖산 성분은 밀가루의 풋내를 잡고 밀가루 반죽을 부드럽게 연화시켜 상외떡 특유의 포슬포슬하면서도 쫄깃한 식감을 완성해 줍니다. 무엇보다 pH 4 이하의 강한 산성 성분이 천연 방부제 역할을 수행하여, 반죽 자체에 방어막이 생기기 때문에 한여름 무더위 속에 며칠씩 두고 먹어도 상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천연 방부 발효 빵’이 되었습니다. 척박한 식재료의 한계를 미생물의 치밀한 2단계 배양 과학으로 극복해 낸 선조들의 위대한 생활 생물학이었습니다.

    이렇듯 제주의 선조들은 살아있는 액체 효모를 오래 보관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누룩’이라는 고체 기판 형태로 건조해 상시 보관하다가, 떡을 빚을 때마다 쉰다리를 통해 그 생명력을 깨워내곤 했습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미생물의 생리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알았던 제주 선조들의 경이로운 바이오 응용 기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6-1회 맺음말

    이처럼 쉰다리와 상외떡이 제주의 보리밥과 누룩, 그리고 천연 효모가 빚어낸 탄수화물 발효의 유산이라면, 겨울철 제주의 부엌을 채우던 또 다른 위대한 과학의 축은 바로 단백질의 보고인 ‘콩’이었습니다.

    어릴 적 저의 기억 속 겨울 부엌은 언제나 가마솥 가득 삶아지던 노란콩(백태)의 구수한 냄새로 따뜻하게 채워지곤 했습니다. 할머니께서 메주를 디디기 직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마솥에서 갓 건져내어 손바닥에 올려주셨던 뜨끈뜨끈한 노란 콩 한 움큼은 밤처럼 달콤하고 고구마보다 고소하여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유년의 가장 풍요로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시절에는 워낙 풍족하게 먹지 못하던 때라,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한 고농도의 콩을 갑자기 많이 먹으면 장이 놀라 설사를 하기도 했었기에 할머니께서는 늘 적당히 먹으라며 손사래를 치시곤 했습니다. 영양 결핍 시대가 낳은 웃지 못할 풍경이었지만, 그만큼 콩이 가진 영양의 밀도가 높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흔히 우리가 전통 장(醬)을 떠올릴 때 이처럼 노란콩을 당연한 원형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주의 검은 화산재 땅과 거친 바닷바람 속에는 이 익숙한 노란콩의 그늘에 가려져 우리가 미처 그 귀함을 다 알아보지 못했던, 숨겨진 진짜 천연 보물이 살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 슬로푸드 본부가 감탄하고, 대한민국 맛의 방주 제1호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미래 인류의 식단을 치유할 제주의 독보적인 토종 유산, 그 푸른 보물과 고초균이 부리는 경이로운 장수 과학에 대한 이야기는 <제6-2회> 제주의 단백질 영양학: 푸른콩장과 몸국 편 글에서 이어집니다.

    (제주 오리진, Jeju Origin)

    참고 자료 (References)

    * 제주어 고증: 『제주방언사전』, 국립국어원 및 제주특별자치도 국어심의회

    * 향토사료 고증: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제주문화대전』 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주 쉰다리 및 향토음식 제법)

    * 학술 논문 1: 김소연·박은진, 「당근을 첨가한 쉰다리의 발효 특성」, 『한국식품조리과학회지』, 2015.

    * 학술 논문 2: 조만재·강은옥·이해원, 「제주에서 시판되는 쉰다리의 품질특성 및 항산화 활성 연구」, 2025.

    * 언론 보도: 뉴시스(오미란 기자 외), 「제주 남자 씨 말리려 건넨 메밀, ‘빙떡’이 건강식 될 줄이야」, 로컬 기획 특집 기사 고증.

    * 농업사료 고증: 이성돈,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제주특별자치도농업기술원, 2021.

    * 민속학 고증: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상화병(霜花餠)의 기원과 전래 양식)

    * 국제 인증: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 『대한민국 맛의 방주(Ark of Taste) 100』

    * 미생물학 자문: 홍석일, 「유용 미생물의 대명사가 된 ‘바실러스(Bacillus)’」, 『농기자재신문』 학술 기고문.

  • <제5회> ‘제주 해녀’의 위대한 연대와 상생의 사회학

    (ai 이미지 생성)

    흔히 제주의 삼다(三多)를 말할 때 돌, 바람, 여자가 많다고 가볍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옛 선조들이 정의한 삼다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풍요가 아니라 철저한 ‘결핍’이었습니다. 농사지을 흙이 없을 정도로 지천에 널린 돌, 삶을 위협하는 바람, 그리고 바다에 남편과 아들을 빼앗겨 홀로 남은 여성들이 많다는 슬픈 뜻이었습니다.

    제주는 이 세 가지 결핍 중에서도 특히 ‘남성의 부재’라는 가장 아픈 결핍을, 섬을 이끌어가는 강력한 원동력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바로 유연한 뚝심으로 유네스코 유산이 된 ‘제주 해녀’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회에서는 신뢰의 메신저이자 소통의 철학이 담긴 ‘정낭과 삼무(三無) 정신’을 통해,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서로를 울타리 삼아 도둑과 대문 없이 살아온 제주 공동체의 위대한 사회학적 자치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서로에 대한 단단한 믿음이 있었기에 제주인들은 사방에서 들이치는 섬의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었지요.

    오늘 제주 오리진(Jeju Origin) 제5회에서는, 제주의 결핍이 어떻게 전 세계가 경탄하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제주 해녀’라는 위대한 유산으로 변모했는지, 그 숨겨진 통계와 인문학적 반전의 비결을 찾아 드립니다.

    지형과 기후가 주는 물리적 한계와 사회가 옭아매는 억압들을 유연한 소통 구조로 이겨낸 선조들의 지혜는, 대지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생존 방식을 가장 극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걸어 들어갈 이번 여정은, 제주를 상징하는 가장 오래된 단어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가슴 아픈 개념인 ‘여자가 많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삼다(三多)의 본질: 풍요가 아닌 가혹한 환경적 결핍의 서사

    우리는 흔히 관광지의 매력으로 삼다를 이야기하지만, 역사와 지질학의 렌즈로 들여다본 삼다는 인간의 생존을 끊임없이 위협하던 거대한 장벽이었습니다.

    (1) ‘돌이 많다는 것

    농사지을 기름진 흙이 넉넉지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2회차에서 다루었듯 다공성 현무암으로 가득한 땅은 물을 머금어 지하수를 키워내는 축복의 이면 속에, 지표면의 물을 너무 빠르게 통과시켜 버려 논농사를 지을 수 없게 만드는 농업적 결핍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빗물이 고이지 않고 지하로 스며드는 척박한 지표면 환경 탓에, 제주의 선조들은 벼농사 대신 거친 밭농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바람이 많다’는 것

    사시사철 몰아치는 칼바람과 태풍이 인간이 지은 집을 무너뜨리고 밭의 작물을 쓸어버리는 파괴적인 에너지가 되어 도처에 도사리고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제주에서 큰 바람에 의해 농작물이 피해를 입어 기근을 겪고 있기에 구휼을 청한다는 상소들이 수 없이 이어졌고, 심지어 조정에서는 굶어 죽은 자들이 많았기에 영혼들을 위해 제를 지내도록 하고 제문을 내리는 경우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한 예로, 정조실록(정조 20년 4월 3일, 1796년)의 기록에 의하면, 전라도 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탐라의 기근으로 곡식을 운반하고 나눠주는 문제에 대해 상소하였는데,

    “탐라(耽羅)에 몇 해 동안 계속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하게 되었으므로“,

    “다만 작년에 제주도의 호구가 다수 감소된 것은 오로지 요청한 곡물이 풍부하지 못하고 구제할 때 적당한 시기를 놓친 데에서 연유되었습니다.”라고 하여 제주의 식량이 넉넉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여자가 많다’는 것

    삼다(三多)의 하나인 ‘여자가 많다’는 것은 단순한 인구학적 통계가 아니라, 바다가 남성들을 삼켜버린 제주의 눈물겨운 결핍과 비극의 역사였습니다.

    조선시대 제주를 기록한 문헌들을 보면, 섬의 인구 중 여자의 비율이 남자를 압도했다는 기록들이 등장합니다. 이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제주의 남성들은 거친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태풍과 풍랑을 만나 표류하거나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게다가 자연재해가 심하여 농사를 망치기 일쑤인지라 기근을 견디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사리사욕을 채우는 관리들이 전복 등 해산물을 조정에 진상한다는 명목으로 필요 이상 가혹한 수준의 공물을 요구하며 끝없는 수탈을 자행했습니다.

    남자들은 공물의 할당량을 채우려면 위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장시간 잠수를 해야 하였기에, 과로와 병으로 쓰러지고 바다에서 숨지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결국은 살아남은 남성들마저 견디다 못해 섬 밖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섬을 탈출하여 타지에서 작은 어선에 의지하여 해산물을 채취하며 유랑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삼다(三多)의 통계적 수치는 결코 다정한 낭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수치가 문헌에 등장하는 350년 전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뒤에는 화산섬의 거친 환경과 가혹한 봉건 제도가 낳은 서글픈 비극이 숨어 있습니다.

    고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제주에서 전복을 따는 것은 여자인 ‘해녀’가 아니라 ‘포작인(鮑作人)’ 혹은 ‘포작간’이라 불린 남성들이었습니다.

    당시 왕실에 바칠 전복을 채취하던 제주의 남성들(포작인)은 무리한 심해 잠수와 거친 풍랑 속에서 수없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게다가 가혹한 공물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남성들이 목숨을 걸고 대거 섬을 탈출(밀항)하면서, 조선 정부가 200년간 ‘출륙금지령’을 내려야 했을 정도로 섬 안의 남성 인구는 극도로 황폐화되었습니다.

    결국 자연적 재해와 사회적 제도 속에서 사라진 남성들의 빈자리를 채우고, 섬의 경제와 공동체를 온전히 지탱해야 했던 것은 고스란히 제주 여인들의 몫이었습니다. 삼다의 ‘여다(女多)’는 낭만이 아니라, 남겨진 여인들이 대지와 바다를 짊어져야 했던 거대한 책임과 뚝심의 역사적 증거인 셈입니다.

    (4) 소결

    결국 ‘삼다’는 자연이 준 축복이 아니라, 사방이 막힌 화산섬에서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환경적 결핍의 총체였습니다. 그러나 제주인들은 이 세 가지 결핍 앞에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돌이 많으면 돌담을 쌓아 바람을 흘려보냈고(3회차 ‘제주 돌담의 물리학’), 남성 노동력이 부족해진 자리는 제주의 여인들이 스스로 대지와 바다를 책임지는 강인한 생산의 주체로 우뚝 서며 섬의 경제를 지탱하는 뚝심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결핍이 거대할수록, 그것을 돌파해 내는 제주인들의 정신적 역량 또한 더욱 단단해졌던 것입니다.

    2. 기록으로 보는 남자의 부족과 여자의 무거운 짐

    (1) 사례 1

    『남환박물(南宦博物)』은 숙종 30년(1704)에 이형상(李衡祥)이 제주 목사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저술한 제주도 지방지입니다. 이를 번역하여 집필한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장수하는 노인이 많고 여성들이 생계를 책임진 제주:

    제주도는 육지와 달리 풍토가 특수했기 때문에 관습과 풍속이 매우 독특하였다고 한다. (중략)

    제주도에는 오래전부터 질병이 적어서 일찍 죽는 사람이 없고 8~90세까지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600년대 전염병이 돌아서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는데도 불구하고 노인잔치를 열면 80세가 넘는 수백 명의 노인이 방문했다. 그들은 모두 건강하고 기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매년 배가 침몰하여 죽는 사람은 매우 많았다. 보통 남자들이 배를 타고 나가 일을 하므로 남자가 귀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귀하다 보니 여자들이 지는 부역은 매우 무거웠다. 관아에 바치는 미역과 전복들은 모두 여성들이 구해서 바쳤다. 보통의 살림집에서도 샘에서 물을 길어오는 일이라든지 곡식을 거두는 일, 땔감을 구하는 일 등 모든 힘든 일은 여인이 담당했다.

    제주도의 토질이 척박해서 백성들은 가난한 삶을 살았다.

    위와 같이 제주인들은 원래 강건한 체질로 장수하였지만, 거친 바다의 풍랑으로 많은 생명을 빼앗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사례 2

    (『제주여성사료집』을 인용한 <제주의소리> 기사 재인용)

    『수록 내용중 조선 숙종대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이형상이 훗날 편찬한 ‘남환박물’ 한 구절을 살펴보면 외지인이 바라본 제주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한 것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당시 이형상은 이렇게 묘사했다. 남아를 낳으면 ‘고래밥’이라 말하고 여아를 낳으면 기뻐한다.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다. (매년 패가 패몰하여 죽는 자가 심히 많은 까닭에 남자가 귀하고 여자가 천한 것이다. 아주 잔약한 자 또한 2~3인의 처를 가지게 되고, 혹은 10여인의 처를 둔 사람도 있다. 남아를 낳으면 즉 고래밥이라 말하고 심히 애중하지 않는다. 오직 여아를 낳은 연후에야 기뻐 말하기를 이는 우리를 봉양할 것이라 하니, 정상(情狀) 또한 측은하다)

    이형상이 바라본 제주남성은 ‘고래밥’이라고 제주사람 스스로 말할 만큼 바닷일을 하다 물에 빠져 죽는 희생자로서 그 또한 측은한 삶이었음을 지적하고 있지만, 오직 여아를 낳은 후에야 기뻐했다는 말 속에는 제주여성들의 탄생이 진정한 기쁨이 아닌 남성가장이 없는 가정을 평생 꾸려나가야 할 그 무거운 짐을 안타까이 여기고 있음도 엿보인다.』

    3. 제주와 외부간 단절의 역사: 출륙금지령

    제주인들이 조정에 내는 공물에 대한 압박을 알 수 있는 예를 보겠습니다.

    영조실록 127권, 영조 대왕 행장(行狀)을 보면,

    『동10월(冬十月)에 제주(濟州)에서 지실(枳實)을 바쳤는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듣건대, 관에서 탱자나무를 세어 백성에게 그 열매를 내라고 요구하므로 백성이 혹 나무를 흔들어 절로 말라 죽게 한다 하니, 어찌 딱하지 않은가? 제주로 돌려보내고 다시는 바치지 말게 하라.’하셨다.』

    (『국어사전』, 지실(枳實): <명사>, <한의>, 덜 익은 탱자를 썰어 말린 약재. 성질은 약간 차고, 가래를 없애며 배뇨 작용과 적취(積聚)를 다스리는 데 쓴다.)

    전복과 기타 해산물 및 약재 등 지나친 공물을 바치기에 버겁고, 중앙 관리와 지방 토호의 이중 수탈, 왜구의 빈번한 침입, 부역의 증대 등을 견디다 못해 제주를 탈출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타 지역에 유민의 수가 증가하고 제주 인구는 감소하였습니다.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제주는 지정학적으로는 일본과 중국을 잇는 거점 지역으로써 방위 전략상 중요하였고, 경제적으로는 명과의 말 무역에 있어서 말의 생산지이자 제주 지역 특산물 또한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제주 인구의 감소는 특산물의 진상, 군액의 축소 등으로 재정의 감축 우려가 심각한 과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제주 인구의 감소를 막기 위해서 특단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제주도민이 육지로 나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정책인 「출륙금지령」을 내린 것입니다.

    제주도민의 출륙을 막기 위해 선박 출입을 엄격히 조사한 후 ‘도항 증명서’를 발급하거나 불법적으로 출륙한 포작인들을 잡아 쇄환시키는 등의 강력하고도 적극적인 통제책을 펼쳤습니다.

    심지어 국법으로 제주도 여성은 육지인과의 혼인을 금하도록 정하였고, 제주도에서는 어선 건조마저 금지하였습니다.

    이 정책은 1629년(인조 7년)부터 순조 23년(1823)까지 약 20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강경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말엽 제주도의 인구수는 반으로 급격히 줄어 들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여러 곳에서, 당시의 제주인이 만든 어선은 비록 작았으나 워낙 빨라서, 유랑 지역의 관아에서 불법 출륙한 포작인들을 나포하여 돌려보내려고 시도를 할 때마다 번번히 실패하여 뾰죽한 대책이 없었을 정도로 제주의 어선 건조 기술과 항해 기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출륙금지령으로 인해 이전의 기술이 단절되었습니다. 반면에 외부와 고립된 생활을 하였기에 공동체 의식이 강화되고 제주 언어의 고유성과 민간신앙 및 제주 풍속이 보존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4. 통계로 본 제주의 인구 성비

    (1) 제주도 인구 및 성비 추이

    (2) 통계의 분석

    ① 현종실록(현종 13년)의 기록에 의하면, 대체로 호적에 들지 않은 여자가 매우 많은데, 호적에 있는 숫자만 기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남초 현상은 여자의 기록 누락이 원인으로 보입니다.

    이를 감안하여, 당시의 전국 성비를 100이라고 가정하여 환산한다면 제주 성비는 62.79에 해당됩니다. 이처럼 실제 제주의 성비는 매우 극심했었다고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사록에서도 제주에 남자가 극도로 부족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② 조선시대에는 제주가 전라도에 편입되어 있었고, 이후 전라남도에 속해 있다가 1946년도에 제주도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었습니다.

    이 때문인지 통계청의 인구조사에서도, 제주도를 1940년부터 행정구역을 구분하였기에 이때부터 성비 파악이 가능하였습니다.

    이 자료에 의하면 현대사가 시작된 이후에도 여전히 여성이 많았으며, 점차 성비 격차가 줄어들다가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불균형이 많이 해소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맨몸과 숨통의 과학: 사선(死線)의 바다를 개척한 해녀의 생체역학

    (ai 이미지 생성)

    삼다의 결핍 속에서 피어난 제주 정신의 정점이자, 바다라는 거친 영토를 개척한 주인공이 바로 ‘해녀’입니다. 제주 해녀의 물질은 기계 장치에 의존하는 현대의 스쿠버 다이빙과 달리, 오직 자신의 폐에 담긴 한 모금의 공기(숨)에만 의존하여 수심 10미터에 이르는 연안의 수중으로 하강하는 극단의 원시적 어로 활동입니다. 여기에는 공기통 하나 없이 맨몸으로 수압을 이겨내는 해녀들만의 경이로운 인체 생리적 적응의 과학이 숨겨져 있습니다.

    수심이 깊어질수록 수압은 10미터마다 1기압씩 증가합니다. 따라서 해녀들이 바닷속으로 하강할 때, 수심 10미터만 내려가도 지상의 두 배에 달하는 기압(2기압)이 신체를 누릅니다. 해녀의 신체는 이 거대한 외압으로 인해 혈액 내 질소 농도가 급격히 치솟고 폐가 극도로 압착되는 거대한 물리적 압박을 받습니다.

    이때, 내부 압력과 외부 수압의 불균형으로 인한 ‘압력 손상(Barotrauma)’의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결과로 체온 저하, 질소 마취 및 감압병 위험 증가 등의 급격한 생리적·물리적 변화를 겪게 됩니다

    ‘상군’ 해녀들은 수심 20m까지 내려가서 물질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 세월 바다를 누벼온 베테랑 ‘상군(上軍)’ 해녀들이라 할지라도, 수심 10m를 넘어서 물질을 지속하는 것은 신체적으로 엄청난 과부하를 동반하는 버거운 일입니다.

    소수의 최고 기량 해녀들이 맨몸으로 가닿는 수심 15m까지의 잠수도 때로는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하는 극한의 작업입니다. 이 깊이에서는 무려 지상의 2.5배에 달하는 거대한 외압(2.5기압)이 자칫 사선을 넘나들 수 있는 상태를 유발합니다. 또한 장비 없이 물질하는 해녀들로서는 그 깊이까지 숨을 참고 들어가고 나오는 시간을 감안하면 더욱 극한적인 작업입니다.

    이렇듯 과학적으로 살펴보면, 우리는 해녀들이 단순히 숨을 참는 고통을 넘어 귀가 찢어지고 폐가 찌그러지는 물리적 압박을 견디며 물질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반복적 물질 과정에서 체내 조직에 과도하게 용해된 질소는 해녀들이 평생을 안고 살아가는 지독한 ‘잠수병(두통과 관절통)’을 유발하며, 이를 훈장처럼 달고 살게 됩니다.

    과거 과학적 잠수 장비나 고무 잠수복이 없던 시절, 제주의 해녀들은 오직 광목으로 만든 얇은 ‘물소중이’ 한 장만 걸친 채 겨울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따뜻한 난류 덕분에 겨울철 제주의 수온은 13℃ 안팎을 유지했지만, 진짜 지옥은 물 밖에 있었습니다. 물속에서 나오자마자 해녀들의 살을 에는 듯 몰아치는 제주의 매서운 겨울 칼바람은 체감 온도를 순식간에 영하권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체온을 보호해 줄 현대식 고무 잠수복도 없던 시절에는, 물 안팎의 극심한 온도 차이 속에서 사지가 마비되는 저체온증의 공포를 맨몸으로 버텨내야 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저체온증의 위협 속에서, 해녀들의 신체는 심장박동수를 느리게 조절하고, 사지로 가는 혈류를 차단하여 뇌와 심장 등 핵심 장기로 산소를 집중시키며, 수심이 깊어질 때 폐가 손상되지 않도록 모세혈관의 혈액을 흉강으로 보내어 압력을 견디게 하는 고도의 ‘잠수 반사(Diving Reflex)’ 메커니즘을 스스로 진화시켰습니다. 수십 년 동안 거친 바다를 드나들며 단련된 해녀들의 폐활량과 심혈관계의 적응력은, 가혹한 환경이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인류학적 증거입니다.

    6. 해녀의 역사

    (1) 고대와 중세의 자취

    많은 남성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고 조정 관리들의 수탈을 피해 도망을 가서 그 수가 줄어들자, 홀로 남겨진 채 가정을 지켜야 했던 것은 결국 제주의 여성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주 여성들은 슬퍼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남겨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스스로 거친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결핍을 위대한 유산으로 바꾼 ‘제주 해녀’ 역사의 시작입니다.

    제주의 선조들은 매번 절망 대신 경이로운 반전을 선택했습니다. 남성의 비운 자리를 채우기 위해 맨몸으로 차가운 심해에 뛰어들었던 여인들, 오직 자신의 ‘숨의 길이’만큼만 수확하며 바다를 지켜낸 상생의 과학이 바로 그것입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제주 해녀의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문자왕과 관련된 문헌에 해녀가 등장하고 고려 숙종 때인 1105년에는 ‘해녀들의 나체 조업을 금한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조선 인조 때는 제주목사가 ‘남녀가 어울려 바다에서 조업하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도 있다고 하니, 오래전부터 해녀와 해남이 함께 조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해남은 포작인(鮑作人), 포작간(鮑作干) 등으로 불렸습니다. 제주도는 고려 때부터 전복과 미역을 왕실에 공물로 받쳤는데, 미역은 주로 해녀들이 땄고 전복은 포작인들이 담당하였습니다. 공물로 바쳐야 하는 전복의 할당량이 꾸준히 늘어나자 견디지 못하고 뭍으로 도망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해남들이 하던 역할을 점차 해녀들이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2) 제주 해녀들의 대외 진출의 시작

    제주도의 「출륙금지령」이 풀린 이후부터 제주도 사람들은 뭍으로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 해녀들도 육지부로 돈벌이를 위한 출가(出嫁)를 시작하였습니다. 경상도 일대를 시작으로, 강원도, 청진까지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였고, 이후 남해안, 서해안 및 도서 지역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해안 전체에서 물질을 하였습니다. 이후 해녀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각지와 블라디보스토크, 요동반도의 다롄, 산둥성의 칭다오까지 진출하였습니다.

    돈벌이를 위해 뭍으로 진출한 제주 해녀가 이토록 각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게 된 큰 이유는 현지 해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물질 수행 능력 덕분이었습니다.

    (3) 대외 진출 규모와 현실적 문제

    제주 해녀들은 각 지역에서 많은 인원들이 정착하여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해녀의 수는 정확한 숫자는 파악이 어려우나, 대략 약 9,000여 명에서 10,000명 내외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착한 해녀들의 평균 연령이 70~80대인 경우가 많은 고령화로 인해 매년 감소 추세이며, 일부 지역은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제주도내 지역에도 같습니다.

    7. 제주 해녀들의 뚝심의 자산 (해녀 문화의 유네스코 등재)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 문화’는 산소공급 장치 없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문화와, 공동체의 연대를 강화하며 해녀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잠수굿, 물질을 나가는 배 위에서 부르는 해녀노래, 모녀 및 세대 간에 전승되는 여성의 역할 등 입니다.

    ‘제주 해녀 문화’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이런 문화가 지역의 독특한 정체성을 상징하고, 자연친화적인 방법으로 지속가능한 환경을 유지하며 관련지식과 기술이 공동체를 통하여 전승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중에 특히 눈여겨 볼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전 세계 유일의 무장구(無裝具) 잠수 공동체

    인위적인 호흡 장치 없이 맨몸으로 물질을 하는 여성 잠수공동체는 지구상에서 제주 해녀와 일본의 일부 지역에만 존재하는 독보적인 문화적 희소성을 기록합니다.

    일본은 해녀를 ‘아마(海女, あま)’라 부르며, 일본에는 18개 현에 2000여 명의 해녀가 있다고 합니다.

    제주와 일본 해녀는 장비와 복장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제주는 테왁, 일본은 둥근 나무통인 이소오케(磯桶)라는 부력 유지 기구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물질 방법은 서로 다릅니다.

    제주 해녀는 자신의 몸을 밧줄로 묶지 않고 자유롭게 잠수해 10~20m를 들어가는 등 누구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 않습니다.

    반면 일본 해녀는 두 가지 유형의 작업을 합니다.

    하나는 ‘후나도’(舟人·뱃물질)라고 하며, 부부가 배를 타고 나가서 작업을 하는데 해녀가 해산물을 채취하면 남자는 해녀 허리에 연결된 생명줄을 끌어당기며 남녀가 공동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유형은 ‘가치도’(徒人·갓물질)라고 하며, 해녀 홀로 작업하는 방식으로 부표에 7~8m의 밧줄을 허리에 연결해 부표와 멀리 떨어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제주 해녀들의 뚝심 중 하나는 지금도 차가운 겨울 파도를 뚫고 바다에 거침없이 뛰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물소중이’라 불리는 면 소재의 옷만 입고 물질했지만, 현재는 육지부와 제주도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해녀가 ‘고무 잠수복(고무 슈트, suit)’을 활용합니다.

    고무 잠수복은 단순히 옷이 아니라 부력과 체온 유지를 도와주는 생존 필수품입니다. 면옷을 입던 시절에는 겨울철 수온 때문에 물질 시간이 30분~1시간에 불과했지만, 고무 잠수복을 입으면서 3시간~5시간 이상 작업이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산소 공급 장치를 활용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제주 해녀의 정체성은 ‘맨몸 잠수(숨비질)’에 있습니다. 육지부에서 활동하는 제주 출신 해녀들 역시 산소통(SCUBA 장비)을 메고 물질하는 ‘머구리(잠수부)’와는 엄격히 구분됩니다.

    즉, 현대적 장비인 고무 잠수복을 입고 오리발을 착용하지만, 공기통은 절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폐활량으로만 숨을 참고 물질하는 방식을 100년 전 그날과 똑같이 고수합니다.

    이는 단순한 생존의 방식을 넘어, 자연을 지배하지 않고 오직 인간의 호흡만큼만 수확한다는 제주 해녀만의 철학이 전국에 이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척박한 땅에서 시작된 이 ‘숨비소리의 연대’는 이제 대한민국 해안 문화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해녀들은 물속으로 들어갈 때 가슴을 짓누르는 그 극한 속에서 숨을 참으며 바다가 숨겨둔 전복과 소라를 채취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물 위로 솟구치며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을 때, 제주 바다 전역에는 “호오이, 호오이” 하는 휘파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이것이 바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해녀들의 위대한 숨 고르기, ‘숨비소리’입니다. 이것은 급격한 산소 고갈로 인해 뇌의 의식이 끊어져서 익사할 위험을 막기 위해, 체내의 이산화탄소를 순간적으로 터뜨리듯 배출하고 산소를 흡수하는 생존의 호흡법입니다.

    (2) 연대와 상생(相生)의 바다 공동체 규약

    해녀 문화가 현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따뜻한 인문학적 울림은 물질이라는 거친 노동 이면에 흐르는 ‘연대와 상생의 자치 구조’에 있습니다. 바다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험한 공간이기에,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제주의 해녀들은 바다 위에 자신들만의 가장 공평하고 민주적인 공동체 사회를 구축했습니다.

    해녀 공동체는 기량에 따라 상군(上軍), 중군(中軍), 하군(下軍)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지만, 이 계급은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아닙니다. 기량이 뛰어난 상군 해녀들은 거친 조류가 흐르는 위험한 먼바다, 즉 ‘외여’까지 나가 작업합니다. 한편 하군 해녀들의 안전을 살피고, 물질 능력이 떨어지거나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한 노령 해녀(할망해녀)들을 위해서는 파도가 잔잔하고 수심이 얕은 연안의 바다인 ‘할망바당’을 별도로 지정해 양보했습니다. 이 구역은 상군과 중군 해녀들은 절대 침범하지 않는 공동체의 성역이었으며, 약자도 소외당하지 않고 평생 자신의 업을 이어가며 자립할 수 있도록 배려한 최고의 사회적 안전망이었습니다.

    또한, 물질을 마치고 물 위로 올라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해녀들의 서글프고도 아름다운 휘파람 소리인 ‘숨비소리’. 그 소리 역시 척박한 바다 깊은 곳에서 사투를 벌이고 살아 돌아왔음을 동료들에게 알리는 생명의 신호이자, “내가 여기 있으니 안심하고 물질하라.”는 서로를 향한 가장 따뜻한 연대의 메세지였던 것입니다.

    (3) ‘지속 가능한 생태적 공존의 지혜

    유네스코(UNESCO)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자연과의 상생을 실천하는 지속 가능한 어업 방식과 독창적인 공동체 문화입니다.

    해녀 공동체는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바다를 황폐화하지 않으며, 전복과 소라의 산란기에는 물질을 전면 금지하고 크기가 일정 센티미터 이하인 어린 개체는 채취하지 않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철저한 ‘자율적 자원 관리 규칙’을 수백 년간 유지해 왔습니다.

    이는 생태계 파괴에 직면한 현대 인류에게 환경과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 가장 명확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8. 내 고향 바닷가의 추억

    제가 자란 고향은 제주 서북부의 해안가에 위치한 애월읍 신엄리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10~20여명의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모습이나, 물질을 마친 후에 태왁을 짊어지고 줄줄이 이동하는 모습을 자주 봤습니다.

    마을 앞바다에서 헤엄을 치거나 낚시를 하다 보면, 바로 근처에서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해녀들이 물질할 때에 가끔씩 크기가 성인의 1.5배 정도 되어 보이는 덩치 큰 물고기 무리가 해녀들 근처까지 아주 가까운 바닷가로 다가오곤 했습니다.

    이들은 해녀들의 바로 곁을 검정색에 가까운 진회색의 매끄러운 몸통을 부드럽게 구부리며, 물 위로 파도치듯 물결형을 그리며 유유히 유영했습니다. 마을 해녀들은 이들을 ‘곰수기’라 하였고, 이들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 존재임을 알고 태연하게 물질에 집중했으며, 곰수기들도 거친 바다 위에서 마치 해녀들과 깊은 유대감을 나누는 듯 공존의 풍경을 완성해 주었습니다.

    이 곰수기들은 알고 보니 연안의 터줏대감인 남방큰돌고래 무리라고 합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곰수기라 불렀지만, 제주에서는 지역에 따라 돌고래를 방언으로 ‘곰새기’, ‘수애기’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9. 해녀 문화 단절의 우려

    올해 91세이신 작은할머니께서는 작년까지도 물질을 하셨습니다. 물속에서는 자유롭지만 땅에 올라오면 고령으로 힘에 부쳐했습니다. 작은할아버지께서는 물질을 마칠 시간에 맞춰서 스쿠터를 몰고 가서 채취한 해산물을 가지고 두 분이 함께 귀가하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마을에서 고령이라 위험하니 더 이상 물질을 않도록 권고를 하였기에, 여전히 물질을 하고픈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공동체에 피해를 줄까 우려하여 접었습니다.
    물질을 접기 전에도, 마을에 남아 있던 해녀 두 분 중에 한 분이 그만두어야 할 상황이 다가오자, 80세 전후인 해녀 한 분만 남게 될 터라 외로움을 걱정하던 차에, 마침 타 지역에서 온 젊은 여성 두 분이 물질을 희망하여 신입 해녀로 들어오면서 벗을 삼게 되었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다행입니다. 아마 제 고향 마을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도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며칠 전 유튜브를 보던 중에 외국인 여성이 해녀로 지원하여 활동 중인 모습을 보면서, 해녀 문화가 해외로 더 널리 알려지고 계승자가 늘어나는 계기가 될 듯싶어 반갑고 희망도 느꼈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지원자가 들어와서 전통을 계승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0. 글을 마치며: 당신의 내면에 ‘숨비소리’의 연대를 채울 시간

    1회차의 온기부터 오늘 5회차의 삼다와 해녀의 정신까지, 제주 오리진(Jeju Origin)의 여정은 척박함을 축복으로 전환해 온 거대한 반전의 에너지를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과거 육지의 잣대로 바라보았을 때 제주의 삼다는 결핍과 버려진 변방의 상징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주의 여인들은 그 결핍의 대지를 뚝심과 상생의 연대로 채워 넣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지속 가능한 해양 문명을 완성해 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적 결핍에 가로막히거나, 나를 흔드는 가혹한 시련의 바람 속에서 외롭게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절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제주의 해녀들은 우리에게 묵묵히 위로를 건넵니다. 내가 가진 삶의 숨의 길이(한계)를 인정하고, 바다가 주는 만큼만 욕심내지 않고 수용하며, 혼자가 아니라 곁에 있는 이웃과 숨비소리를 나누며 연대할 때 그 어떤 거친 파도도 이겨낼 수 있다고 말이죠.

    오늘 하루, 거친 세상의 파도 속에서 홀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힘겨워하고 있다면, 차가운 바다 속을 뚝심 하나로 들고 나와 숨비소리를 터뜨리던 제주의 해녀들을 가만히 가슴에 품어보면 어떨까요? 나를 가로막는 결핍 앞에서도 결코 나를 잃지 않고, 내 안의 가장 단단한 오리지널(Origin) 뚝심을 깨워 주변과 따뜻한 연대의 온기를 나누는 유연하고도 멋진 ‘맨도롱한’ 하루를 보내시는 것은 어떨지요?

    다음 글은 제주의 맛과 영양이 응축된 로컬 테크놀로지, 척박한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선조들이 미생물과 소통하며 만들어낸 위대한 <제주 전통 발효 음식의 바이오 과학> 속으로 들어가 제주의 색다른 반전 지혜를 이어가겠습니다.

    제주 오리진(Jeju Origin)

    참고 자료:

    * 국가기록원, 해녀의 역사,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제주 사료 참조)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학연구센터 『제주해녀문화 대백과사전』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학연구센터 『조선후기 제주지역 포작의 존재양태』, 김나영

    * 디지털제주문화대전, 출륙금지령
    * 제주해녀문화 대백과사전, 출륙금지령

    * 보물 제652호 이형상 수고본 『남환박물지』 국문 해제 (박상리·전현미)
    * 제주의 소리, <제주역사 속 여성들의 삶은 어땠을까?>
    (제주특별자치도 여성능력개발본부 『제주여성사료집』 오경생, 재인용)

    * 제주 부사 이형상이 쓴 제주도 박물지, 남환박물, 한경아

    * 일본 해녀 ‘아마(海女)’의 잠수문화, 제주신보
    * 참쉬운 의학용어사전, 압력손상(Barotrauma)

  • <제4회> 닫혀 있으나 신뢰로 열리는 문, 제주의 지혜 ‘정낭’

    (ai 이미지 생성)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를 전하는 ‘제주 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지난 3회에서는 거친 태풍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바람과 상생하는 <제주 돌담의 물리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바람의 길을 막지 않고 통과시키는 돌담의 유연함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제주 사람들의 삶 그 자체였지요.

    그 부드러운 곡선의 돌담은 각자의 집 앞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오늘은 그 돌담이 끝나는 곳, 마을 길에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의 집 입구에서 마주하게 되는 독특한 문화유산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제주의 전통 대문인 ‘정낭’, 그리고 대문으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제주의 진짜 ‘올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 조부모님 댁 입구에 들어설 때면, 거칠고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 사이에 정겹게 걸쳐놓은 길다란 나무 장대를 늘 보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시절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던 정낭에는 단순히 집 안과 밖을 구별하는 것 이상의 놀라운 과학과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위대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1. ‘올레’의 원래 의미와 현재 알려진 ‘올레길’의 차이

    ‘정낭’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정낭과 처음 마주치는 공간인 ‘올레’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흔히 ‘올레길 걷기’ 열풍으로 널리 알려져 사용 중인 ‘올레길’의 의미는 제주 전통의 ‘올레’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1) 전통적 의미의 올레

    ‘올레’는 ‘큰길이나 마을 길에서 집 마당까지 이어지는 돌담으로 둘러쌓인 좁은 골목길’을 뜻합니다.

    제주 초가집은 거센 바람을 막기 위해 큰길에서 마당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돌담을 디귿(⊏)자나 곡선 형태로 길게 쌓아 입구를 만들었는데, 이 공간을 ‘올레’라고 불렀습니다.

    2) 올레의 과학

    이 올레에는 제주 선조들의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올레는 넓고 크게 만들기보다 일부러 좁게 하거나 구부러지는 형태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면이 바다인 제주의 강한 바람이 큰길에서 집안으로 곧장 불어닥칠 때, 좁고 굽어진 돌담 골목인 올레를 통과하면서 바람의 속도가 줄어듭니다. 즉, 거센 바람이나 태풍으로부터 안마당과 초가집을 보호하는 ‘천연 바람 완충 지대’였던 셈입니다. 이 올레가 끝나는 지점, 즉 집 마당의 진짜 입구에서 우리는 제주의 대문인 ‘정낭’을 마주하게 됩니다.

    3) 의미가 확장된 요즘의 ‘올레길’

    지금 우리가 흔히 걷는 도보 여행 코스인 ‘제주 올레길’은 옛날부터 내려온 지명이 아니라, 2007년 (사)제주올레에서 제주도의 아름다운 도보 여행 코스를 개발하면서 붙인 ‘현대적인 브랜드 이름’입니다.

    “제주의 집 앞 골목을 뜻하는 ‘올레’처럼, 여행자들이 도보 여행을 통해 제주의 깊숙한 속살과 문화를 조용히 만나고 가라”는 의미를 담아 트레킹 코스를 ‘올레길’이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이 브랜드가 전 국민적으로 엄청난 히트를 치다 보니, 어느새 전국적으로 ‘길게 걷는 산책로나 등산로’ 전체를 뜻하는 대명사처럼 쓰이게 된 것입니다. 제주올레라는 말에는 ‘제주에 올래?’라는 초대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합니다.

    4) 아쉬움과 새로운 희망

    제주 토박이로서 전통적 의미의 올레가 사라져 가고 잊혀져 가는 현실에 아쉬움이 짙게 남습니다. 하지만 순기능이 크게 있기에 아쉬운 한 켠을 메꿀 수 있어서 다행으로 여깁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현재 제주의 올레길 정비, 해안 청소, 올래길과 접한 마을 주민들과의 상생을 위한 아이템 개발 등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들은 제주 관광의 주요 문화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제주올레가 제주를 넘어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제주 올레를 해외로 확장해 나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2. 정낭과 정주석, 바람의 섬이 만들어낸 과학적 구조와 아날로그 신호

    육지의 전통 가옥을 보면 나무로 짠 튼튼하고 빽빽한 대문이 집안을 꽉 막고 있지만, 제주의 시골집 입구에는 사방이 막힌 대문이 없었습니다. 대신 집 입구 양쪽에 구멍이 세 개씩 뚫린 커다란 돌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긴 나무 장대를 가로로 걸쳐두었습니다.

    이때 구멍 뚫린 돌기둥이나 나무기둥을 ‘정주석’ 또는 ‘정주목’이라 부르고, 그 사이의 나무 장대를 ‘정낭’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주목 없이 돌담 자체를 지지대 삼아 정낭을 얹거나 구멍에 끼워 사용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1) 정낭의 역할

    정낭’은 제주 전통가옥의 정식 대문입니다.

    단순히 기다란 장대 하나에 불과하지만, 정낭은 실제적인 대문과 울타리 역할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과거 중산간 지역에서는 소나 말을 방목하여 키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을길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가축들이 집 마당 안으로 불쑥 들어와 텃밭의 농작물을 망치거나 초가집을 훼손하는 것을 이 정낭이 완벽하게 차단해 주었습니다.

    2) 제주에 대문이 없었던 이유

    제주에는 왜 육지처럼 번듯한 대문이 없었을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제주의 거센 ‘바람’ 때문입니다. 사방이 꽉 막힌 대문은 사철 몰아치는 제주의 강한 태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문짝이 뜯겨 나가거나 돌담까지 무너뜨리기 십상입니다. 제주 사람들은 돌담을 쌓을 때처럼, 대문을 만들 때에도 자연과 싸우기보다 순응하는 법을 택했습니다. 나무 장대 몇 개로 이루어진 정낭은 바람이 아무리 세게 불어도 그 사이로 바람을 유유히 흘려보내기에 태풍에도 끄떡없는 가장 완벽한 대문인 셈입니다.

    3. 숫자와 위치로 소통하는 아날로그 메신저

    정낭이 가진 가장 흥미롭고 아름다운 점은 바로 이 나무 장대의 개수와 위치를 통해 이웃과 소통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스마트폰의 프로필 상태창이나 메신저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알리듯, 옛 제주 사람들은 정낭의 개수로 집주인의 현재 상황을 이웃들에게 실시간으로 전했습니다.

    1)정낭이 모두 내려져 있는 경우 (0개)

    집 안에 사람이 있으니 누구든 편하게 들어오라는 환대의 표시입니다.

    2) 정낭이 1개 걸려 있는 경우

    “집주인이 지금 아주 가까운 이웃집에 잠시 마실을 갔거나, 동네 거까이서 볼 일 보러 갔으니 곧 돌아옵니다.”라는 뜻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주인을 만날 수 있다는 다정한 안내문인 것이죠.

    3) 정낭이 2개 걸려 있는 경우

    “지금 집에서 조금 떨어진 밭에 일을 하러 나갔거나 멀리 나무를 하러 가서, 오후 늦게나 저녁때가 되어야 돌아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다음에 다시 찾아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4) 정낭이 3개 걸려 있는 경우

    “지금 먼 곳에 있는 다른 마을에 가거나, 며칠 동안 집을 비웁니다.”라는 뜻입니다.
    장대 3개가 꽉 채워져 걸려 있으면 이웃들은 집안에 아무도 없음을 인지하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5) 정낭을 1개 또는 2개만 사용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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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는 1개 또는 2개만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정낭을 가로로 걸치면 집에 늦게 돌아온다는 뜻이고, 사선으로 비스듬히 걸치면 금방 돌아온다는 뜻이었습니다.

    6) 종합

    이처럼 정낭은 단순한 나무 장대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는 소리 없는 언어이자 가장 따뜻한 아날로그 메신저였습니다.

    4. 정낭이 증명하는 제주의 위대한 가치, 신뢰와 삼무(三無) 정신

    1) 역사 기록 속의 삼무

    1704년에 이형상이 제주 목사로 부임하던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저술한 제주도 지방지인 『남환박물』 에 기록한 것을 번역한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제주도의 토질이 척박해서 백성들은 가난한 삶을 살았다. 땅에는 바위와 돌이 널려 있고 흙이 덮인 곳이 드물어서 삼과 면화를 기르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의복과 음식이 항상 부족했다. 의복과 음식은 소박했으며,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다. 이렇듯 제주도 백성들은 항상 가난에 시달렸지만 물건을 훔치는 자가 없었다. 말이나 소, 농기구, 곡물을 들에 방치하여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보안 기능이 없는 정낭이 대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주의 ‘삼무(三無) 정신’ 덕분입니다. 제주의 삼무는 ‘도둑이 없고, 거지가 없으며, 대문이 없다’는 뜻입니다.

    2) 현대의 기술적 첨단 보안과 제주의 자치적 보안 시스템

    여기서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현대 과학의 패러다임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전 세계 정보보안 시장의 핵심 철학은 ‘제로 트러스트(Zero Trust)’입니다. 직역하면 “아무도 믿지 마라(Zero Trust), 그리고 항상 검증하라(Always Verify)”라는 뜻입니다.

    현대의 제로 트러스트 보안 시스템은 내부에 이미 들어와 있는 최고 경영자나 신뢰받는 직원이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절대 신뢰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불신 장벽에서 출발합니다. 방 안의 서류 하나를 열어볼 때마다, 컴퓨터 시스템에 접속할 때마다 끊임없이 생체 인증(지문·안면 인식)을 요구하며 “당신이 정말 권한이 있는 사람이 맞는지”를 매 순간 가혹하게 검증하는 기술입니다.

    불신이 깊어질수록 인간 사회가 감당해야 할 시스템 구축 비용과 심리적 피로감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마련입니다. 물리적인 형태만 보면 제주의 정낭은 이 제로 트러스트 관점에서 ‘보안 점수 0점’의 허술한 바리케이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제주의 정낭은 기술의 복잡성으로 불신을 제어하는 현대 공학의 패러다임을 정면으로 뒤집는 완벽한 ‘상호 신뢰의 공동체 규범’을 보여줍니다.

    결국 정낭은 기계 장치로 인간을 감시하는 삭막한 기술이 아니라, ‘정직’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의 힘으로 공간을 완벽하게 방어해 낸 인류 역사상 가장 고차원적인 ‘제로 비용의 인문학적 보안 시스템’이었던 셈입니다.

    3) 소결

    정낭은 힘으로 침입자를 때려눕히거나 시스템적으로 차단하는 ‘강제 보안’이 아닙니다. 정낭은 도둑을 막기 위한 ‘차단막’이 아니라, 이웃 간의 단단한 ‘신뢰와 약속’이었습니다.

    “지금 집을 비우니 안으로 들어오지 말아 달라.”는 주인의 무언의 요청을, 마을 사람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존중해 주었던 것입니다. 도둑이 없다는 상호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열려 있는 믿음직한 정낭이라는 대문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높은 철제 대문을 세우고, 삼중 잠금장치를 달고, CCTV를 24시간 가동하면서도 늘 불안해하며 살아갑니다. 아무도 믿지 말고 끊임없이 검증하라는 제로 트러스트의 철저한 불신 속에 스스로를 격리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에 대해 제주의 정낭은 완전히 반대의 결론을 내려주며, ‘진정한 안전과 평화는 철저한 감시가 아니라 서로를 믿는 신뢰에서 온다.’는 깊은 울림을 전해줍니다.

    5. 올레에서 마주하던 그리운 추억들

    돌담을 따라 굽어지는 올레길을 걸어 들어가면, 고풍스러운 초가집이 보이고, 그 입구 한쪽 끝에 단정하게 성낭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집에 돌아 왔을 때에, 반갑게 맞아주시던 할머니의 환한 미소가 고스란히 겹쳐옵니다.

    한 올레 안에는 여러 집들이 모여 있는 경우가 많으며 대개는 작은 골목이입니다.

    조부모님 집 앞의 올레는 비교적 넓고 꽤 긴 편이었습니다. 덕분에 또래의 마을 아이들이 여럿이 모여서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하고, 때로는 연날리기도 했던 장소여서 꽤나 많은 추억이 쌓인 공간입니다.

    가을이면 초가집 지붕에 얹은 묵은 새(‘띠’의제주 방언)를 교체하고 난 뒤에 지붕을 튼튼히 묶을 용도로 길게 집줄(‘새’로 만든 동아줄)을 꼬아 만들었습니다. 이때에 공동 작업으로 어른들과 함께 ‘호랭이’를 돌리던 올레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호랭이’는 끝의 구부러진 갈고리에 새끼줄을 걸어서 ‘ㄴ’자 형태의 손잡이를 돌리며 집줄을 꼬아나갈 때 쓰는 도구입니다. 제주 사투리인데 ‘우리말 샘’ 등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진 설명: 성읍 민속마을에서 초가 지붕 집줄 묶기과 집줄 만들기 시연 중이며, 여성 두 명이 호랭이를 돌리고 있는 모습임)

    6. 맺음말: 내 삶의 울타리를 허물고, 신뢰의 올레길을 걸을 시간

    선조들은 돌담에 구멍을 내어 바람을 통과시키는 유연함의 지혜를 보였습니다. 이제 우리도 현대의 거센 변화 속에서, 내면의 높은 벽을 허물고 미래를 바라보며 세계와 상생하고 공존하는 지혜를 이어가야 할 때입니다.

    비록 일상에서 진짜 정낭을 보기는 어려워졌지만, 제주 사람들이 수백 년간 지켜온 단단한 상생과 신뢰의 정신은 여전히 검은 돌담 사이에 따뜻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제주에 오실 기회가 있다면, 화려한 관광지 대신 제주의 옛 숨결이 담긴 조용한 시골 마을의 올레를 천천히 걸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대문 없이 열려 있는 제주의 정서가 지친 여러분의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줄 것입니다.

    이처럼 대지 위에서 이웃을 향해 빗장을 풀었던 제주인들의 위대한 신뢰와 상생의 법도는, 섬을 둘러싼 거칠고 가혹한 또 다른 영토인 ‘바다’ 위에서 더욱 경이로운 공동체 문명으로 피어납니다.

    다음 5회에서는 돌이 많고 바람이 몰아치는 삼다(三多)의 혹독한 결핍 속에서, 제주인들이 어떻게 절망을 딛고 뚝심 하나로 생존의 뿌리를 내렸는지 풀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집약되어 전 세계가 경탄하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의 위대한 연대와 상생의 사회학>을 품고 찾아오겠습니다.

    제주 오리진(Jeju Origin)

    참고 자료
    * 제주 부사 이형상이 쓴 제주도 박물지, 남환박물, 한경아
    * (사)제주올레 홈페이지

  • <제3회> 제주 돌담의 물리학: 구멍 숭숭 뚫린 돌담이 태풍을 이겨내는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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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를 전하는 ‘제주 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화산섬 제주의 땅속이 어떻게 ‘다공성 화산회토’와 ‘송이(Scoria)’라는 천연 오리털 패딩을 입고 ‘맨도롱한 온기’를 스스로 유지하는지 알아 보는, <제주의 대지가 품은 ‘맨도롱한’ 비밀과 축복>을 함께 풀었습니다.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생명이 살기 좋은 온도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제주의 흙은 그 자체로 거대한 자연의 지혜였습니다.

    오늘은 그 대지의 온기를 품은 채, 사방에서 불어오는 거센 섬바람과 매년 찾아오는 강력한 태풍으로부터 제주의 삶을 지켜내 온 거대하고 경이로운 구조물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바로 제주의 집 주위와 들판을 묵묵히 두르고 있는 ‘제주 돌담’입니다.

    시멘트 한 줌 바르지 않고 거칠게 툭툭 쌓아 올린 것처럼 보이는 이 돌담에는, 현대의 첨단 건축공학으로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놀라운 ‘유체역학의 물리학’이 숨어 있습니다. 거센 태풍의 한복판에서도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바람의 길을 열어주며 자리를 지켜낸 제주 돌담의 비밀을 지금부터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제주 돌담의 형태와 오늘의 이야기

    제주의 돌담들은 그 쓰임새에 따라 울담, 밭담, 산담, 잣담, 원담, 성담 등 여러 형태가 있지만, 오늘은 울담과 밭담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

    (1) 바람을 막고 경계를 나누는 ‘울담’

    울담은 집의 경계를 나누고 집안에 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았습니다.

    (2) 토양과 농작물을 지키는 ‘밭담’

    밭담은 농사를 짓는 밭에 타인 소유의 농지와 경계를 나누며, 말이나 소 또는 야생동물들이 농작물을 해치는 것을 막고, 제주의 거친 바람에 흙이 날려버리거나 농작물이 쓰러지는 것을 줄이려 하였고, 때로는 비에 토양이 쓸려나가는 것을 방지하려고 쌓았습니다.

    (3) 엉성함 속에 감춰진 외담의 미학

    이 돌담들은 두텁게 쌓는 산담, 원담, 성담들과 달리 한 줄로 쌓는 외담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모양을 다듬어서 규격화하는 게 아니고 돌이 생긴 모습 그대로 쓰다 보니, 크기와 모양이 제멋대로인지라 불규칙하게 얹혀 있고 그 사이로 반대편 풍경이 훤히 보일 만큼 구멍이 숭숭 뚫려 있습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마치 성의 없이 대충 쌓아 놓은 것처럼 엉성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2. 제주 돌담에 대한 어린 시절의 추억들

    시골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울담 너머 이웃집에는 제법 큰 앵두나무가 있었습니다. 열매가 빨갛게 익을 무렵에는 그 새콤달콤한 유혹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면 이웃집 어른들이 볼까 봐 마음졸이며 울담 구멍 사이로 팔을 쑥 집어넣어서 몰래 앵두를 따먹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 글을 쓰고 나서 채 한 달도 되지 않는 6월 중순경이면 따먹을 때가 되겠군요.

    앞집 아이와 또는 옆집 아이들하고 울담 구멍사이로 얼굴을 보며 웃으며 떠들고, 유리구슬과 종이딱지를 교환하던 생각들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어제 일처럼 느껴집니다.

    이렇듯 외담으로 쌓은 돌담은 온통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건너편과 고스란히 소통되는 공간입니다.

    3. 흑룡만리(黑龍萬里), 제주의 대지를 지키는 검은 울타리

    (ai 이미지 생성)

    제주도를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면, 검은색 현무암으로 쌓은 돌담들이 불규칙한 모양으로 끝없이 이어지며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검은 용이 대지 위를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듯한 장관을 연출합니다. 그 길이가 자그마치 1만 리(약 4,000km)에 달한다고 하여 선조들은 이를 ‘흑룡만리(黑龍萬里)’라 불렀습니다. 실제로는 2만 2,000여km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므로, 이는 중국의 만리장성과 비슷한 길이가 됩니다.

    (1) 흑룡만리 돌담의 역사

    ‘탐라지’ 풍속편에 의하면, 김구가 1234년에 제주판관으로 임명되어 6년을 제주에서 보내면서 풍속을 규찰하고 단속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김구가 판관이 되어 백성의 고통을 물어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로써 제주의 돌담 역사는 약 800여년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의문점: 돌담이 태풍을 견디는 비결은?

    앞서 얘기한 대로 이 돌담들은 단순히 땅의 경계를 나누는 선이 아니었습니다. 거센 바닷바람에 집을 보호하고, 밭의 흙과 씨앗이 날아가는 것을 막아주는 방풍벽이자, 애써 키운 농작물을 보호하는 생명선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이한 점이 있습니다. 육지의 담장들은 시멘트나 진흙을 꼼꼼히 채워 바람 한 점 통하지 않게 단단하게 쌓아 올리는데, 제주의 돌담은 손으로 툭 밀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집과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태풍에 무너질 때도, 이 구멍 숭숭 뚫린 돌담들은 끄떡없이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도대체 어떤 원리가 숨어 있는 걸까요?

    4. 돌담 구멍의 ‘유체역학’: 정면 충돌을 피하는 지혜

    (ai 이미지 생성)

    손으로 밀면 넘어질 듯 엉성한 돌담이 태풍을 견디는 첫 번째 비밀은, 바람을 ‘막아서는’ 대신 ‘흘려보내는’ 길을 선택한 바로 그 ‘비어 있는 구멍’에 있습니다.

    물리학과 유체역학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공기)은 거대한 에너지를 가진 유체입니다.

    틈새 없이 꽉 막힌 단단한 시멘트 벽은 강한 태풍이 불어올 때 바람의 압력(풍압)을 온몸으로 정면에서 받아내야 합니다. 바람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벽이 받는 압력은 그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여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결국 바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벽 전체가 통째로 넘어지거나 균열이 가게 됩니다. 정면으로 맞서다 부러지는 셈입니다.

    반면, 제주의 돌담은 태풍이 몰아치면 그 거센 바람을 정면으로 막아서지 않습니다. 대신 돌과 돌 사이에 뚫린 수많은 구멍 속으로 바람이 통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공기역학적으로 바람이 돌담의 좁은 구멍들을 통과할 때 마찰과 와류(소용돌이)가 발생하면서, 바람이 가진 거대한 운동 에너지가 순식간에 분산되고 약화됩니다. 즉, 돌담을 통과하기 전에는 초속 30~40m에 달하던 파괴적인 태풍이, 구멍들을 거치고 나면 어느새 야성을 잃고 온순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5. 중력과 마찰력이 빚어낸 ‘허튼층쌓기’의 구조학

    제주 돌담이 무너지지 않는 또 다른 비밀은 구조적 안정성에 있습니다. 제주의 전통 돌담은 네모반듯하게 깎인 돌을 규칙적으로 쌓는 대신, 각기 다른 크기와 형태를 가진 불규칙하고 거친 현무암들을 가로세로 줄눈을 맞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대로 흐트려 쌓는 ‘막쌓기(허튼층쌓기)’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네모난 돌들은 지진이나 충격이 오면 한꺼번에 미끄러지며 무너지기 쉽지만, 거친 표면을 가진 현무암들은 서로의 요철(튀어나오고 들어간 부분)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게 됩니다. 접착제를 쓰지 않는 대신, ‘돌 자체의 무게(중력)’와 돌과 돌이 맞닿은 면의 ‘마찰력’만으로 지탱되는 구조입니다. 바람이 불어와 돌담이 미세하게 흔들릴 때, 이 불규칙한 돌들은 오히려 틈새를 찾아 더 단단하게 가라앉으며 서로를 꽉 움켜쥐는 독특한 역학적 성질을 가집니다.

    6. 비움의 물리학: ‘베르누이의 정리’가 적용되는 고정력

    앞서 살펴본 유체역학과 구조학의 원리를 종합하면, 여기에는 현대 물리학의 정수인 ‘베르누이의 정리(Bernoulli’s theorem)’가 경이로울 정도로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제주대학교 대학원의 한 연구 논문에서는 이 흥미로운 상호작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출처: 제주대학교 대학원 학위논문 내용 참고

    “이러한 베르누이의 원리를 제주 돌담에 적용한다면, [그림 Ⅳ-19]에서와 같이 돌담의 틈새를 지나는 바람의 경우, 주위의 공기에 비하여 큰 속력으로 돌담 틈새를 지나므로 돌담의 틈새는 주위보다 낮은 압력이 되며, 주위와의 압력차로 인한 힘이 돌담의 틈새 방향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압력차로 인한 틈새 방향으로 향하는 힘은 돌을 누르는 힘으로, 이 힘은 돌의 무게에 의하여 돌들 사이의 접촉면에 수직으로 작용하는 힘과 함께 수직항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마찰력을 크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상 논문 인용)



    논문의 분석처럼, 바람이 좁은 돌 틈을 통과할 때 속도가 빨라지면서 구멍 내부의 압력이 급격히 낮아집니다. 이때 압력이 높은 바깥쪽 공기가 돌담 중심 방향으로 돌들을 ‘꾸욱 움켜쥐고 누르는 힘’을 발생시킵니다. 이 힘이 돌의 무게(중력)와 결합하여 돌과 돌 사이의 마찰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제주의 돌담은 바람이 불어도 그 형태가 바람의 저항을 유연하게 흘려보내는 구조를 띠고 있어서 담장이 받는 전체적인 저항은 애초에 최소화 됩니다.게다가 울퉁불퉁하고 돌 자체에 미세한 구멍(기공)이 많은 현무암이기에 돌들끼리의 마찰력은 배가되고,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상태에서 중력과 내력이 동시에 작용하니, 태풍 속에서 돌담은 무너지기는커녕 더욱 단단한 요새로 변신하게 됩니다.

    바람이 돌담을 무너뜨리려고 거세게 몰아칠수록, 역설적이게도 유체역학적 압력차에 의해 돌담은 스스로를 더 단단하게 결속시킵니다. 외부의 충격을 흡수하여 스스로 구조적 균형을 찾아가는 일종의 ‘유연한 완충 시스템’인 셈입니다.

    7. 우주에서 활용할 ‘제주 돌담’의 지혜

    매우 흥미로운 신문기사가 있어서 간략히 소개합니다. 원문과 관련 사진을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경향신문, 2024.08.11.), (어린이 조선일보, 2025.05.29.)

    앞으로 달 기지에 수시로 왕복을 하려면, 로켓 이착륙 시 로켓 엔진 때문에 폭풍이 발생하면서 달 기지와 장비, 사람을 강타할 공산이 큽니다. 또한 달에서는 1년에 1,000번 이상 모래 폭풍이 불 정도로 자주 발생한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전통적인 ‘제주 돌담’ 축조 방식과 유사하게 이착륙장 주위를 원형으로 ‘담장’을 쌓자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스위스 연구진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합니다.

    스위스 연구팀 100여 명이 세계 곳곳에 담장을 찾아 나섰는데, 처음에는 콘크리트 장벽이나, 철근과 나무로 만든 장벽이 후로로 뽑혔으나, 달의 폭풍을 견딜 수 없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큐멘터리에서 제주 돌담을 보고 착안하였으며, 연구팀이 달과 비슷한 환경을 만든 뒤, 그곳에서 제주 돌담을 쌓는 실험에 성공했고 그 돌담은 거센 인공 바람에 끄떡없었다고 합니다.

    거센 바람을 구멍 사이로 유연히 흘려보내는 제주 돌담의 심성이 조만간 우주의 모래 폭풍까지 잠재우게 될 듯합니다.

    8. 생명을 살리는 ‘비움’과 ‘소통’의 로컬 정서

    인간의 삶과 정서 역시 이 돌담의 과학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과거 척박한 화산섬에서 거친 바다와 태풍을 마주하며 살아야 했던 제주 사람들은 자연을 정복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유연하게 비켜서서 소통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돌담의 구멍은 단순히 바람만 흘려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울담 너머로 이웃집의 안부를 확인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대화의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단단하고 묵직한 돌을 가지고 가장 부드럽고 유연한 ‘비움’의 미학을 실천한 제주 돌담은, 거친 환경을 슬기롭게 극복해 낸 로컬의 가장 아름다운 유산입니다.

    9. 글을 마치며: 꽉 막힌 벽 대신, 마음의 돌담을 쌓을 시간

    첫 회 이야기에서 만나본 마음의 밸런스를 잡아주는 ‘맨도롱한 온기’, 2회에서는 대지가 품은 다공성의 단열 비밀과 축복‘ 그리고 오늘은 거센 태풍을 유연하게 흘려보내는 ‘돌담의 유체역학’까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주가 우리에게 건네는 온기와 과학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메시지로 귀결됩니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일상의 온도를 유지하고, 삶에 들이치는 모진 시련의 바람 앞에서는 온몸으로 맞서 상처받기보다 내 마음속에 작은 ‘구멍’ 하나를 내어 유연하게 흘려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차가운 세상의 벽 앞에 힘겨워하고 있다면, 내 마음의 담장을 시멘트벽처럼 꽉 막아두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가만히 돌아보면 어떨까요? 거센 바람의 길을 열어주어 스스로를 지켜내는 제주의 돌담처럼, 조금은 비워두고 조금 더 유연해지는 ‘맨도롱한’ 하루를 보내시는 것은 어떨지요?

    그동안 ‘제주 오리진(Jeju Origin)’의 시리즈 연재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제주의 매우 독특한 문화인 <신뢰로 열리는 문, 제주의 지혜 ‘정낭’>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앞으로 ‘제주 오리진(Jeju Origin)’은 더욱 깊이 있고 매혹적인, 가장 제주다운 가치와 원형의 기록을 담은 새로운 이야기로 여러분을 찾아오겠습니다.

    제주 오리진(Jeju Origin)


    ■ 참고 문헌 (References)

    * 홍경모, 「과학교육 학습자료로서의 제주 전통 돌담에 대한 연구」,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 경향신문, 미래 달 로켓 이착륙장에 ‘제주 돌담’ 쌓자고?…이유는 ‘이것’, 2024.11.08.

    * 어린이 조선일보, 스위스가 달에 짓는 로켓 공항! 구멍 숭숭 ‘제주 돌담’에서 아이디어 얻었어요!, 2025.05.29

  • <제2회> 제주의 대지가 품은 ‘맨도롱한’ 비밀과 축복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를 전하는 ‘제주 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지난 첫 글에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차가움과 뜨거운 것 사이의 가장 알맞고 편안한 온도를 뜻하는 제주 사투리 <‘맨도롱하다’의 진짜 의미와 일상의 온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펄펄 끓어 혀를 데지도 않고, 차갑게 식어 굳어버리지도 않는, 몸에 가장 무리를 주지 않는 그 실용적인 온도의 지혜를 기억하시나요?

    오늘은 그 첫 이야기와 곧바로 이어지는, 제주의 ‘땅’에 대한 비밀을 풀어보려 합니다. 거친 바람이 부는 화산섬 제주의 대지는 어떻게 사계절 내내 생명을 키워내는 딱 알맞은 ‘맨도롱한 온기’를 스스로 품고 있는 걸까요?

    1. 조부모님 집 안방의 아랫목에서 밭으로 이어지는 온기

    지난 글에서 저는 어릴 적 조부모님과 생활하며 겨울날 아랫목 이불 속에서 느꼈던 아늑하고 포근한 추억을 말씀드렸습니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온몸을 스르르 녹여주던 그 맨도롱한 온기는 집 안의 온돌방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겨울철, 조부모님의 손을 잡고 밭으로 나가보면 뺨을 스치는 섬바람은 살을 에는 듯 매서웠지만, 발밑의 흙은 신기하게도 얼어붙지 않고 파릇한 생명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육지의 밭들이 한겨울 한파에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얼어붙어 생명의 숨통을 끊어놓고 있을 때, 제주의 밭은 차가운 눈 속에서도 보리와 무를 얼리지 않고 묵묵히 키워내고 있었습니다.

    저의 호기심 어린 질문들에 대해 조부모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제주 땅 알은 그추룩 몬딱 맨도롱 헌다.” (번역: “제주 땅 속은 그렇게 전부 따뜻하단다.”)

    그때 조부모님이 건네셨던 말씀의 진짜 과학적 자물쇠는, 훗날 이 화산섬의 독특한 토양 구조를 이해하게 되면서 비로소 풀리게 되었습니다.

    2. 다공성 화산 토양이 만든 천연 공기 단열재

    사실 제주의 온화함은 지리적 위치 덕분이기도 합니다. 일 년 내내 남서쪽에서 흘러드는 따뜻한 적도해류의 지류인 거대한 쿠로시오 난류와 남쪽의 위도가 만들어 낸 합작품으로써 대자연이 선물한 거시적인 축복입니다.

    하지만 그 매서운 섬바람을 온몸으로 맞받아치는 제주의 땅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화산섬이 빚어낸 ‘다공성(多孔性)의 미학’이 또 한 번 미시적인 온도를 방어해 냅니다. 이 맨도롱한 비밀의 핵심이 바로 화산 활동이 남긴 독특한 돌과 흙, 즉 ‘현무암’과 ‘송이(Scoria)’에 있습니다.


    (1) 대지가 입은 천연 오리털 패딩

    제주의 돌과 흙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는 다공성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공기’는 지구상에서 가장 훌륭한 천연 단열재입니다. 실제로 과학적 데이터를 보면 제주의 토양 구조가 왜 따뜻한지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2) 제주 화산 지형의 천연 단열 성능 데이터와 해석


    (3)천연 단열 성능 데이터의 해석

    제주의 밭 곳곳에 섞여 있는 구멍 숭숭 뚫린 화산 쇄설물인 ‘송이(Scoria)’는 그 자체가 천연 화산 세라믹입니다. 이 무수한 숨구멍들이 에어캡(뾱뾱이)처럼 작동하여 겨울철 매서운 한파 속에서도 땅속 깊은 곳의 온기를 꽉 붙잡아두는 단열재 역할을 합니다.

    반대로 여름철 뜨거운 햇볕 아래서도 땅속이 과열되어 뿌리가 타들어 가는 것을 막아줍니다.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딱 생명이 살기 좋은 온도의 밸런스를 대지 스스로 유지하는 절묘한 시스템인 셈입니다.


    3. 인삼보다 좋다는 ‘제주 겨울무’, 대지가 키워낸 생명의 기적

    이처럼 땅속 온도가 맨도롱하게 유지되면서 제주의 대지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생명을 키워내는 겨울의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화산섬의 천연 패딩이 만든 미시적인 기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주인공이 바로 ‘제주 겨울무(월동무)’와 겨울 채소들입니다.

    (1) 첫서리를 피해 땅속에서 맛을 익히는 지혜

    봄부터 가을까지 무를 재배하고 첫서리가 내리기 전 서둘러 수확해야 하는 육지와 달리, 제주에서는 주로 9월에 씨를 파종하여 한겨울에 수확하는 월동재배가 주를 이룹니다. 육지 무는 겨울을 넘기기 어려워 서둘러 뽑기 때문에 매운맛이 강한 반면, 제주의 무는 대지의 맨도롱한 품 안에서 얼지 않고 매서운 섬바람을 버텨냅니다.

    이 과정에서 무는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전분을 당분으로 바꾸며 영양분을 축적합니다. 덕분에 매운맛은 줄어들고 당도와 미네랄, 비타민C가 압도적으로 높아져, “겨울무는 인삼보다 효과가 좋다” 혹은 중국 본초강목의 “무는 채소 중 몸에 가장 이로운 것”이라는 옛말을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증명해 냅니다. 혹독한 한파 속에서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제 몸을 스스로 진한 온기로 채워낸, 대지의 단열 과학이 만든 위대한 결과물인 셈입니다.

    (2) 대한민국 겨울 식탁을 책임지는 제주의 생명선

    선조들은 이 대지의 온기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화산섬의 거친 환경 속에서 화려한 수식어 대신 삶에 딱 알맞은 적당한 온도를 귀하게 여겼던 로컬의 정서가 이 맨도롱한 토양의 성질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실제 통계 뉴스들을 보면 제주의 대지가 가진 가치는 숫자로 명확히 증명됩니다.

    한편, 제주도 농업기술원의 제주농업통계시스템(JASIS)에 나와 있는 2026년 2월 겨울 실시간 도매시장 출하 점유율 데이터를 살펴본 결과 더욱 압도적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예기치 못한 기후변화로 농산물 가격이 요동치는 요즘, 제주 땅에 한파나 이상 기류가 생기면 겨울철 전국 장바구니 물가가 급상승합니다. 제주의 다공성 토양이 품어주는 실용적인 온도의 밸런스가, 사실상 겨울철 대한민국 전체의 채소 공급망을 든든하게 지탱하는 생명선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4. ‘척박한 제주 땅’이라는 해묵은 고정관념을 뒤집다

    이 놀라운 통계와 대지의 과학을 마주하고 나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 우리가 흔히 탄식조로 쓰던 ‘척박한 제주 땅’이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제주에 어울리지 않는 한낱 옛 수식어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예부터 제주는 논농사를 짓지 못하고 물이 쉽게 빠져버려 ‘농사짓기 힘든 저주받은 땅’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육지의 잣대로만 바라보았을 때는 분명 척박한 땅이 맞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자연은 제주에게 완전히 다른 방식의 축복을 숨겨두었습니다. 물이 잘 빠지는 다공성 화산 토양이었기에 뿌리가 썩지 않았고,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과 송이가 숨구멍 역할을 해주었기에 한겨울 한파 속에서도 홀로 ‘맨도롱한 온기’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벼농사를 짓지 못하는 화산섬의 한계를, 겨울에도 푸른 생명을 키워내는 압도적인 월동재배의 요람으로 승화시킨 제주의 대지. 이제 제주의 땅은 척박함의 상징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리하고 따뜻한 ‘생명의 단열재’로 다시 정의되어야 마땅합니다.

    5. 글을 마치며: 당신의 마음속 대지는 어떤 온도인가요?

    제주 대지가 품은 ‘맨도롱한’ 비밀은 거창한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화산섬의 척박함을 버텨내기 위해 대지가 스스로 만들어낸 가장 편안하고 실용적인 단열의 기록입니다. 과열되지도, 식지도 않는 ‘맨도롱함’의 미학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셈이지요.

    오늘 하루, 차가운 경쟁과 과열된 업무 속에서 내 마음의 대지는 너무 극단적인 온도를 오가고 있지 않은지 가만히 돌아보면 어떨까요? 너무 뜨거워서 주변을 태우지도 않고, 너무 차가워지지 않아 쉽사리 얼어붙지도 않는, 제주의 대지처럼 ‘맨도롱한’ 온기를 품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다음 글에서는 거센 태풍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도리어 바람의 길을 열어주며 꿋꿋이 자리를 지켜낸 <제주 돌담(흑룡만리)의 물리학>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거대한 자연의 위협 앞에서도 ‘비움과 수용’의 미학으로 자신을 지켜낸 돌담의 경이로운 과학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제주 오리진(Jeju Origin)

  • <제1회> 제주 사투리 ‘맨도롱하다’의 진짜 의미와 일상의 온도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와 로컬의 깊은 가치를 전하는 블로그 ‘제주 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오늘 첫 글로 여러분께 제주도에서 가장 포근하고 정겨운 단어인 ‘맨도롱하다’를 소개해 드립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중매체나 여행 광고 속에서 ‘맨도롱하다’라는 단어는 주로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수식어로 소비되곤 합니다. 보통 이 단어의 뜻은 표준어 ‘따끈하다’의 제주 방언이라고 단순하게 알려져 있으나, 실제 제주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상 속 어감에는 분명하고도 미묘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단어를 거창한 문학적 표현으로 오해하곤 하지만, 사실 ‘맨도롱하다’는 기온이나 음식의 온도가 ‘차가움과 뜨거운 것 사이의 적당하게 미지근하면서도 따스한 상태’를 뜻하는 지극히 물리적이고 실용적인 제주 사투리입니다.

    오늘은 ‘멘도롱하다’로 쓰기도 하는 이 제주방언이 가진 진짜 어감과 그 속에 숨은 로컬의 매력을 찾아보려 합니다. 아울러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소박한 단어가 어떤 실질적인 메시지와 삶의 지혜를 전하고 있는지 함께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사전적 정의와 제주 사람들이 느끼는 정확한 어감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 따르면 ‘맨도롱’과 ‘멘도롱’은 둘 다 표준 표기로 등록되어 있으며, ‘따스하다’, ‘메지근하다’의 제주 방언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다른 국어사전에는 ‘미지근하다’의 제주 사투리로 정의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지에서 체감하는 언어의 온도는 조금 다릅니다. 표준어의 ‘따끈하다’는 말은 김이 풀풀 나거나 만졌을 때 꽤 높은 온도까지 포괄하는 역동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제주의 ‘맨도롱하다’는 미지근함의 상단과 따스함의 하단이 만나는 그 정겨운 중간 지점을 정확하게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팔팔 끓어 입안을 데일 것 같은 뜨거운 국물이 아니라, 식탁에 내놓은 뒤 한 김 식혀서 숟가락으로 바로 떠먹기 가장 편안하고 알맞은 온도의 국물을 만났을 때, 제주 사람들은 비로소 “국물이 맨도롱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른 아침, 서귀포나 제주시의 오래된 골목 식당에서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 고기국수나 몸국 한 그릇의 국물을 들이켰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따끈하게 다가오지만 맛을 음미하며 먹다 보면 서서히 입안 전체를 가득 채우는 그 자극 없는 편안함, 그 온도의 상태가 바로 ‘맨도롱하다’ 그것입니다. 즉,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고 인간의 몸에 가장 무리를 주지 않는 최적의 물리적 온도를 날카롭게 집어내는 지혜로운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 역시 어릴 적 제주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러한 온도를 피부로 느끼며 자랐습니다. 거센 칼바람이 부는 겨울날, 온돌방에서 화롯불을 쬐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시는 두 분의 나지막한 대화를 들으며 아랫목 이불 속에서 느꼈던 그 아늑하고 포근한 온기야말로 이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구석을 채우는 추억이자 그리움의 실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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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척박한 화산섬 환경이 만들어낸 실용적인 온도의 지혜

    이 짧은 사투리 한 마디에는 제주의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거친 세월을 살아온 섬사람들의 아주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과거의 제주는 사면이 매서운 바닷바람에 노출되어 있었고, 돌이 많고 흙이 귀한 척박한 토양 때문에 늘 생존 자체가 고단하고 치열했던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매서운 겨울철의 추위 속에서, 혹은 칼바람이 부는 바다에 몸을 던져 물질을 마친 해녀들에게 체온을 회복하기 위한 ‘온기’는 생명과 직결된 필수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저체온증 상태에서 갑자기 너무 과하게 뜨거운 물이나 불을 접하는 것은 도리어 화상을 입히거나 몸의 혈관에 큰 무리를 주어 사람을 상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거친 바다에서 막 돌아와 얼어붙은 신체를 서서히, 그리고 안전하게 깨워주는 완만하고 적당한 온기, 바로 ‘맨도롱한 상태’의 물과 불이야말로 그들의 삶을 지켜주는 가장 실질적인 구원줄이었습니다. 화려한 수식어나 과장 없이 그저 인간의 삶과 생존에 딱 알맞은 실용적인 온도를 가장 귀하게 여겼던 로컬의 정서가 이 단어에 그대로 묻어나는 이유입니다.


    3. 과열된 현대사회에 던지는 ‘맨도롱함’의 미학

    뜨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이 ‘맨도롱한 상태’는, 오늘날 매 순간 고온으로 과열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매우 깊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우리는 흔히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열정이라는 보기 좋은 이름 하에 온몸을 불태워버릴 듯 언제나 ‘뜨겁게’만 살기를 강요받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번아웃이라는 지독한 피로를 맞이하고, 순식간에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양극단의 상태를 위태롭게 오가곤 합니다.

    유럽 덴마크어의 아늑한 문화적 정서인 ‘휘게(Hygge: 편안하고 따뜻한 상태)’가 다소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감성적 영역에 치우쳐 있다면, 제주의 ‘맨도롱하다’는 그보다 훨씬 담백하고 현실적입니다. 지나치게 뜨거워서 소중한 혀를 데이지도 않고, 반대로 너무 차가워서 음식의 맛이 굳어버리지도 않는, 딱 먹기 좋은 국물의 황금 온도처럼 우리 일상의 밸런스도 너무 과열되지 않게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는 조율이 필요하다는 생활의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4. 제주 오리진(Jeju Origin)이 풀어주는 ‘맨도롱하다’ 핵심 FAQ

    여기서 독자분들이 가장 궁금해하시는 제주 사투리의 재미있는 비밀 몇 가지를 문답 형식으로 알기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A. 일반적으로 제주의 언어에서 ‘따뜻하다’는 ‘또똣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덥지 않을 만큼 알맞게 높은 온도를 뜻하기도 하고, 사람의 감정이나 태도, 그리고 공간의 분위기 따위가 정답고 포근할 때도 널리 쓰이는 정겨운 단어입니다. “날씨가 또똣하다”, “마음이 또똣해진다”처럼 광범위한 온기를 담아내는 제주의 대표 사투리입니다.

    Q2. 그렇다면 ‘또똣하다’와 ‘맨도롱하다’는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나요?

    A. ‘또똣하다’ 보다 온도가 살짝 낮은 느낌을 주는 단어가 바로 ‘맨도롱하다’입니다. 이 단어는 주로 국물, 차, 물처럼 우리가 마시거나, 혹은 온돌방 아랫목처럼 우리가 몸으로 직접 수용하는 대상의 온도가 자극 없이 딱 알맞고 기분 좋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미지근함’보다는 조금 더 따뜻하고 ‘뜨겁다’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상태입니다. 기후나 감정의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오감 및 식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된 제주인들만의 아주 실용적이고 지혜로운 온도 개념이라고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A. 가장 대표적인 일상 표현으로 식사를 할 때에 “국이 맨도롱할 때 혼저(얼른) 먹으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음식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식지도 않은 가장 맛있고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을 뜻합니다. 일상에서 타이밍과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정겨운 표현입니다.

    Q4. 한때 ‘맨도롱 또똣’이라는 말이 꽤 유행했었는데, 실제 현지에서도 자주 쓰이는 표현인가요?

    A. 지난 2015년, 국내의 한 지상파 방송국에서 ‘맨도롱 또똣’이라는 제목의 드라마를 방영하면서 이 표현이 대중적인 시청률과 함께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뜻이 널리 전파되어 한때 꽤 유행했었고, 요즘에는 마치 하나의 세트처럼 당연하게 붙여 쓰는 표현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주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자란 제주 토박이로서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저를 포함한 현지 주민들과 지인들은 일상에서 결코 이 두 단어를 합쳐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 것처럼 ‘맨도롱하다’와 ‘또똣하다’는 엄연히 인간이 피부나 오감으로 느끼는 온도의 결이 다릅니다. 그렇기에 제주 사람들은 상황과 대상에 따라 이 두 단어를 철저하게 구분해서 사용해 왔으며, 이를 한 문장으로 붙여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아마도 드라마 제작 과정에서 제주 사투리가 가진 특유의 정겹고 예쁜 어감을 극대화하고, 드라마의 극적인 재미를 살리기 위해 두 개의 단어를 재치 있게 조합하여 사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미디어 속 낭만적인 표현과 실제 로컬의 정교한 언어생활에는 이처럼 재미있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5. 제주 여행의 즐거움을 높여 드릴 무공해 조미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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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여러분이 제주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다면, 단순히 풍경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제주의 대표 향토 음식인 ‘고기국수’나 ‘몸국’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멘도롱하다’의 진짜 의미를 되새겨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맨도롱하고 진한 국물 한 모금 속에서, 옛 제주 어르신들이 이웃과 나누었던 그 넉넉하고 따뜻한 온심(溫心)을 온전히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이때의 국수나 몸국 한 사발은 아마도 여행의 깊이를 더해줄 훌륭한 조미료가 될 것입니다. 만일 ‘맨도롱하다’의 온기를 느끼신다면 그 순간부터 여러분에게는 제주의 속 깊은 곳까지 방문하는 진짜 여행의 시작이 펼쳐질 것입니다.

    6. 글을 마치며: 당신의 일상 온도는 몇 도인가요?
    그리고, 제주 온기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제주 사투리 ‘맨도롱하다’는 환상 속의 미화된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화산섬의 거친 환경을 버텨낸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찾아낸 가장 편안하고 실용적인 온도의 역사적인 기록입니다.

    오늘 하루, 복잡한 일상과 산더미 같은 업무 속에서 내 마음과 일상의 온도가 혹시 과열되어 끓어 넘치고 있지는 않은지 가만히 점검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런데 음식과 사람의 정서뿐만 아니라, 제주의 거친 겨울바람을 막아주고 이 ‘맨도롱한 온기’를 사계절 내내 스스로 품고 있는 제주의 진짜 자연 비밀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혹시 아시나요? 과연 제주의 땅과 거친 화산 지형은 어떻게 이 가장 편안한 온도를 스스로 뚝심 있게 유지하는 걸까요?

    제주의 대지와 화산 토양이 숨겨 둔 흥미롭고 신비한 과학적인 비밀을 바로 다음 글 <제주의 대지가 품은 ‘맨도롱한’ 비밀과 축복>에서 명쾌한 근거와 함께 이어 가겠습니다.

    제주 오리진(Jeju Ori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