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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회> 조석 간만의 물리학: 바다가 차려놓은 천연 그물 ‘원담(석방렴)’의 과학


    제주 섬의 해안선을 따라 올레길이나 바닷가 갯바위를 걷다 보면, 조간대(潮間帶) 얕은 바당 한가운데에 반원형이나 말발굽 모양으로 길게 늘어선 검은 돌무더기를 심심치 않게 마주하게 됩니다. 제주 바다를 단순히 에메랄드빛 풍경으로만 소비하는 외지인의 눈에는 그저 파도에 밀려와 쌓인 갯바위 무더기나, 과거 누군가 밭을 일구다 나온 잡석을 바다에 버려둔 흔적쯤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친 바다에 기대어 목숨을 부지해 온 탐라 토박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 돌무더기는 전혀 다른 형상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은 굶주림과 척박함 속에서 섬사람들이 자연과 맺었던 가장 거대하고도 정교한 생존의 계약이자, 현대 토목공학의 상식을 훌쩍 뛰어넘는 유체역학적 걸작, 바로 ‘원담’입니다.

    육지에서는 바다에 발(대나무나 싸리나무로 엮은 발)을 쳐서 고기를 잡던 어살이나, 서남해안 갯벌에 돌을 쌓아 고기를 가두던 석방렴(石防簾)이라는 한자어로 익숙할 것입니다. 석방렴(石防簾)의 뜻은 돌 석(石), 막을 방(Defense, 防), 발 렴(Curtain, 簾) 자를 써서 “돌로 방어벽(담)을 쌓아 만든 그물(발)”이라는 뜻의 원시적 어로 장치를 총칭하는 한자어입니다.
    그러나 제주의 원담은 펄이 가득한 갯벌에 세워진 육지의 ‘독살’, ‘돌살’, ‘독새’, ‘돌발’ 등과는 근본부터 태생을 달리합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의 펄 바닥과 달리, 제주는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굳어 형성된 날카로운 빌레(용암 암반)와 거친 자갈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한겨울이면 살을 에는 북서풍이 몰아치고, 여름이면 집채만 한 태풍의 너울이 해안가를 강타합니다. 나무 기둥 하나 바닥에 박기 힘든 이 험난한 용암 바당 위에서, 제주의 선조들은 시멘트나 진흙 한 줌 쓰지 않고 오직 깨진 현무암 덩어리만을 맨손으로 맞물려 수백 년을 버티는 돌그물을 짰습니다.

    그물 한 뙈기를 짜려면 삼베실이나 무명실이 귀해 엄두를 못 내고, 쇠붙이 바늘 하나조차 육지에서 쌀을 주고 바꿔와야 했던 결핍의 시절이었습니다. 깊은 먼바다로 노를 저어 나갈 튼튼한 어선을 지을 재목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제주의 선조들은 한탄하는 대신, 매일 바다를 당겼다 밀어내는 달과 태양의 인력, 그리고 바닷물이 돌 틈을 스쳐 지날 때 발생하는 유체역학적 에너지의 차이를 간파했습니다.

    엔진도, 나일론 그물도, 사람의 고된 팔심도 빌리지 않고 오직 지구의 물리적 자전과 행성의 인력만을 이용해 하루 두 번 바다가 차려주는 천연 밥상을 거두어들였던 지혜.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원담의 숨겨진 물리학입니다.


    1. 조석 간만을 이용한 ‘에너지 제로’의 어로 메커니즘


    원담의 사냥법은 인류가 발명한 모든 어로 기술 가운데 에너지 효율이 가장 완벽한 수준에 도달해 있습니다. 인간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한 채 자연 현상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자연 스스로 수행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달의 인력에 의해 밀물(들물)이 차오르면 먼바다의 찬 해류와 연안의 얕은 바닷물이 뒤섞이며 풍부한 부유 플랑크톤이 일어납니다. 이를 먹기 위해 멜(멸치), 숭어, 각재기(전갱이), 자리돔, 농어, 심지어 감성돔에 이르는 수많은 어군이 얕은 조간대 연안으로 물결을 타고 떼 지어 밀려듭니다.


    1) 들물의 관성과 먹이사슬의 유인

    이때 원담의 돌벽은 이미 만조의 바닷물 밑으로 깊숙이 잠겨 버립니다. 물 위에서는 담의 존재가 전혀 보이지 않으며, 물속의 고기들에게도 그것은 그저 조류를 막아서지 않는 평범한 여(암초)의 턱으로 인식될 뿐입니다. 물고기들은 아무런 저항감 없이 물길의 관성을 따라 원담 안쪽 너른 바당으로 자연스럽게 진입합니다.


    2) 썰물의 차려준 자연밥상

    만조를 지나 썰물(날물)이 시작되는 순간, 바다의 에너지 흐름은 180도 뒤집힙니다. 연안을 가득 채웠던 수천 톤의 바닷물이 조석 주기에 맞춰 다시 수평선 먼바다 쪽으로 무서운 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물고기들은 수위가 낮아지고 수압이 변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몸을 돌려 외해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원담의 물리적 트랩이 작동합니다. 바닷물이 빠져나가면서 수면 아래 숨어 있던 검은 현무암 능선이 서서히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물은 자연스러운 중력과 유체 성질에 의해 현무암 돌과 돌 사이의 미세한 틈새를 통해 거침없이 바깥으로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일정한 체격을 가진 물고기들은 이 좁은 암석의 틈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외해로 이어지는 유일한 탈출로라고 여겼던 물길이 검은 돌벽에 가로막히는 순간, 물고기들은 혼비백산하여 담 안쪽을 맴돌게 됩니다.

    인간이 한 일이라고는 그저 제때를 기다려 바구니와 족대를 들고 마른 바닥을 걸어 내려간 것뿐입니다. 거대한 배를 띄우지도 않았고, 그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장정 수십 명이 땀을 흘리지도 않았습니다. 지구와 달이 만들어내는 무한한 천체 물리학적 낙차 에너지가 물고기를 제 발로 함정 한가운데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2. 접착제 없는 건식 석축: 파도를 견디는 다공질 현무암의 감압 공학


    1) 100% 현무암 축조

    육지의 독살이나 석방렴은 돌담 사이에 대나무 발을 꽂거나 갈대를 엮어 보완하기도 하지만, 제주의 원담은 거친 바다 환경을 견디기 위해 오직 구멍 숭숭 뚫린 검은 현무암만을 촘촘하게 쌓아 올려 만듭니다.

    원담을 눈앞에서 마주했을 때 현대의 토목 기술자들이 가장 경악하는 지점은 바로 ‘결합재의 완전한 부재’입니다.

    시멘트 몰탈은 고사하고 흙 한 줌 채워 넣지 않은 채, 오직 거친 돌을 맞물려 쌓아 올린 ‘외담’ 혹은 ‘접담’ 구조가 수백 년 동안 수천 번의 태풍과 거센 너울을 맞고도 무너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2) 콘크리트 옹벽의 치명적 결함과 파압(Wave Pressure)

    현대식 항만 공사에서 흔히 쓰이는 매끄러운 콘크리트 직립 방파제는 파도가 부딪힐 때 엄청난 충격 압력(파압)을 벽면 전체로 정면 흡수합니다. 수면을 때리는 파도의 에너지가 분산될 통로가 없기 때문에, 제방 밑바닥이 세굴(Scour)되거나 단 한 번의 강력한 너울성 파도에도 벽체 자체가 통째로 전복되거나 금이 가며 터져 나갑니다.

    만약 옛 선조들이 원담을 틈새 하나 없이 빽빽하고 매끄러운 석벽으로 쌓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조 때 밀려드는 조류의 수압과 태풍 때 몰아치는 수십 톤의 파도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단 한 해 여름을 넘기지 못해 산산조각이 났을 것입니다.


    3) 다공질 현무암과 무수한 공극(pore space)의 유체 분산 효과

    선조들은 거친 바다와 정면으로 힘겨루기를 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앞선 「제3회 제주 돌담의 물리학: 구멍 숭숭 뚫린 돌담이 태풍을 이겨내는 원리」에서 살펴본 ‘바람을 흘려보내는 원리’를 바다로 가져와, 파도의 충격을 스스로 분산시키는 다공질 투수성 석축(Permeable Breakwater)을 완성해 냈습니다.

    ① 감압 밸브로서의 틈새

    원담을 쌓은 현무암은 그 자체로 기포가 숭숭 뚫린 다공질 암석일 뿐만 아니라, 돌과 돌이 만나는 지점마다 주먹만 한 공극(빈틈)들이 무수히 얽혀 있습니다. 거센 파도가 원담을 들이치는 순간, 파도의 수괴(물덩어리)는 단단한 벽에 부딪혀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니라 돌 틈 사이로 빨려 들어갑니다.

    ② 미세 와류 형성을 통한 파괴 에너지 감쇠

    틈새로 쏟아져 들어간 바닷물은 암석 내부의 불규칙한 미로 속에서 수만 갈래의 미세한 와류(소용돌이)로 쪼개집니다. 물과 물이 서로 부딪히고, 거친 현무암 표면과 마찰하면서 파도가 가지고 있던 거대한 운동 에너지는 급격히 상쇄되어 열에너지와 거품으로 흩어집니다.

    ③ 자가 안정 구조(Self-stabilizing Structure)

    밑바닥에는 성인 서너 명이 겨우 굴릴 수 있는 거대한 ‘굽돌(기초석)’을 용암 빌레의 홈에 맞춰 깊숙이 박아 넣었습니다. 그 위로 갈수록 점차 작은 돌을 올리되, 돌들의 무게중심이 안쪽으로 쏠리도록 쐐기돌을 물려 쌓았습니다. 파도가 칠 때는 돌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마찰력으로 충격을 흘려보내고, 물이 빠지면 중력에 의해 제자리로 더 꽉 맞물려 내려앉는 경이로운 자가 복원 메커니즘을 완성한 것입니다.

    자연을 억누르지 않고 자연의 통로를 열어줌으로써 스스로를 지켜내는 무저항의 물리학, 그것이 시멘트 한 톨 없는 원담이 천 년의 세월을 버텨낸 핵심입니다.


    3. 원담의 해부학: 파도를 흘리고 어군을 가두는 3대 구조적 설계


    언뜻 보면 바닷가에 돌을 대충 둥글게 둘러쳐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원담은 조류의 방향, 바닥 지형의 고저 차, 그리고 어종별 회유 습성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구역별로 각기 다른 기능을 부여한 고도의 구조체입니다.


    1) 원담의 축조 방향: 파도를 빗겨 치는 곡률의 미학

    원담의 전체적인 외형은 바다 쪽을 향해 완만하게 둥근 활(弓) 모양이나 반대방향의 V형 또는 말발굽 형태의 곡선을 그립니다. 이는 파도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지혜로운 축조방식이었습니다. 직선으로 쌓은 제방은 조류를 직각으로 받아 저항이 극대화되지만, 유선형의 완만한 곡선 담은 밀려드는 파도를 양옆 해안가로 미끄러지듯 유도하여 흘려보냅니다. 또한 썰물 때 물고기들이 직선 벽을 따라 탈출구를 찾는 대신, 둥근 곡선을 따라 맴돌다 담 중심부로 유인되도록 만드는 유도벽 역할을 수행합니다.


    2) 웅덩이 설치: 어류의 피난 본능을 역이용한 최종 집수지

    원담 내부 바닥을 살펴보면 수평이 아니라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바다 쪽에 가장 가깝고 수심이 가장 깊숙하게 파인 핵심 웅덩이를 만들어 둡니다.

    간조가 가까워져 원담 내부의 바닷물이 대부분 빠져나가고 자갈과 모래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물고기들은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이때 본능적으로 물이 남아 있는 가장 깊고 어두운 웅덩이를 찾아 몸을 숨기려 드는데, 그곳이 바로 최종 그물의 적재창이 됩니다.

    결국 수백 평에 달하는 원담 내부로 들어왔던 고기들이 썰물이 완전히 끝나는 시점에는 단 몇 평 남짓한 웅덩이 안으로 한데 밀집하게 됩니다. 어부들은 굳이 넓은 바다를 헤맬 필요 없이, 마침내 이 웅덩이에 빽빽하게 모여든 고기를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3) 원담의 돌 틈새: 어군의 패닉을 막는 점진적 감압 배수

    원담은 밀물 때 담 전체가 물속에 완전히 잠겨 어군이 담 위를 자유롭게 넘나들도록 유도합니다. 이후 썰물이 시작되면 별도의 인공 문을 닫지 않아도, 수위가 낮아지면서 담 위쪽이 먼저 수면 위로 드러나 물고기의 퇴로를 자연스럽게 차단합니다.

    이때 원담의 일부 낮게 트인 물목과 현무암을 메운 돌 틈은 물만 서서히 빠져나가게 하는 거대한 천연 필터 역할을 합니다. 물이 한순간에 빠져나가지 않고 완만하게 빠져나가도록 유속을 분산시킴으로써, 갇힌 어군이 급격한 조류 변화에 놀라 담 밖으로 튀어 넘는 것을 방지하고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원안의 깊은 웅덩이로 자연스럽게 머물게 만드는 정교한 생태적 설계였습니다.


    4. 원계(圓契)와 멜 바당: 제주 공동체를 지탱한 수눌음의 사회학


    원담은 단순한 토목 시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척박한 화산섬에서 피를 나눈 가족을 넘어 마을 전체를 하나의 단단한 생명 공동체로 묶어주었던 사회적 제도이자 규범이었습니다.


    1) 사유화를 거부한 수눌음의 노동

    바다 밑바닥에서 집채만 한 현무암 굽돌을 파내어 물길을 잡고 담을 쌓는 일은, 개인이나 한두 가구의 힘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지게를 질 수도 없고 우마차도 들어올 수 없는 갯바위 밭에서, 수백 킬로그램의 바위를 굴리고 맞추는 일은 마을 장정 수십 명이 굵은 밧줄을 걸고 호흡을 맞추어야만 가능한 중노동이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가 원담 한쪽이 터져 나가면, 누구의 탓을 할 것도 없이 온 마을 사람들이 짚줄과 괭이를 들고 바당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거대한 공동 노동을 제주에서는 ‘수눌음’이라 불렀고, 이를 위해 조직된 마을 자치 조직이 바로 ‘원계(圓契)’였습니다.


    2) “멜 들엇저!” 외침소리와 함께 열린 나눔의 축제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제주 연안으로 은빛 멜(멸치) 떼가 새까맣게 밀려드는 날이면 마을 망루에 섰던 ‘원지기’ 삼촌이 갯바위를 울리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원담에 멜 들엇저! 양동이영 구덕 들엉 ᄆᆞᆫ딱 바당더레 ᄃᆞᆯ리라!”

    “(원담에 멸치 들었다! 양동이랑 바구니 들고 모두 바다로 달려라!)”

    ※ 안내: ‘ᄆᆞᆫ딱’, ‘ᄃᆞᆯ리라’는 아래아(ㆍ)가 쓰인 제주어 표기이며, 실제 현지 구어 발음은 현대 한글로 ‘몬딱’, ‘돌리라’에 가깝습니다.
     

    웅덩이에 물이 무릎 정도까지 빠지면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족대와 구덕(대나무 바구니)을 든 어른들이 웅덩이로 뛰어들어 은빛 멸치를 바가지째 퍼 올렸습니다.

    하지만 고기를 거두는 손길에는 엄격한 질서와 도덕이 있었습니다. 원계를 구성하는 지분(원담을 쌓을 때 보탠 노동력의 몫)에 따라 몫을 공평하게 나누는 ‘분배의 룰’이 철저하게 작동했습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지분이 없는 홀어머니 가정, 물질을 못 하는 노인, 장애를 가진 이웃의 몫을 먼저 바구니에 담아 챙겨준 뒤에야 계원들의 분배가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원담은 누군가의 부를 독점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마을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바다가 베푼 생명을 골고루 나누는 자비로운 배분의 식탁이었습니다.


    3) 어린 치어를 살려 보낸 생태 어로의 철학

    오늘날 나일론 그물망은 바다 밑바닥을 긁어 어린 치어까지 싹쓸이하지만, 조상들의 원담은 결코 바다의 씨를 말리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굵기만 한 틈새를 둔 돌벽은, 덩치 큰 어미 물고기만을 인간의 양식으로 남기고 미처 자라지 못한 어린 새끼 물고기들은 썰물과 함께 유유히 바다로 빠져나가도록 허용했습니다. 당장의 배고픔 앞에서도 다음 해, 다음 세대의 풍요를 남겨두었던 지혜. 원담의 돌 틈새는 인간의 탐욕을 걸러내던 가장 숭고한 도덕적 필터였던 것입니다.


    5. 원담의 이름들


    제주대학교 정광중 교수에 따르면 (제주일보, ‘원담, 신이 내린 황금그물…공동체문화의 상징’ 인용)


    “원담의 이름은 ▲주변의 바다나 가까운 육지 지명을 빌려 사용한 새배원과 산밧알원 ▲원담의 위치와 지형 등에 따라 지어진 앞원, 멀원, 코지원, 빌레원, 뒷개, 코지웃개, 코지알개 ▲잘 잡히는 어종에 의해 붙여진 멜캐, 숭어원, 멍개원 ▲사람 이름을 빌린 이선달개, 홍건이개 ▲생긴 모양을 빌린 도고리원과 곱은원, 크기를 나타내는 큰원과 족은원, 축조 시기를 나타내는 새개, 원담 안의 상태를 나타내는 모살원과 돌원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6. 필수 제주어 어휘 및 현장 용어 해설


    1) 원담: 해안가 조간대에 둥그렇게 돌을 쌓아 밀물 때 들어온 물고기를 썰물 때 가두어 잡는 제주의 전통 돌그물이며, 마을에 따라 ‘원’ 또는 ‘개’나 ‘갯담’이라고도 부릅니다. 원은 울타리를 뜻하는 원(垣)에서 비롯됐다고 하며, ‘개’는 해변 후미진 곳의 이름에서 비롯한 말입니다.
    다만, 인공적으로 축조하지 않고 천연으로 이루어진 돌담은 ‘통’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대개 바다 밑바닥이 주변 지형보다 약간 낮은 곳을 활용하며, 그 지형에 따라 높이 약 1~1.5m, 폭 1~2.5m 정도로 담을 쌓았으며, 파도의 영향을 덜 받도록 안쪽은 높게, 바깥쪽은 약간 낮게 비스듬히 쌓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2) 조간대(潮間帶): 만조 때의 해안선과 간조 때의 해안선 사이의 영역. 물이 들면 잠기고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갯가 갯바위 지대입니다.

    3) 여: 바닷가 바닥이 얕거나 썰물 때 물 위로 살짝 드러나 보이는 바위나 돌 따위, ‘여을’, ‘여의’, ‘여흘’이라고도 부릅니다.

    4) 빌레: 넓적하고 평평하게 펼쳐진 암반 지대입니다.

    5) 갯도: 원담의 역할을 하면서 한편 배가 포구로 들어올 때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든 뱃길입니다.

    6) 굽돌: 담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파도에 흔들리지 않도록 전체 하중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초 암석입니다.

    7) 멜: 제주 바다에서 대량으로 회유하는 멸치의 제주어 명칭이며, 제주 전통 식문화(멜국, 멜튀김, 멜젓)의 근간을 이루는 대표 어종입니다.

    8) 수눌음: 제주 특유의 상부상조 품앗이 문화. 힘든 농사일이나 바다 일, 돌담 쌓기 등을 마을 공동체가 서로 돌아가며 무상으로 돕던 노동 연대입니다.

    9) 원계(圓契): 원담을 축조하고 보수하며, 어획물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관리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결성했던 자치 규약 조직입니다.


    7. 고향 마을 바닷가 원담의 추억


    (사진: 원담(돈물원)이 있던 곳)


    내 고향 마을 신엄리의 바닷가 지명인 ‘남또리(남ᄃᆞ리)’에는 ‘남또리포구’(현 고내리포구)가 있고, 포구 입구 한편 바닷가 방향에는 ‘돈물원(ᄃᆞᆫ물원)’, ‘남또리개’라 불리는 커다란 반원형의 원담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 원담의 전체 길이는 100여 m가 넘었는데, 원담 내부 바닥은 모래이나 곳곳에 작은 자갈들과 조금 큰 돌멩이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 돌을 뒤집으면 낙지가 꽤 잡히기도 했습니다.
    근처에는 ‘볼레낭기정’(보리수나무가 있는 절벽이라는 뜻)이란 높은 절벽 밖의 바다를 ‘석주와당’(석주바당)이라 불렀고, 그 안쪽 양쪽으로 여가 있었으며 그 중 가운데 깊은 곳에 원담을 끼고 뱃길이 열려서 자연스레 포구의 여건을 갖췄는데 이 부분의 원담이 갯도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 모두가 추억을 부르는 그리운 명칭들입니다.


    (사진: 남또리물)


    이곳 여의 안쪽 바닷가에는 용천수인 ‘남또리물’이 있습니다. 여름에 밀물 때는 이곳에서 수영을 하며 놀았고, 썰물이 되면 차가운 용천수를 손바닥으로 떠서 마시고, 그 물에 짠물에 젖은 몸을 헹구기도 했습니다. 저의 고등학생 시절, 한여름에 며칠간 공동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파도에 의한 포구의 손상을 막기 위해 입구 쪽 바닷가를 메우고, 일부 파손된 원담도 보수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저도 부친 대신 참여해서 육지에서 큰 돌을 날라서 테우(제주식 뗏목)에 실은 후 포구 앞쪽 바닷가에 떨어뜨리는 작업을 했던 것입니다.
    한창 혈기 왕성할 때여서 무거운 돌을 들고 테우에 싣는 힘든 작업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하루는 바닷물에 젖은 테우가 미끄러워서 그만 큰 돌을 가슴에 안은 채 테우에서 바다로 떨어졌습니다.

    순간 돌이 테우에 걸린 채 저만 바다로 떨어지는 바람에 바위에 턱을 크게 부딪치며 정신이 아득해지는 충격을 받았는데, 결국 앞니 세 개가 금이 가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당시에는 시내에 가서 치료할 여건이 아니었기에 그대로 견디느라 몇 년 고생하다가 나중에야 시내 치과에서 치료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간혹 원담에 멜이 들면 온 동네 사람들이 서둘러 모여서 흥분된 마음으로 일제히 모여들어 멜을 잡던 기억 역시 여전히 생생합니다.
    그로부터 무려 4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동네 동창들과 술자리를 하던 자리에서 그 원담이 포구 개발이란 명목으로 2001년 경에 철거하여 그 원담을 포구 축조에 활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서운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도 앞니를 세 개나 상하면서 관리하던 그 원담을 철거했다니, 더욱이 그 지역이 이웃마을인 고내리에 속하게 되어 어릴 때에 우리 마을 사람들이 관리하던 포구 이름마저 이웃마을 지명으로 바뀌었다니 더욱 속상하였습니다. 과연 철거가 동네 개발에 도움을 주었을까? 오히려 그냥 두었을 때의 그 가치가 훨씬 더 크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고향 친구들에게 피력하며 철거를 주도한 당시 마을 이장의 근시안적 행정에 큰 실망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잠시 분노하는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잠시 짬을 내어 오랜만에 현장을 찾았더니 원담은 사라지고 포구의 방파제를 넓혀서 그 위로 관광객들이 구경하는 모습이었고, 남또리물은 시멘트로 넓게 둘러서 안내문을 설치해 둔 모습을 보며 답답한 마음 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보존하겠다고 시멘트로 둘렀는지 황당한 생각이 들었고, 덩치 큰 현무암 자연석 등 원형이 모두 사라진 곳은 시멘트 시설만 눈에 띄어 제 눈에는 이미 그 가치가 영원히 사라진 듯 싶었습니다. 이것은 보존이 아니라 완전 훼손이라는 만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복원이 될 수 없기에 영영 사라져 버린 그 원담과 남또리물의 원형이 마냥 그립습니다.


    8. 맺음말: 검은 돌담에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김동전 외, 『제주 해안마을 바다밧 이름과 생활사 조사 연구』(제주학연구 51, 제주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 2018)에 따르면,


    “‘원’은 돌 많은 섬에서 돌로 담을 쌓고 물길을 따라 밀려든 고기를 가둬놓고 잡는 ‘돌그물’이라 할 수 있다. 집어등을 밝히고 들망으로 먼바다에서부터 고기를 잡아버리는 어선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바닷가 마을의 원들은 원래의 몫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기떼가 몰려들지 않아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제주의 해안가에는 약 260여 개의 원담들이 산재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안 도로가 시원하게 뚫리고, 대형 어선들이 디젤 엔진 소리를 우렁차게 내뿜으며 먼바다로 내달리면서 원담은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습니다. 시멘트 해안 제방에 가로막혀 물길이 끊기거나, 관광지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포클레인에 밀려 허리가 잘려 나간 원담들도 있습니다. 다행히 원담의 가치를 재조명하며 복원을 시도하는 곳도 있고 이미 몇 곳은 복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기쁩니다. 한편 내 고향 마을의 원담도 하루빨리 복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집니다.

    물이 빠져나간 한적한 조간대 갯바위에 묵묵히 서서 바닷물을 품었다가 조용히 토해내는 그 검은 돌의 곡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구석이 숙연해집니다.

    바람을 이기려 하지 않고 구멍을 내어 바람을 흘려보낸 제주의 ‘돌담’처럼, 성난 파도를 정면으로 막아서지 않고 온몸으로 품어 안았던 탐라인들의 겸손한 물리학.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늘 결핍과 고립감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자연의 호흡에 발을 맞추고 이웃과 더불어 멸치 한 마리를 나누던 따뜻한 나눔의 터전인 원담. 그것은 자연과 인간이 맺은 가장 평화로운 계약이자 오늘날에도 여전히 거대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다음 제13회 글에서는 얕은 여밭을 넘나들며 자리돔을 뜨고 미역을 건져 올리던 제주 고유의 떼배, ‘테우’에 깃든 놀라운 부력의 원리와 공동체적 삶의 궤적을 짚어보는 시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제주오리진 (Jeju Origin)


    참고 자료

    * 현봉철, 「원담, 신이 내린 황금그물…공동체문화의 상징」(제주대학교 정광중 교수 인용), 『제주일보』, 2010년 1월 25일, https://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605630.

    * 이혜은·김지수·성효현·정광중·전영준 외, 「화산섬 환경에서 발달한 전통 농업 및 어업 경관: 제주도와 하와이의 비교 고찰」, 『대한지리학회지』 제55권 제3호, 대한지리학회, 2020, 343~362쪽.

    * 고광민, 『동아시아 원담조사보고서』, 제주문화예술재단, 2017.

    * 김동전 외, 『제주 해안마을 바다밧 이름과 생활사 조사 연구』(제주학연구 51), 제주특별자치도·제주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 2018.

    * 김상태, 「자연 지형을 이용해 돌담으로 고기를 잡는 제주의 원담」, 한국문화원연합회 지역N문화, https://ncms.nculture.org/stonecraft/story/6900.

    * 고영철, 「[향토문화] 마을 공동소유..행원리 아친개(갯담)」, 『제주환경일보』, 2017년 10월 25일, https://www.newsje.com/news/articleView.html?idxno=99859.

    * 조의환, 「[조의환의 제주스케치] 제주, 바다에도 ‘돌담’이 있다… 썰물 때 물고기 잡아 가두는 자연의 그물」, 『조선일보』, 2014년 7월 26일, https://www.chosun.com/.

    * 진선희, 「[제주섬 문화유산 다시읽기] (12)제주 원담」, 『한라일보』, 2007년 5월 4일, https://s1.ihalla.com/article.php?aid=1178204400238444156.


  • <제11회> 쿠로시오 난류와 화산섬: 탐라의 바닷길은 어떻게 열렸는가?

    부제: 농경의 한계를 넘어 거센 조류를 삶의 터전으로 바꾼 제주의 생명력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와 로컬의 깊은 가치를 전하는 블로그 ‘제주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지난 10회 에필로그에서는 화산섬 제주의 거칠고 아픈 눈물이 오랜 세월 현무암과 송이(Scoria)라는 천연 정수 필터를 거치며 세계 최고 수준의 명품 수질로 탄생한 지하수의 기적과, 사계절 내내 스스로 숨을 쉬며 제주의 허파 역할을 해온 <제주의 눈물이 만든 생명수, 지하수와 곶자왈의 미래 가치>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척박한 화산섬의 결핍을 거대한 생명의 보고로 품어 안은 제주의 대지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자연이 품은 경이로운 생명력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 주었지요.

    이제 ‘제주오리진’의 시선은 화산섬의 대지에서 섬을 에워싼 거친 바다로 향합니다. 탐라의 해양 개척사와 바다에 기대어 살아온 제주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제주는 흔히 대륙의 끝자락에 매달린 외로운 고립의 섬으로 인식되곤 합니다. 하지만 바다의 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제주는 거대한 문명이 교차하는 서태평양의 길목이자 바다를 삶의 무대로 삼았던 해양 문화의 산실이었습니다. 오늘 그 서막으로서 제주의 기후와 생태계를 빚어낸 거대한 해류 ‘쿠로시오 난류’의 실체와, 거센 조류와 태풍의 길목이라는 숙명 속에서 바닷길을 열어낸 제주 선인들의 반전 해양사를 지금 시작합니다.

    1. 신엄리 바닷가에서 바라보던 푸른 수평선과 파도의 기억


    어릴 적 제 고향인 제주 서북부의 해안가 애월읍 신엄리 앞바다에 서면, 유독 짙고 푸르다 못해 검은빛을 띠는 서슬 푸른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지곤 했습니다. 뺨을 스치는 여름바람은 유독 끈적하고 습했지만, 그 바닷물에 발을 담그면 육지의 차가운 계곡물과는 달리 묘하게 미지근하면서도 묵직한 온기가 온몸을 타고 흘렀습니다.

    하루는 거센 풍랑이 일어 파도가 해안가 절벽을 때리며 기세를 부리던 날, 북쪽 바다에서부터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의 행렬을 보며 어린 마음이지만 무서움보다는 “저 바다는 왜 이렇게 쉬지 않고 거칠게 움직일까? 저 물은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하고 사색에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그저 고향 바다의 거친 파도와 따뜻한 바람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훗날 바다의 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이 거친 물길이 실은 대양을 잇는 거대한 해류의 길목이자 옛 선인들이 동아시아를 넘나들던 소중한 바닷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2. 쿠로시오 난류와 화산섬: 아열대 생태계를 만든 따뜻한 바닷길


    제주의 온화한 기후와 독특한 자연환경을 결정짓는 가장 큰 바탕은 섬을 감싸고 도는 ‘쿠로시오 난류(Kuroshio Current)’입니다. 북적도 해류에서 시작해 필리핀과 대만을 거쳐 제주 남쪽 바다로 북상하는 이 해류는, 대서양의 멕시코 만류(걸프 해류)와 더불어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난류 시스템의 하나입니다.

    제주 바다로 밀려드는 쿠로시오 난류의 지류인 ‘대마난류(쓰시마난류)’와 ‘제주난류’는 관측 연구를 통해 보면 다음과 같은 뚜렷한 특징들을 드러냅니다.


    1) 평균 수온의 안정성

    한겨울에도 제주의 연안 수온은 13℃~15℃ 안팎의 높은 온도를 유지합니다. 이는 동위도의 육지 대륙 연안에 비해 최대 5℃ 이상 높은 수치입니다.


    2) 유속과 염도의 에너지

    쿠로시오 해류는 평균 폭이 약 100km에 달하며, 유속이 시속 4~7km로 매우 빠릅니다. 표층 염분 또한 34.5 psu(실용염분단위, 바닷물 1kg당 염류 약 34.5g 수준) 안팎을 유지합니다. 이는 강물이 섞여 묽어지는 주변 연안수와 달리, 태평양의 순수 외양 난류가 제주 바로 앞바다를 통과하며 대양 해류의 묵직한 밀도와 에너지를 고스란히 섬 전체에 전달한다는 징표입니다.

    이 바닷길의 실체는 국내 해양학 연구에서도 명확히 입증되었습니다. 1987년 《제주도연구》에 실린 해양학자 김구의 연구 논문에 따르면, 쿠로시오 계통의 고온·고염수는 제주도 서안을 10해리 폭의 좁은 띠 형태로 감싸 안으며 시계 방향으로 돌아 제주해협을 통과합니다. 제주 앞바다가 고립된 바다가 아니라, 동아시아 해역과 곧바로 이어지는 거대한 ‘해양 고속도로’의 본선 위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실측 증거입니다.

    또한 2006년 《한국해양환경공학회지》에 실린 장승민 연구팀의 논문에 따르면, 80여 년간 축적된 제주시 기온과 30년간의 해수면 온도 자료를 분석한 결과, 바다 수온 변동과 지상 기온 변동은 0.77이라는 매우 높은 양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며 한 몸처럼 움직였습니다.

    이처럼 따뜻하고 묵직한 해류가 머금은 엄청난 양의 열에너지가 제주의 대기를 상시 데워주기 때문에, 제주는 사방이 매서운 겨울바람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2회차에서 다룬 땅속이 얼지 않는 ‘월동재배의 요람’이자 한겨울에도 상록수가 푸르름을 잃지 않는 독특한 아열대성 마이크로 기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즉, 제주의 바다는 단순한 물덩어리가 아니라, 태평양의 온기를 섬 전체에 불어넣는 거대한 천연 보일러 배관인 셈입니다.


    3. 태풍의 길목과 거센 조류: 자연의 시련과 해양 진출의 필연성


    하지만 대자연의 축복에는 늘 그에 걸맞은 가혹한 대가가 따랐습니다. 제주는 매년 여름과 가을이면 북태평양을 건너 북상하는 태풍들이 고스란히 지나가는 최전선의 길목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난류에서 피어오르는 엄청난 수증기와 열기는 태풍을 더 거세게 키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료에는 거센 계절풍과 태풍에 수많은 배가 침몰하고 기근이 들어 구휼을 청하는 눈물겨운 상소문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지난 5회차에서 다루었듯, 제주의 ‘삼다’ 중 하나인 ‘여자가 많다(여다)’는 사실은 바다로 나간 남성들이 거친 풍랑에 휩쓸려 돌아오지 못해 섬에 여자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실체였으며 그 이유가 바로 이 사나운 바다와 바람의 혹독함에 있었습니다.

    제주의 바다가 험난했던 이유는 비단 태풍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섬을 둘러싼 해저 지형과 조류 역시 거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습니다. 차상철·문재홍 연구팀의 〈고해상도 해양순환모델을 활용한 제주도 주변해역의 해수유동 특성〉연구에 따르면, 제주 북동쪽과 남서쪽 해역의 100m가 넘는 해저 골을 따라 모슬포와 성산·구좌 연안에 시속 1노트가 넘는 강력한 왕복성 조류가 형성되며, 나아가 먼바다에 난류가 흐름에도 불구하고 제주 연근해 해수유동 에너지의 90% 이상을 바로 이 ‘조류’가 지배하고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실제 3차원 입자추적실험 결과, 북동쪽 세화 해역에서 유입된 표류물이 거센 썰물(낙조류)과 해저 지형의 영향으로 통상적인 해류 방향과 반대로 남하하여 가파도와 마라도 쪽으로 순식간에 휩쓸려가는 현상이 확인되었습니다.

    조류의 유속이 수치상으로는 평범해 보일지 모르나, 외해의 높은 파도와 해저 골이 맞부딪치는 데다 노를 젓는 인력선(평균 1~2노트)에 의지하던 시절에는 물때를 거스르는 순간 배를 순식간에 외해로 밀어내 조난으로 이끌기에 충분한 위협이었습니다.

    여기에 화산섬이라는 대지의 결핍이 더해졌습니다. 한국지구과학회지에 발표된 김성수 연구팀의 분석과 기상청 통계에 따르면, 제주의 연평균 강수량은 약 1,456mm로 전국 평균(1,279.6mm)보다 훨씬 많은 비가 내립니다. 하지만 아무리 비가 쏟아져도 물이 땅속으로 곧장 스며드는 다공질 화산토의 특성 탓에 농경을 이어갈 지표수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농토와 마실 물이 턱없이 부족했던 척박한 화산섬의 숙명, 그리고 사방을 가로막은 거친 바다. 제주 사람들에게 바다는 단순히 두려워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기필코 뛰어들어 길을 열어야만 했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4. 사료가 증명하는 탐라의 독자적 해양력과 해상 교역사


    제주인들은 이 가혹한 바다의 시련 앞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거친 물길을 깊이 이해하고 순응하며 역설적인 ‘해상 교역의 반전’을 이루어냈습니다. 해류의 흐름이 빠르고 계절풍이 뚜렷하다는 것은, 돛과 바람에 의지하던 고대 항해술의 관점에서 볼 때 배를 띄우기만 하면 한반도 남해안은 물론 중국 장강 하구와 일본 규슈 지역으로 빠르게 뻗어나갈 수 있는 ‘해상 고속도로의 교차로’에 서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육지의 지배층 시선에서 제주는 변방의 유배지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고대 동아시아의 기록들이 증명하는 제주의 위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중국의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에는 주호(州胡, 탐라)의 선조들이 가죽옷을 입고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반도 마한과 교역을 펼쳤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와 조선 시대 사료들을 추적해 보면, 탐라국은 사방이 바다로 열린 지정학적 이점을 완벽하게 활용하여 중국 당나라, 송나라, 그리고 일본과의 서태평양 삼각 해상 무역을 활발히 했던 독립적인 해양국가였습니다.


    1) 일본에서 당나라로 향할 때

    제주의 해상 교차로 역할은 7세기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격변 속에서 한층 더 선명하게 부각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규슈를 떠나 한반도 남해안과 서해안 연안을 따라 산둥반도로 건너가는 비교적 안전한 연안 항로인 ‘북로(北路)’를 주로 이용해 당나라와 통교했습니다. 연안의 지형과 섬을 시야에 두며 물과 식량을 보급받을 수 있어 조난 위험이 훨씬 적은 항로였습니다.

    그러나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던 왜의 수군이 나·당 연합군에 궤멸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국면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삼국통일 전후로 신라와의 외교 관계가 극도로 경색되자, 일본은 신라 연안을 지나는 안전한 서해 뱃길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일본은 한반도 연안을 완전히 우회하여, 육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거친 동중국해 외해를 곧장 가로지르는 목숨을 건 남쪽 항로인 ‘남로(南路)’를 개척해야만 했습니다. 이 남로는 사나운 풍랑과 강력한 쿠로시오 해류를 정면으로 뚫고 나가야 하는 험난한 사지(死地)의 뱃길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과정에서 제주의 지리적 가치가 자연스레 드러났습니다.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섬, 탐라(耽羅). 고대 동아시아의 바닷길을 헤쳐 가던 뱃사람들에게 이 섬과 섬 한가운데를 받치고 선 한라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사방이 물결뿐인 망망대해에서 1,947m의 거대한 산체는 그 자체로 생사의 방향을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점이었습니다.

    김동전 교수는 〈탐라국사의 전개와 이해 방향 모색〉(2025)에서 고대 탐라국이 동아시아 해상 네트워크 속에서 지녔던 위상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짚어냈습니다.

    “탐라국이 존재했던 고대사회는 그들의 활동무대가 한·중·일 동아시아세계였다. 특히, 탐라국은 동아시아 해양의 중심에 있었고, 탐라의 1950m 한라산은 동아시아 해상교통로의 이정표 역할을 했었다. 나아가 탐라는 남방문화와 북방문화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였다.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 지중해’라는 공간 설정 속에 동아시아적 관점에서의 역사 인식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나침반이 없거나 정밀하지 못했던 시절, 항해는 눈으로 육지와 섬을 확인하며 가는 ‘지형 식별 항법(시인거리 항법)’에 전적으로 의존했습니다. 맑은 날이면 동중국해 수십 마일 밖에서도 수평선 위로 한라산의 웅대한 실루엣이 먼저 눈에 들어왔으니, 목선 하나에 의지한 채 망망대해를 건너던 뱃사람들에게 한라산은 배의 침로를 교정해 주는 거대한 ‘천연의 등대(Landmark)’였던 셈입니다.


    2) 당나라에서 일본으로 귀국할 때

    이 바닷길은 일방통행로가 아니었습니다. 바람과 물길의 흐름이 바뀌는 계절의 섭리에 따라 동아시아의 배들은 제주를 중심으로 유연하게 오갔습니다.

    일반적인 교역선들은 여름철(6~8월) 동중국해를 가득 채우는 남서계절풍(마파람)을 등 뒤에 안고 돛을 올렸습니다. 북동쪽으로 솟구치는 대마난류의 흐름과 순풍을 탄 배들은 중국 장강 하구(양주·명주)를 떠나 제주 남쪽 해역을 거쳐 일본 규슈 방면으로 비교적 순조롭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반면,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서 외교 일정을 마치고 이듬해 여름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공식 사절단이나 견당사선들은 늦가을과 초겨울, 대륙에서 동쪽을 향해 거세게 불어 닥치는 북서 계절풍에 배를 띄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겨울철 동중국해는 바다의 회오리바람(선풍)과 사나운 풍랑이 끊이지 않는 위험한 바다였습니다.

    전은자 특별연구원은 《제주 표착과 제주인의 표류》(2013)에서, 겨울철 제주 해역에서 발생하는 표류의 가혹한 자연환경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표류의 빈도수는 태풍이 끝나지 않은 8월에서 영등 달인 2월까지가 집중되어 있다. 특히 겨울철 표류 사고는 겨울에 동해상에 불어 닥치는 북북서풍 때문에 일어난다. 전라도 해역에서 표류한 경우 대마도 남부와 고토(五島)에, 추자도, 사서도 등 제주해역에서 표류가 일어날 경우 규슈(九州)의 섬에 표착하게 된다.”

    이 거친 바다의 역학은 778년 11월, 당나라를 떠나 일본으로 귀국하던 견당사 선단의 4번째 배(제4선)에도 가혹하게 적용되었습니다. 늦가을 북서풍을 타고 규슈로 향하던 배는 사나운 풍랑에 휘말려 항로를 잃었고, 그 길목에 가로놓인 탐라 해역으로 밀려들어 표류하고 말았습니다.

    661년 견당사 표류 당시에는 탐라의 왕자 아파기(阿波伎)가 사절단을 구호해 직접 일본까지 호송하며 우호적인 국교를 텄지만, 백여 년 뒤인 778년의 탐라는 전혀 달랐습니다. 사절단의 물건을 낱낱이 빼앗고 일행을 억류해 버리는 거칠고 배타적인 독자 해양 세력의 얼굴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결국 일본 관리들은 밤을 틈타 배를 훔쳐 타고 탈출하는 목숨 건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이처럼 고대 동아시아 바닷길에서 한라산은 길을 밝혀주는 ‘천연의 등대’였지만, 그 발치에 펼쳐진 탐라의 해안선은 잘못 닿으면 목숨을 걸어야 했던 ‘공포의 바다’였습니다. 빛과 어둠, 이정표와 조난의 경계선에 바로 탐라가 서 있었던 것입니다.


    3) 제주와 한반도 내륙을 오갈 때:

    탐라인들과 육지의 배들은 계절풍의 교대를 철저히 활용했습니다. 봄과 여름에는 남쪽에서 불어오는 남서풍에 더해, 남쪽에서 북쪽 육지 방면으로 강하게 밀려드는 밀물(창조류)의 흐름을 타고 추자도를 거쳐 해남, 완도, 강진 등 한반도 서남해안으로 단숨에 치고 올라갔습니다.

    반대로 내륙에서 제주로 내려올 때는 늦가을과 겨울철 차갑게 내리꽂히는 북서계절풍(높하늬바람)을 등에 얹어 거센 제주해협을 가로질러 조천포(조천항)나 산지포(산지항, 현 제주항)로 안착했습니다.

    이처럼 고대 제주는 거친 난류를 건너던 뱃사람들에게 사나운 풍랑을 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소중한 피난처이자, 계절의 숨결에 따라 대륙과 해양을 잇는 바닷길의 방향을 가늠하게 해주던 고마운 길잡이였습니다. 육지의 눈에는 거친 바다에 갇힌 고립의 섬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대양의 시선에서 제주는 거대한 난류의 품에 안겨 동아시아의 바닷길을 묵묵히 잇고 소통했던 당당한 해양 문명의 한 축이었습니다.

    척박한 화산섬이라는 물리적 한계에 갇히지 않고, 섬을 둘러싼 거친 물길과 바람의 흐름을 읽어내며 바다를 삶과 교류의 넓은 무대로 바꾸어낸 선인들의 지혜와 끈질긴 생명력이 역사적 기록 속에서 선명하게 확인되는 대목입니다.


    5. 제주오리진(Jeju Origin)이 풀어주는 제주 해류와 해양사 FAQ


    독자분들이 제주의 거친 바다 환경과 역사에 대해 가장 궁금해하시는 점들을 명쾌하게 풀어드립니다.



    A. 쿠로시오(黑潮)라는 이름 자체가 ‘검은 조류’라는 뜻입니다.

    태양 빛(백색광)이 바다에 닿으면, 파장이 긴 붉은색 계열의 빛은 수심 5~10m 이내의 얕은 표층에서 물 분자에 빠르게 흡수되어 열에너지로 소멸합니다. 반면 파장이 짧고 에너지가 높은 푸른색 계열의 빛은 깊은 바닷속까지 투과하며 물 분자와 부딪혀 사방으로 산란됩니다.

    플랑크톤이나 부유 물질이 많은 일반 연안 바다는 이 미세 입자들이 빛을 백색·녹색으로 난반사하여 밝은 청록색이나 탁한 빛을 띱니다. 그러나 대양의 외양수인 쿠로시오 해류는 영양염과 부유 물질이 극히 적어 바닷물이 매우 투명합니다.


    즉, 얕은 표층에서 붉은빛이 먼저 소멸한 뒤, 불순물에 의한 난반사 없이 오직 물 분자가 깊은 바닷속에서 산란시키는 짙푸른 파란빛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이 빛이 깊은 심연의 그림자와 어우러져 위에서 내려다볼 때 짙은 코발트블루, 곧 ‘검은빛에 가까운 묵직한 남색’으로 보이게 됩니다. 역설적으로 바다가 불순물 없이 맑고 투명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A. 선조들은 계절에 따라 바뀌는 바람의 방향과 섬 주변을 흐르는 해류와 조류의 물길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중국과의 교역에서는 초여름에 불어오는 동풍과 남동풍의 결을 안고 거친 외해를 서쪽으로 가로질러 장강 하구 방면으로 건너갔고, 반대로 돌아올 때는 한여름 남서계절풍과 북동쪽으로 솟구치는 난류의 흐름을 등 뒤에 얹어 탐라로 수월하게 귀환했습니다.

    일본과의 교역 역시 철저히 계절의 순환을 따랐습니다. 늦가을과 겨울에는 차가운 북서계절풍을 타고 일본 규슈 방면으로 거침없이 뱃길을 열었고, 규슈에서 돌아올 때는 동풍과 남동풍의 순풍을 타고 서쪽으로 뱃길을 잡아 탐라로 안착했습니다.

    거친 파도와 역류에 무모하게 맞서는 대신, 목적지에 맞는 바람이 불어오고 물때가 열리는 ‘때(時)’를 침착하게 기다려 자연의 거대한 흐름에 배를 얹었던 ‘순응과 활용’의 지혜가 바로 천년 해상 교역을 가능케 한 비밀이었습니다.



    A. 과거 제주를 온화하게 감싸 안던 난류의 축복이, 최근 지구 온난화와 맞물려 점차 위기의 그림자로 바뀌고 있습니다. 적도의 과도한 열기를 품은 쿠로시오 해류의 중심축이 매년 북상하면서 제주 바다는 급격한 ‘아열대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 여파로 해녀들의 오랜 삶의 터전이었던 감태와 모자반 등 해조류 바다숲이 하얗게 녹아내리는 ‘바다 사막화(갯녹음)’가 심화되고, 아열대성 어종의 유입과 함께 토착 어종의 서식지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과거 척박한 섬을 품어주었던 바다의 온기가, 이제는 생태계의 균형을 뒤흔드는 기후위기의 최전선 경고등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해양 생태계의 거대한 위기인 동시에, 변화하는 바다 환경에 맞춰 전통 어업과 해양 연구가 새로운 생존 방식을 모색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던져줍니다. 자연이 건네준 해양 환경의 거대한 격변 앞에서, 우리가 바다와 맺어온 공존의 방식을 다시금 깊이 고민해야 할 엄중한 시점입니다.


    6. 글을 마치며: 당신의 삶을 뒤흔드는 거친 파도를 어떻게 마주하고 있나요?


    제주의 바다가 보여준 해양 문명의 서막은 거창한 정복의 기록이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난류의 압박과 잔인한 태풍의 길목이라는 지리적 결핍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오히려 그 거친 해류의 에너지를 대양을 향한 넓은 고속도로로 바꾸어 낸 상생과 반전의 역사였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인생이라는 거친 바다 위에서 예기치 못한 시련의 파도를 맞이하거나, 나를 뒤흔드는 환경적 태풍 앞에서 사방이 막힌 고립감을 느끼며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지는 않은지 가만히 돌아보게 됩니다. 내게 몰아치는 시련의 바람을 원망하며 장벽을 쌓기보다, 제주의 선조들이 거친 난류 위에 기꺼이 배를 띄웠듯 내 삶에 찾아온 풍랑의 흐름을 영리하게 타고 넘으며 나만의 영토를 세계로 확장해 나가는 단단한 삶의 뚝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지요?

    그런데, 이처럼 거친 난류의 바다 위에서 대양과 소통하던 제주 사람들이, 먼바다로 나아가기 전 가장 먼저 발을 디뎠던 연안의 경계, 즉 하루에 두 번씩 바다가 갈라지고 드러나는 거친 현무암 조간대(潮間帶) 지형에서는 또 어떤 경이로운 돌담의 물리학으로 자연의 선물을 수용했을까요?

    다음 12회에서는 달과 지구의 인력이 만들어낸 밀물과 썰물의 과학을 이용해 바다가 스스로 차려놓은 천연의 현무암 돌담 그물, <조석 간만의 물리학: 바다의 천연 그물 ‘원담(석방렴)’의 과학> 이야기를 품고 깊이 있는 로컬의 시선과 함께 여러분을 찾아오겠습니다.


    제주오리진(Jeju Origin)


    참고 자료

    * 김구 (1987). 〈濟州島 주변 海流에 관한 研究의 現在와 未來〉. 《濟州島研究》, 제4권. (쿠로시오 계통 고온·고염수의 제주해협 통과 실측치 인용).

    * 장승민·김상엽·김태윤 (2006). 〈제주도 기온과 주변해역 해수면 온도와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 《한국해양환경공학회지》, 제9권 제4호.

    * 차상철·문재홍 (2020). 〈고해상도 해양순환모델을 활용한 제주도 주변해역의 해수유동 특성〉. 《Ocean and Polar Research》, 제42권 제4호.

    * 김성수·김철수·김진섭 (2006). 〈제주지역 기온과 강수량의 기후 변동 특성〉. 《한국지구과학회지》, 제27권 제2호.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권30 동이전(東夷傳) 한(韓) 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제6 의자왕 조 (백제 부흥군 및 663년 백강 전투 기록).

    * 김동전 (2025). 〈탐라국사의 전개와 이해 방향 모색〉. 《한국학연구》, 제76집,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 전은자 (2013). 《제주 표착과 제주인의 표류》. 서귀포: 서귀포문화원.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6, 제명(齊明) 7년(661) 5월 23일 조 (기사명: 탐라왕자 아파기의 공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35, 보귀(寶龜) 9년(778) 11월 13일 조 (기사명: 견당사의 탐라도 억류).

    * 해양수산부 디지털소통팀 (2020). 〈똑똑한 바다 13편: 바다가 파랗게 보이는 이유 · 14편: 바다 색깔〉. 대한민국 해양수산부 공식 동영상뉴스.

    * 해양수산부 국립수산과학원 (2023). 《2023 수산분야 기후변화 영향 및 연구 보고서》. 국립수산과학원 기후변화연구과.


  • <제10회> 제주의 눈물이 만든 생명수, 지하수와 곶자왈의 미래 가치

    제주 지하수의 핵심 수원 함양지이자 원시 생태계를 간직한 울창한 곶자왈 숲과 화산 암반 풍혈 지대

    (그림: ai 생성)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와 로컬의 깊은 가치를 전하는 블로그 ‘제주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지난 9회에서는 거친 대자연의 불확실성과 내면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제주 선조들이 구축한 1만 8천 신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따뜻한 치유와 포용의 정신분석학적 미학을 나누었습니다. 시련을 적으로 삼지 않고 다정한 이웃으로 수용해 낸 제주의 정신은 현대인들의 고립된 마음에도 따뜻한 연대의 마중물이 되어주었지요.

    이제 우리는 지난 1회부터 9회까지 이어온 제주의 온도, 토양, 돌담, 정낭, 삼다, 음식, 옷, 언어, 신화의 위대한 지적 여정을 만나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모든 유형과 무형의 지혜들이 총망라되어 미래 인류에게 던지는 제주의 가장 깊은 심장부로 진입하려 합니다.

    바로 화산섬의 거칠고 아픈 눈물이 빚어낸 최고의 기적, ‘제주 지하수’와 제주의 숨겨진 허파 ‘곶자왈’이 품은 경이로운 수질 과학과 미래 자산으로서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물이 빠지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천연 필터의 수질 과학

    지질학적 관점에서 볼 때, 과거의 제주는 물 때문에 늘 눈물 흘려야 했던 ‘물이 귀한 섬’이었습니다. 한라산의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제주의 대지는 온통 구멍이 숭숭 뚫린 다공성 현무암과 화산재로 덮여 있어, 비가 아무리 많이 내려도 빗물이 대지 표면에 머물지 못하고 땅속으로 순식간에 쑥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육지처럼 강이나 시내가 발달하지 못해 늘 식수 부족에 시달려야 했던 환경은 제주인들의 오랜 고단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자연이 숨겨둔 반전의 타이밍은 땅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지표면을 뚫고 가라앉은 제주의 빗물은 거친 지하 암반층을 통과하며 수십 년에 걸친 위대한 ‘천연 암반 여과 공학’을 거치게 됩니다. 구멍 숭숭 뚫린 수많은 층의 현무암과 다공성 화산 쇄설물인 ‘송이(Scoria)’ 층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완벽한 ‘천연 정수 필터’ 역할을 수행한 것입니다.

    빗물이 어두운 현무암 틈새를 따라 1년에 불과 수 미터씩 천천히 하강하는 동안 오염물질은 자연 여과되고, 화산석에 풍부하게 함유된 바나듐, 실리카 등 인체에 유익한 천연 희귀 미네랄 성분들이 물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습니다. 과거 선조들에게 서러운 눈물이었던 ‘물이 빠지는 지형’이, 오늘날에 이르러 전 세계 어디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명품 생명수를 보관하는 거대한 천연 암반 탱크로 대반전을 이뤄냈습니다.


    2. 세계 유일의 생태계, 제주의 허파 ‘곶자왈’의 생태학

    곶자왈은 제주도 전체 면적의 약 6%(약 110 ㎢)에 불과하지만, 독특한 화산 지형 덕분에 생태적·수문학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제주의 핵심 자산입니다.

    제주의 생명수인 지하수를 품어 안는 최대 수원 함양지이자, 제주의 살아있는 허파가 바로 ‘곶자왈’입니다. 곶자왈은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을 이룬 암반 지대’를 뜻하는 제주 고유어로, 과거 농경 중심 사회에서는 돌무더기와 가시덤불 탓에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쓸모없는 황무지로 홀대받기도 했습니다.

    어릴 적 그 바위 틈새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면, 에어컨을 튼 것처럼 서늘하고 청량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 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바위 구멍마다 서려 있던 하얀 냉기와 맑은 공기, 그리고 바위틈 사이로 전해지던 시린 기운은 유년의 저에게 잊을 수 없는 자연의 생명력이었습니다.

    훗날 생태학의 눈으로 다시 만난 곶자왈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독보적인 식생의 보고였습니다. 다공성 화산 암괴(아아용암) 틈새의 ‘풍혈(風穴, 숨골)’이 사계절 내내 내부 온·습도를 조율하는 독특한 미기후(Microclimate)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이 천연 항온·항습 환경 덕분에 겨울에는 따뜻한 온기가 유지되어 남방계(열대·아열대) 식물이 겨울을 나고, 여름에는 시원한 냉기가 흘러 북방계(한대) 식물이 더위를 견뎌냅니다. 그 결과, 전혀 다른 두 기후대의 식생이 한 공간에서 공존하는 특별한 숲이 완성되었습니다.

    쏟아지는 빗물을 머금어 깨끗한 지하수로 내려보내고, 사시사철 푸른 산소를 뿜어내며 탄소를 흡수하는 곶자왈은 과거의 척박한 땅에서 오늘날 제주 생태계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지탱하는 가장 소중한 자연유산으로 그 가치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3. 숫자가 증명하는 미래 자산의 가치

    제주의 지하수와 곶자왈이 가진 가치는 환경적 정취를 넘어 객관적인 통계 데이터로 그 위상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1) 수문학적 가치

    제주특별자치도 통합물관리기본계획 및 지하수정보관리시스템의 물수지 분석에 따르면, 제주도에 내리는 20년 평균 연간 수문총량(약 40억 4,640만 ㎥) 중 무려 43.44%(약 17억 5,780만 ㎥/년)가 땅속으로 스며들어 거대한 천연 대수층을 형성합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등의 지질 연구에 따르면, 주요 함양지대인 중산간 지역(표고 200~600m)은 자갈 함량이 높고 점토가 적어 토양 내 투수속도가 일반 토양(0.5 cm/h)보다 수십 배 빠른 6.0~22.5 cm/h에 달해 빗물이 지표에 머물지 않고 즉시 지하로 유입되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에 국립산림과학원의 현장 모니터링 실측 결과, 곶자왈 지대는 빗물의 평균 41.9%(선흘 44.6%, 청수 39.2%)를 직접 흡수·저장하며 제주 전역의 물순환을 지탱하는 핵심 수원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2) 생태학적 가치

    국립산림과학원 조사에 따르면 곶자왈 지대에는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식물 9종과 희귀식물 88종을 포함해 총 1,039분류군의 식물과 법정보호 조류 11종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제주도 세계유산본부의 5개년 관측 결과, 곶자왈 내부의 연평균 기온은 13.5℃(제주 전체 평균보다 3.0℃ 낮음), 연평균 습도는 88.4%(13.8% 높음)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외부 기후변화 속에서도 일정한 온·습도를 유지하는 천연 완충 시스템 덕분에 남방계와 북방계 식물이 공존하는 거대한 생명 요람이자 기후 완충 지대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3) 생화학적 가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및 보건환경연구원의 수리지화학 분석에 따르면, 제주 지하수는 평균 pH 7.99의 약알칼리성을 띠며, 지층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평균 39.00 mg/L(최대 50.91 mg/L) 수준의 풍부한 천연 실리카(SiO₂)와 평균 12.0 ㎍/L(최대 71.0 ㎍/L)의 희귀 미네랄인 천연 바나듐(V)을 안정적으로 함유하고 있습니다. 육지부에서는 거의 검출되지 않는 바나듐은 제주 현무암의 고철질 광물과 오랜 시간 반응하며 자연 용출된 생리활성 성분입니다. 여기에 ‘제주삼다수 연령 및 함양특성 해석연구(2025)’에 따르면, 해발 1,450m 한라산 청정 고지대에서 함양된 물은 110여 회의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다공질 현무암과 천연 송이(Scoria) 층을 거치며 무려 31년 동안 천연 암반 여과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 오랜 여과 과정을 통해 불순물은 완벽히 걸러지고 필수 미네랄이 균형 있게 녹아들며, 이는 단순한 식수를 넘어 독보적인 천연 바이오 자산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합니다.


    4. 저주받은 척박한 변방이라는 해묵은 고정관념을 최종적으로 뒤집다

    물이 쉽게 빠져버려 농사를 짓지 못한다는 한계를 세계 최고 수준의 청정 지하수와 독보적인 곶자왈 생태계라는 축복으로 뒤집어낸 제주의 대지. 기후변화와 환경 오염으로 물 부족 문제가 심화되는 오늘날, 제주의 지하수와 곶자왈은 섬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생명선’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한라산 청정 고지대에서 시작해 곶자왈을 거쳐 31년의 긴 세월을 지나 완성된 이 물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 될 제주의 소중한 공공 생명 자산입니다.

    우리가 1회부터 10회까지 함께 목격해 온 제주의 모든 원형은 한 가지 거대한 진실을 향해 수렴합니다. 과거 우리가 맹목적으로 답습하던 ‘척박하고 살기 힘든 변방의 섬 제주’라는 말은, 이제 완전히 폐기되어야 마땅한 무지한 고정관념이라는 사실입니다.

    육지의 평평하고 기름진 흙과 벼농사의 잣대로만 바라보았을 때 제주는 분명 결핍과 고단함의 땅이 맞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주의 대자연과 선조들은 완전히 다른 방식의 위대한 축복을 증명해 냈습니다.

    온도가 너무 뜨겁거나 차가워지려 할 때 ‘맨도롱한 온도’로 삶의 밸런스를 잡았고, 물 빠짐이 심한 다공성 토양을 ‘겨울 월동재배의 요람’으로 뒤집었으며, 파괴적인 태풍 앞에서는 돌담에 구멍을 내어 ‘유체역학적 상생’을 이뤘습니다. 대문이 없는 ‘삼무의 신뢰’로 높은 담장을 대신했고, 돌과 바람의 가혹함 속에서 ‘삼다의 뚝심’으로 해녀라는 위대한 인류 유산을 피워냈습니다. 나아가 소금 없는 결핍을 ‘발효의 바이오 과학’(쉰다리·푸른콩장)으로 극복했고, 거친 무명을 ‘갈옷의 섬유물리학’으로, 고립된 언어를 ‘고대어의 타임캡슐’로, 자연의 공포를 ‘1만 8천 신화의 포용 미학’으로 대체해 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픈 눈물, 빗물을 모아 세계 최고의 ‘지하수 기적’을 완성했습니다.

    한계를 한계로 남겨두지 않고, 결핍이 생길 때마다 이를 인류 최고의 지혜와 과학적 반전으로 승화시켜 온 제주의 역사. 이제 제주의 진짜 원형(Origin)은 척박함의 상징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가 배우고 보존해야 할 가장 영리하고 가치 있는 ‘인류 상생과 반전의 위대한 요람’으로 당당하게 재정의 되어야 마땅합니다.


    5. 제주오리진(Jeju Origin)이 풀어주는 지하수와 곶자왈 FAQ

    독자분들이 제주의 수자원과 독특한 화산 숲에 대해 가장 궁금해하시는 점들을 명쾌하게 정리해 드립니다.


    A. 곶자왈을 이루는 바위들은 구멍이 많고 크기가 제각각인 현무암 덩어리들이 불규칙하게 쌓여 있는 구조입니다. 이 바위 틈새의 거대한 지하 공간은 대기 중의 공기를 머금고 있으며, 지하수와 암반이 지닌 일정한 온도(약 15℃ 내외)의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한여름에는 바깥보다 차가운 공기가 지상으로 뿜어져 나오고, 한겨울에는 영하의 칼바람을 막아주며 따뜻한 온기를 내보내어 숲 전체의 온도를 조율하는 ‘천연 대형 보일러 및 에어컨’ 역할을 수행합니다.


    A. 제주의 대지는 수만 년 동안 겹겹이 쌓인 화산암반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비가 내리면 지표면의 오염물질이 고일 틈도 없이 다공성 토양층에서 1차 차단되고, 지하 깊숙한 송이(Scoria) 층을 통과하며 미세먼지나 중금속, 유해 박테리아가 완벽하게 천연 필터링 됩니다. 수십 년간의 느린 여과 과정을 거치며 자연이 완벽하게 정수한 물이기에 오염으로부터 완벽히 보호된 세계 최고 수준의 청정 수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A. 곶자왈은 제주 도심과 주변부의 급격한 기온 상승을 억제하고 환경 변화를 완충하는 핵심적인 ‘천연 탄소 저장고이자 기후 완충 지대’ 역할을 수행합니다.

    ① 사계절 지속되는 높은 탄소 흡수 효율:

    곶자왈은 종가시나무(중요치 최대 84.8) 등 난대 상록활엽수가 상층부를 울창하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국립산림과학원 실측에 따르면 종가시나무의 연간 탄소 흡수량은 ha당 12.29 tCO₂로, 육지부 대표 수종인 중부지방 소나무(약 7.3 tCO₂/ha/yr) 대비 약 1.7배 높은 연간 흡수 능력을 발휘하며 겨울철에도 쉬지 않고 온실가스를 흡수합니다.

    ② 도내 최대 수준의 탄소 격리 자산:

    곶자왈 수종들은 단위면적(ha)당 최대 344.04 tCO₂(종가시나무 278.91, 동백나무 280.63, 붉가시나무 344.04 tCO₂/ha)에 이르는 막대한 양의 탄소를 목질부와 뿌리에 장기 고정하고 있어, 숲의 훼손 시 발생할 수 있는 대규모 탄소 배출을 막아줍니다.

    ③ 지역 열섬 완화와 항온·항습 미기후:

    제주도 세계유산본부의 5개년 실측 결과, 곶자왈 내부는 연평균 기온 13.5℃(제주 전체 평균보다 3.0℃ 낮음)와 습도 88.4%(13.8% 높음)를 안정적으로 유지합니다. 이 천연 항온 시스템이 주변 지역의 이상 고온과 급격한 건조화를 완충하여 난·한대성 식생이 공존하는 독보적인 생태계를 지켜냅니다.


    6. 새로운 여정의 시작: 우리 안의 ‘제주 원형’을 찾아가는 길

    1회차에서 만난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맨도롱한 온기’를 시작으로 토양, 돌담, 정낭, 삼다, 발효 음식, 갈옷, 제주어, 신화, 그리고 오늘 10회차의 ‘지하수와 곶자왈’까지. 제주오리진(Jeju Origin)이 디딘 첫 번째 발자국은 눈에 보이는 척박함을 위대한 풍요의 축복으로 반전해 낸 거대한 자연 과학과 인문학의 기록이었습니다.

    제주의 대지가 우리에게 건넨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삶을 가로막는 결핍과 시련이 들이칠 때,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마음에 유연한 숨구멍 하나를 내어주고, 아픈 눈물을 내면 깊은 곳에서 맑게 걸러내어 나만의 가장 귀한 미네랄 자산으로 숙성시키라는 응원입니다.


    ‘제주오리진’이 전하는 제주의 진짜 이야기는 이제 첫 장을 넘겼습니다. 화산섬의 대지와 자연이 품은 본질적인 지혜를 탐색한 첫 번째 여정(1~10회)에 이어, 다음 글부터는 이 단단하고 따뜻한 땅 위에서 수백 년간 삶의 역사와 독특한 풍속, 그리고 거친 해양 문명을 일구어온 ‘제주 사람들의 숨겨진 생활사와 문화적 비밀(11회~)’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이 걸어 들어가려 합니다.

    과연 제주의 선조들은 해양에 갇힌 섬이라는 한계를 헤치고, 어떤 교류를 통해 세계를 향해 확장해 나갔을까요?

    지치지 않는 뚝심으로 끊임없이 피어나는 제주의 무궁무진한 원형의 기록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더욱 깊이 있고 매혹적인 제주의 다음 이야기를 들고 곧 여러분을 찾아오겠습니다.


    제주오리진, (Jeju Origin)


    참고 자료


    * 김재훈 외 (국립산림과학원), 〈제주 곶자왈 산림의 물순환 특성에 따른 수원함양률 분석〉, 《한국환경과학회지》 31(12), 2022.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 통합물관리기본계획》 및 제주도 지하수정보관리시스템(GIS) 물수지 분석 데이터.

    *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제주지역 곶자왈, 연평균 기온 13.5℃ 유지 (최근 5개년 온·습도 관측 분석)〉, 제주특별자치도 공식 보도자료, 2023. 4. 6.

    * 고경석 외 (한국지질자원연구원·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주성분분석과 지구통계법을 이용한 제주도 지하수의 수리지화학 특성 연구〉, 《자원환경지질》 38(4), 2005.

    * 현익현·윤성택·김호림·감상규, 〈제주도 지하수 내 바나듐의 산출 특성〉, 《한국환경과학회지》 25(11), 2016.

    *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JPDC) 공식 웹사이트, 〈제주삼다수 물 연구소 – 지하수 수질 및 연대 연구 데이터〉.

    * 김형호·박은정·현화자·서연옥·박준형, 〈제주 곶자왈 지역의 식생구조 비교〉, 《농업생명과학연구》 54(4), 2020.

    * 손영모·김래현·강진택·이광수·김소원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지역 주요 4개 수종의 탄소배출계수 개발 및 적용〉, 《한국임학회지》 103(4), 2014.

    * 국립산림과학원, 《주요 산림수종의 표준 탄소흡수량》, 국립산림과학원 기후변화연구센터, 산림과학속보.


  • <제9회> 1만 8천 신(神)들의 고향: 제주 신화 속 ‘치유와 상생’의 비밀

    <제9회> 1만 8천 신(神)들의 고향: 제주 신화 속 ‘치유와 상생’의 비밀

    (그림: 애월읍 신엄리 삼정문(삼정려)과 신목(팽나무)의 수채화풍 삽화)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와 로컬의 깊은 가치를 전하는 블로그 ‘제주 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지난 제8회 글에서는 거센 섬바람 속에서도 15세기 중세 국어의 아래아(ㆍ)와 원형을 고스란히 지켜내며 살아있는 타임캡슐이 된 ‘제주어’의 언어학적 가치와 소멸 위기에 처한 현실을 나누었습니다. 변방의 고립이라는 지리적 한계를 독보적인 무형 자산으로 승화시킨 제주인들의 영혼의 언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말 한마디, 억양 하나에도 대자연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정서가 담겨 있듯, 제주 선조들은 사방에서 들이치는 거친 삶의 불확실성을 다스리기 위해서도 독창적인 정신세계를 창조했습니다.

    오늘은 언어적 원형을 넘어, 제주 사람들의 내면을 단단하게 지탱해 준 거대한 정신적 요람인 ‘제주 신화’ 속에 숨겨진 포용의 미학을 파헤쳐 보려 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신이 인간을 지배하고 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슬픔을 위로하고 공존해 온 1만 8천 신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현대인의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되는지 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지금 시작합니다.


    1. 폭풍 치는 밤의 조왕할망과 신엄리 삼정문(三旌門) 팽나무 아래서 배운 위로


    어릴 적 애월읍 신엄리 조부모님 댁에서 보낸 겨울밤, 유독 거센 서북 계절풍이 몰아쳐 집안 전체가 들썩이고 문창살이 덜컹거릴 때면 어린 마음에 덜컥 겁이 나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조모님께서는 저를 가만히 안아주시며 부엌 안쪽의 솥덕(화덕)을 향해 맑은 물 한 사발을 떠놓고 나지막이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집안의 가장 아늑한 온기를 품은 ‘조왕할망’에게 우리 가족의 안녕을 비는 정성 어린 손길이었습니다.

    바람이 잠잠해지면 마을 안길을 걸으며 마주하던 신엄리만의 독특한 풍경이 있었습니다. 마을 중심부 거대한 팽나무 아래에는 붉은 홍살문과 함께 조그만 기와지붕의 목조 건물인 ‘삼정문(三旌門 / 삼정려)’이 아담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곳은 조선 정조 때 효자 박계곤, 열녀 박씨부인, 그리고 신분을 넘어 지성을 다한 충비 고소락(高所樂) 세 분의 넋을 기리는 정려(旌閭) 공간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절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해마다 온 마을이 정성을 다해 제를 올리던 그 팽나무와 붉은 문의 경건한 고요함은 유년의 저에게 마을 전체를 든든하게 품어주는 거대한 안식처로 각인되었습니다.
    어릴 때 그 곳에서 어딘지 엄숙함을 느껴서 조부모님께 여쭈었더니, 세 분의 신이 모셔져 있고 그분들이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삼정려의 박계곤, 박씨부인, 고소락 역시 단순한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에게는 “마을을 수호하고 복을 내려주는 신령스러운 영혼(신)”으로 대체되어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조정에서 내린 ‘홍살문(유교)’과 마을의 ‘팽나무(무속)’가 한자리에 모여,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거대한 신화적 공간을 완성한 것입니다.

    어릴 적 그 삼정문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마음에 새겨졌던 경외감은 단순한 옛 풍습이 아니었습니다. 훗날 정신분석학과 종교인류학의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았을 때, 그것은 가혹한 자연의 두려움을 거룩한 질서와 수호의 이야기로 승화시켜 스스로를 치유해 낸 ‘제주만의 가장 지혜로운 정신적 방파제’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 1만 8천의 신: 가혹한 불확실성이 빚어낸 심리적 방어기제


    제주도를 일컫는 수많은 별칭 중 하나는 바로 ‘신들의 고향’입니다. 좁은 화산섬 안에 무려 1만 8천 분에 달하는 압도적인 숫자의 신들이 마을마다, 집안 구석구석마다 깃들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제주는 거센 태풍과 가뭄이 반복되는 척박한 화산토였고, 사방의 거친 바다는 언제 가족의 목숨을 앗아갈지 모르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대자연의 위협 앞에서 제주인들은 절망하는 대신, 자연의 모든 현상과 일상 공간에 ‘신(神)’의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바람과 바다, 돌과 대지는 물론 부엌(조왕신), 대문(문전신), 화장실(측신)에 이르기까지 인격을 부여하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현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고도의 ‘심리적 투사와 승화’입니다. 통제 불가능한 공포의 대상을 ‘말을 걸고 소통할 수 있는 인격적 존재’로 대체함으로써, 환경이 주는 근원적인 실존적 불안을 지혜롭게 다스리고 내면의 평화를 지켜낸 것입니다.


    [학술적 조망] 제주의 구비신화와 자연 숭배의 원형

    제주대학교 허남춘 명예교수는 그의 연구 「제주 서사무가에 담긴 과학과 철학적 사유 일고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기록신화가 다루는 시기를 높게 잡아도 5,000년 전이고, 한국의 고대국가 건설기의 신화도 3,000~2,000년을 넘지 않는다. 반면 구비신화의 전통은 장구하여 30,000~10,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중석기시대로부터 신석기 시대에 이르는 광대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구비서사시의 전통이 한국의 무가 속에 어느 정도 온전히 남아 전하고 있고, 제주도는 무속의 전통이 완강하기 때문에 다양한 구비서사시가 전승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전승되어 온 제주의 바람과 돌, 영등신화 등에 깃든 이야기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두려움과 경외의 공존 대상으로 바라보던 태고의 인류학적 사유를 온전히 품고 있습니다.


    3. 지배가 아닌 공존: 상생과 포용의 서사 구조


    제주 신화가 세계적인 신화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신과 인간의 대등하고 포용적인 관계성에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올림포스산 위에서 인간을 내려다보며 복종을 요구하고 징벌을 내리는 군림형 신들과 달리, 제주의 신들은 인간이 발을 딛고 선 가장 평평한 대지 위에서 함께 숨 쉽니다. 집안을 지키는 문전신과 조왕신, 생명을 점지하는 삼승할망, 마을을 돌보는 본향당 신들은 인간의 배고픔과 슬픔, 상처를 고스란히 공유하는 다정한 이웃이자 동반자입니다.

    또한 대륙의 건국신화가 주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강(天降)’ 화소인 반면, 삼성신화(고·양·부 삼신)를 비롯한 제주의 신들은 땅에서 솟아나는 ‘지중용출(地中湧出)’의 형태를 띱니다. 이는 지배자의 권위를 세우기보다, 대지와 식물의 생명력에 뿌리를 둔 농경·생태적 사유가 신화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주의 신화와 제의 문화는 외래의 이념인 유교조차 배척하지 않고 자신의 품 안에서 유연하게 융합했습니다. 필자의 고향인 애월읍 신엄리의 ‘삼정려(三旌閭)’가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조선 조정이 내린 유교적 표창(홍살문)이 제주의 신성한 ‘팽나무(신목)’ 아래 자리 잡으면서, 마을 사람들은 이를 단순한 충효 비각을 넘어 마을의 평안을 지켜주는 든든한 조상신적 수호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품어 안았습니다. 특히 양반 사대부뿐만 아니라 노비 신분이었던 충비 고소락(高所樂)까지 차별 없이 한 공간에서 당당히 기리고 기억하는 모습은, 억울한 약자를 신으로 품어 안았던 제주 본풀이(신화) 특유의 따뜻한 평등과 포용의 정신이 일상 유적에 고스란히 투영된 명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학술적 조망] 여성성과 생활과학, 그리고 역할 분담의 지혜

    허남춘 교수는 「제주 서사무가에 담긴 과학과 철학적 사유 일고찰」을 통해 제주 신화에 깃든 독창적 철학을 다음과 같이 분석합니다.


    여성 영웅과 생명력의 원형:

    거인 여성신 <설문대할망>의 천지창조와 지형형성 설화, 그리고 모계 중심의 당본풀이 계보(김녕 큰당 본풀이 등)는 부계 중심 사회 이전의 강력한 여성성과 생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역할 분담과 생활과학의 조화:

    <문전본풀이>에서 남편이 정낭(대문)신, 본처가 조왕(부엌)신, 첩이 변소신으로 좌정하는 구조는 차별이 아닌 음양의 역할 분담 논리이자, “부엌과 화장실은 멀수록 위생적이다”라는 지혜로운 생활과학 코드를 담고 있습니다.


    약자의 주체적 승리와 포용:

    <세경본풀이>의 ‘자청비’는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오곡 종자(특히 구황작물인 메밀)를 얻어 농경신이 되는 주체적 여성 영웅입니다. 제주 신화는 억울하게 고난을 겪은 약자가 연대와 지혜를 통해 도리어 신으로 좌정하는 포용과 치유의 서사를 보여줍니다.


    4. 숫자가 증명하는 무형의 자산 (문화 데이터)


    제주 신화의 위대함은 문학적 감상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명확한 문화적 지표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살아 숨 쉬는 구비 신화(본풀이)의 보고:

    활자로 박제된 기록 신화와 달리, 무당(심방)의 구송과 노래를 통해 수십 편의 대서사시가 원형 그대로 구전되는 전 세계적으로 드문 ‘살아있는 신화의 수도’입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봄마다 바다의 평안과 풍요를 비는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은 국가무형문화재를 넘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되며, 제주의 신화가 박물관 속 유물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공동체 축제임을 인정받았습니다.


    압도적인 신당(神堂)의 밀도:

    섬 전역에 400여 곳의 본향당 등 신당 터가 보존되어 있어, 거목·바위 등 자연물과 신화 서사가 결합한 세계 최고 수준의 ‘생태·인문학적 밀도’를 자랑합니다.


    5. 제주 오리진(Jeju Origin)이 풀어주는 제주 신화 FAQ

    Q1. 제주의 ‘본향당’은 육지의 서낭당과 어떻게 다른가요?

    A. 육지의 서낭당이 주로 마을 입구에서 액운을 막는 ‘경계의 신’ 역할을 했다면, 제주의 ‘본향당’은 마을 주민 개개인의 호적과 생사화복, 농경과 어로의 안전까지 관장하는 ‘로컬 자치 복지관’에 가깝습니다. 당신(堂神)이 주민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두고 돌본다고 믿었기에, 당을 찾는 행위는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 숭고한 연대 의식이었습니다.


    Q2. 제주 신화의 대표 여신 ‘자청비’와 ‘오늘이’는 어떤 존재인가요?

    A. <세경본풀이>의 자청비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여 지상에 곡식의 씨앗을 전해준 당당한 ‘농경의 여신’입니다. <원천강본풀이>의 오늘이는 고아로 자라났으나 사계를 관장하는 신비로운 원천강을 찾아 여정을 떠나고, 만나는 이들의 아픔을 해결해 주며 마침내 ‘시간과 계절의 여신’이 됩니다. 두 여신 모두 결핍과 고난을 주체적으로 극복해 낸 제주 여성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Q3. 집안 곳곳에 신이 산다는 ‘가택신 신화’는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A. 제주인들은 문전신, 조왕신, 측신 등이 집안 공간을 조화롭게 나누어 쓰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문 하나를 고치거나 마당을 파낼 때도 신의 노여움을 사서 재앙을 입는 ‘동티’를 막기 위해 자연의 순리를 살피고 조심했습니다. 이는 내 주변의 모든 공간과 사물을 경외하며 정갈하게 가꾸던 선조들의 뛰어난 ‘환경 생태학적 생활 태도’였습니다.


    6. 미신이라는 편견을 넘어: 현대인을 치유하는 인문학의 요람


    근대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제주의 당문화와 신화는 한때 ‘비과학적인 미신’이라는 왜곡된 시선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서구식 합리주의와 거대 종교의 잣대를 걷어내고 바라본 제주의 신화는, 가혹한 자연재해와 고립 속에서 인간 내면의 트라우마를 스스로 치유(카타르시스)하고 이웃과 연대하도록 이끌어 준 가장 완벽한 ‘마음 치유 시스템’이었습니다.

    척박한 변방의 불안을 상생과 포용의 세계관으로 승화시킨 제주의 신화는, 이제 결핍의 부산물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각자도생과 고립을 치유할 대한민국 최고의 ‘인문·정신분석학의 요람’으로 재평가받아야 마땅합니다.


    7. 글을 마치며: 내 안의 불안을 경외하고, 타인을 품어줄 시간


    인생을 걷다 보면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친 시련을 마주하거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으로 마음이 얼어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제주의 1만 8천 신들은 우리에게 따뜻한 지혜를 건넵니다. 불안과 시련을 무조건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해 싸우려 들지 말고, 그 불안에 다정한 이름을 붙여주어 내 삶의 일부로 유연하게 품어 안고 공존하라고 말입니다.

    오늘 하루, 거친 세상의 불확실성 속에서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면 가장 낮은 대지 위에서 인간을 위로하던 제주의 다정한 신들을 떠올려 보시는 건 어떨까요? 외부의 압박 속에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고, 곁의 이웃과 따뜻한 연대의 온기를 나누는 편안하고 ‘맨도롱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이야기 예고:

    말 한마디, 신화 한 자락에도 자연에 대한 깊은 경외를 담아냈던 제주. 다음 제10회 글에서는 화산섬의 거친 눈물이 빚어낸 생명의 기적이자, 사계절 내내 푸른 숨을 뿜어내는 제주의 심장이자 허파, <‘제주 지하수와 곶자왈’이 인류에게 건네는 미래의 유산>을 찾아 떠납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제주오리진 (Jeju Origin)


    참고 자료

    * 허남춘, 「제주 서사무가에 담긴 과학과 철학적 사유 일고찰 : 일반신본풀이를 중심으로」, 『국어국문학』 제148호, 국어국문학회, 2008.

    * 허남춘, 「제주도 본풀이의 원시·고대·중세 서사시적 특징과 변모」, 『한국고전문학연구』, 한국고전문학회, 2005.

    * 제주학연구센터 제주학 아카이브, 「효자 박계곤 정려문(효자 박계곤지려)」, 애월읍 신엄리 삼정려 관련 향토 기록.

    * 유네스코(UNESCO)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제주칠머리당영등굿 (Jeju Chilmeoridang Yeongdeunggut)」.

    (https://ich.unesco.org/en/RL/jeju-chilmeoridang-yeongdeunggut-00187)


  • 제2회 [찐 토박이의 제주어 배우기]: 길을 물어볼 때에

    제주도 해안 돌담이 있는 올레길에서 현지 어르신이 여행자에게 손을 뻗어 길을 가리켜 주는 모습

    (그림: ai 생성)


    지난 1회의 글에서 배운 ‘제주어’ 인사말 어떠셨나요? 표준어와는 너무나 달라서 외국어보다 어렵진 않았나요?

    [찐 토박이의 제주어 배우기]가 전하는 오늘의 제주어는 바닷가 올레길을 걷다가 만난 이에게 길을 물어보는 때의 말을 준비했습니다.


    1. 오늘의 제주어: 예문과 표준어 번역

    < 예 문 >
    제주어 <길을 가다가 물어볼 때에>

    양! 삼춘!

    ᄒᆞ꼼 여쭈어보쿠다
    ᄒᆞᆫ곡지 여쭤보쿠다.
    뭐 ᄒᆞ꼼 물어보쿠다.  

    뭐 ᄒᆞ꼼 여쭤봐도 되쿠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되쿠강?
    ᄒᆞ꼼 여쭤봐도 되카마씸?
    ᄒᆞᆫ곡지 물어봐도 되카마씸?  

    질 좀 ᄀᆞᆯ아 줍서.
    질 좀 ᄀᆞ리쳐 줍서.

    <대답에 감사 인사드릴 때>  
    고맙수다.
    하영 고맙수다.
    무지 감사하우다.
    번 역<길을 가다가 물어볼 때에>

    저기요! 삼촌(할머니/아주머니)!

    조금 여쭈어보겠습니다.
    한마디 여쭈어보겠습니다.
    뭐 조금 물어보겠습니다.  

    뭐 조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조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한마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길 좀 말해 주십시오.
    길 좀 가리켜 주십시오.  

    <대답에 감사 인사드릴 때>

    고맙습니다.
    많이 고맙습니다.
    무척 감사합니다.


    2. 주요 어휘 및 사용법 설명


    1) 주요 어휘의 발음

    ⬛ ᄒᆞ꼼 (호꼼, 하꼼, 허꼼)
    ⬛ ᄒᆞᆫ곡지 (혼곡지, 한곡지)
    ⬛ ᄀᆞᆯ아 (골아)
    ⬛ ᄀᆞ리쳐 (고리쳐, 가리쳐, 거리쳐)

    ※ 안내: 박스 안의 어휘는 제주어 옛한글 원형입니다. ( ) 안의 표기는 발음을 이해하기 위해 현대 발음 표기를 사용합니다.


    2) 어휘 해설

    <양! 삼춘!>
    (해석: 저기요/여보세요! 할머니/아주머니!)

    ⬛ 양: <감탄사> 예. 존대할 자리에 재차 묻는 말.

      ⬥ 어른이 아이를 부르거나 같은 또래끼리 서로 부를 때의 ‘야’에 해당하는 존대말.  

      ⬥ 참고: 문장에서는 ‘저기요’, ‘여보세요’, ‘잠깐만요’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

      * 예문: 양~!, ᄒᆞ꼼만 기다려 줍서. ➔ 해석: 저기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 삼춘: 삼촌 (해석: 이 문장에서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처음 만나서 존대를 하는 뜻으로 쓰임)
      ⬥ 삼춘: <명사> 삼촌. 부모의 형제. (참고: 제주에서는 자기의 부모 또래의 어른들에게 ‘삼춘’ 또는 ‘삼촌’이라고 다정한 의미로 부름).

    <ᄒᆞ꼼 여쭈어보쿠다>
    (해석: 조금만 여쭈어보겠습니다)

    ⬛ ᄒᆞ꼼:<부사> 아주 자그만큼. (= ᄒᆞᄊᆞᆯ)
      ⬥ ᄒᆞ꼼만: <부사> 아주 조금만 (= ᄒᆞ쏠)

      ⬥ ᄒᆞ꼼썩: <부사> 아주 조금씩 (= ᄒᆞ꼼식, ᄒᆞᄊᆞᆯ썩, ᄒᆞᄊᆞᆯ씩)
      ⬥ ᄒᆞ꼼ᄒᆞ민: <부사> ① 그저 약간하면, ② 무슨 일이 조금만 있으면. (=ᄒᆞᄊᆞᆯᄒᆞ민)
      ⬥ ᄒᆞ끌락ᄒᆞ다: <형용사> 아주 작다.

    ⬛ 여쭈어보쿠다: 여쭈어보다 + -쿠다. ➔ 해석: 여쭈어보겠다 (‘물어보겠다’의 높임말.)

      ⬥ -쿠다: <어미> -겠습니다. 용언 어간이나 또는 어간에 연결되어서, ‘합쇼’ 할 자리에서 화자의 의도ㆍ추측을 나타내는 종결어미.

      * 예문: 학교에 가쿠다. ➔ 해석: 학교에 가겠습니다.

     

    <ᄒᆞᆫ곡지 여쭈어보쿠다.>
    (해석: 한마디 여쭈어보겠습니다.)

    ⬛ ᄒᆞᆫ곡지: <명사> 말(言) 등의 한마디.

    <뭐 ᄒᆞ꼼 물어보쿠다> (뭐 좀 물어보겠습니다)

    ⬛ 뭐: <대명사> ‘무어’의 준말.

    ⬛ ᄒᆞ꼼:<부사>아주 자그만큼. (= ᄒᆞᄊᆞᆯ) (※ 앞의 설명 참조) 

    ⬛ 물어보쿠다: 물어보다 + -쿠다. (해석: 물어보겠습니다)

    <뭐 ᄒᆞ꼼 여쭤봐도 되쿠가?>
    (해석: 뭐 조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 하나 물어봐도 되쿠강?>
    (해석: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뭐: <대명사> ‘무어’의 준말.

    ⬛ ᄒᆞ꼼:<부사>아주 자그만큼. (= ᄒᆞᄊᆞᆯ) (※ 앞의 설명 참조)
    ⬛ 여쭤봐도: 여쭈어보아도. (‘물어보아도’의 존대말)

    ⬛ 되쿠가?: 되(다) + -쿠가. (해석: 되겠습니까?)

      ⬥ -쿠가: <어미> -겠습니까. ‘합쇼’ 할 자리에서 용언 어간이나 일부 어미 뒤에 붙어, 상대방의 의도나 추측을 묻는 뜻을 나타내는 종결어미. (= -쿠강, -쿠과.)
    ⬛ 하나: 한가지. 한마디
    ⬛ 물어봐도: 물어보아도.

    ⬛ 되쿠강?: = 되쿠가? = 되쿠과?


    <ᄒᆞ꼼 여쭤봐도 되카마씸?>
    (해석: 조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ᄒᆞᆫ곡지 물어봐도 되카마씸?>
    (해석: 한마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되카마씸: ① 되다 + -카 + -마씸 ② 되다 + -카마씸 (해석: 되겠습니까?, 될까요?)
      ⬥ 되다: <동사>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가능하게 되다. 또는 허용되다.
      ⬥ -카: <어미> -ㄹ까. 받침 없는 용언 어간이나 어미 뒤에 붙어서, ‘하게’ 할 자리에서 상대방의 의도나 추측을 묻는 뜻을 나타내는 종결어미. 어간이나 어미에 연결되기에 따라서 ① 미래·추측·의문, ②진행. ③완료, ④의도 등을 나타냄.
      ⬥ -카마씸: <어미> 받침 없는 용언 어간에 붙어서, ‘합쇼’ 할 자리에서 그 의도ㆍ추측을 묻는 뜻을 나타내는 어미.
      * 예문: 우리 좀 쉬카마씸? ➔ 해석: 우리 좀 쉴까요?
      ⬥ 마씸: <접미사> 서술어미 뒤에 덧붙여 존대를 나타내는 첨사. (= 마씀, 마슴, 마시, 마심, 마씨)


    <질 좀 ᄀᆞᆯ아 줍서>
    (해석: 길 좀 말해 주십시오)

    <질 좀 ᄀᆞ리쳐 줍서>
    (해석: 길 좀 가리켜 주십시오)

    ⬛ 질: <명사> 길(路). (=질레)
      * 예문: 질이(= 질레가) 좁구나. ➔ 해석: 길이 좁구나.
    ⬛ ᄀᆞᆯ아 줍서: ᄀᆞᆯ아 주다 + -ㅂ서 (해석: 말해주십시오)

      ⬥ ᄀᆞᆯ아 주다: 말해 주다.

      ⬥ ᄀᆞᆯ다: <동사> 말하다. (= ᄀᆞᆮ다)

      * 예문: 아멩 ᄀᆞᆯ아줘도 ᄒᆞᆷ치 모를 거여. ➔ 해석: 아무리 말해줘도 전혀 모를 거야.
      * 예문: ᄀᆞᆮ단 보난 내가 지첨쩌. ➔ 해석: 말하다 보니 내가 지치네.

      ⬥ -ㅂ서: <어미> -ㅂ쇼. ‘합쇼’ 할 자리에서 모음으로 끝난 동사 어간이나 일부 어미 뒤에 붙어, 그 행동하기를 바라는 대자존대(對者尊待)의 명령법 어미.

      * 예문: 그 일은 이렇게 처리합서. ➔ 해석: 그 일은 이렇게 처리하십시오.
    ⬛ ᄀᆞ리쳐 줍서: ᄀᆞ리치다 + -어 + 주다 + -ㅂ서. (ᄀᆞ리쳐주다 + -ㅂ서)
    ⬛ ᄀᆞ리치다: <동사> 가리키다. 손가락 따위로 어떤 방향이나 대상을 집어서 보이거나 말하거나 알리다.


    <고맙수다>
    (해석: 고맙습니다)

    ⬛ 고맙수다: 고맙(다) + -아ㅅ- + -우다 (뜻: 고맙습니다.)
      ⬥ 고맙다: <형용사> 고맙다.

      ⬥ -아ㅅ-: <선어말> -아 있-. 양성모음의 용언 어간에 붙어서, 그 ‘동작이 끝나 있음’ 또는 그 ‘상태가 되어 있음’이란 뜻을 나타내는 선어말어미 (= -아시-)

      ⬥ -우다: <어미> -ㅂ니다. 받침 없는 체언이나 형용사 ‘아니다’의 어간에 붙어서, ‘합쇼’ 할 자리에서 ‘-ㅂ니다’의 뜻으로 쓰이는 종결어미. (정중하게 높여서 말할 때 쓰는 존대어.)
      * 예: 그림이우다 = 그림이다 + -우다 (뜻: 그림입니다.)
      * 예: 만났수다 = 만나다 + -아ㅅ- + -우다 (뜻: 만났습니다.)


    <하영 고맙수다>
    (해석: 많이 고맙습니다)

    <무지 감사하우다>
    해석: (무척 감사합니다)

    ⬛ 하영: <부사> 많이(多). (= 만히)
      * 예문: 밥 하영 먹으라. ➔ 해석: 밥 많이 먹어라.
      * 참고: ‘하영’의 반대말은 ‘ᄒᆞ꼼, ᄒᆞ쏠‘

    ⬛ 무지: <부사> 보통보다 훨씬 정도에 지나치게.

    ⬛ 감사하우다: 감사하다 + -우다. (해석: 감사합니다.)


    3. 마무리: 토박이의 한마디

    오늘 소개해 드린 제주어 예문, 어떠셨나요?

    오늘은 제주의 올레길을 걷다가 만난 ‘삼춘’에게 길을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제주에 오신다면, 제주의 올레길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정겨운 제주 풍경을 천천히 즐기며 걷다가 만난 사람에게 오늘 배운 제주어 한마디로 길을 묻는 것은 어떨까요?

    계속하여 [찐 토박이의 제주어 배우기]와 함께 제주어를 익혀 보시면 이런 추억도 맛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글

    ① 제주의 전통 문화를 찾아서 찐 토박이의 시선으로 풀어 보는 [제주 이야기]
    ② [찐 토박이의 제주어]


    제주 오리진(Jeju Origin)


    참고 자료

    * 『개정 증보 제주어사전』 (제주특별자치도, 2009)
    * 『제주어대사전 제주어왓 (시험 운영 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학연구센터)

    * 『우리말 샘(우리말 사전)』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국어원)
    * 네이버 국어사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네이버 국어사전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 제4회 [찐 토박이의 제주어]: 올레 바깥디 ᄒᆞᆫ어의 강 완 보난 (올레 밖에 잠깐 다녀와 보니)

    (그림: ai 생성)

    지난 3회까지의 글에서 본 ‘제주어’, 어떠셨나요? 표준어와는 너무나 달라서 외국어보다 어렵진 않았나요?

    [찐 토박이의 제주어]가 전하는 오늘의 제주어는 제주 사람들의 ‘연대와 상생’의 의식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이웃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크게 화를 내기 보다 자신의 실수를 탓하며 상대방에게 가볍게 주의를 청하는 말을 준비했습니다.


    1. 오늘의 제주어: 예문과 표준어 번역

    < 예 문 >
    제주어마당에 날레 널엉 나뒁그네
    올레 바깥디 ᄒᆞᆫ어의 강 완 보난,
    삼춘네 쉐가 들언 ᄆᆞᆫ딱 허우대겨 부럼선게마씸.
    거 보난 자락 북부기 뒈싸졌수게.
    나도 멩심ᄒᆞ영 정낭 질러뒁 뎅겨사주마는,
    삼춘도 ᄒᆞ쏠 멩심ᄒᆞ영 쉐 잘 매놔사쿠다.
    번 역마당에 곡식을(말리려고) 널어 두고서
    골목 밖에 잠시 나갔다 와서 보니까,
    아저씨네 소가 와서 몽땅 엉망으로 휘젓고 있더라고요.
    그걸 보니까 속이 확 뒤집어졌잖아요.
    나도 명심해서 정낭을 꽂아두고 갔어야 했었지만,
    아저씨도 조금 명심해서 소를 잘 매어두어야 되겠어요.

    ※ 안내: 박스 안의 어휘는 제주어 옛한글 원형입니다.


    2. 주요 어휘 및 사용법 설명


    1) 주요 어휘의 발음

    ⬛ ᄆᆞᆫ딱 (몬딱)⬛ ᄒᆞ쏠 (호쏠)
    ⬛ ᄒᆞ영 (호영, 하영, 허영) 

    ※ 안내: 박스 안의 어휘는 제주어 옛한글 원형입니다. ( ) 안의 표기는 발음을 이해하기 위해 현대 발음 표기를 사용합니다.


    2) 어휘 해설

    마당에 날레 널엉 나뒁그네

    ⬛ 날레: <명사> 볕을 쐬기 위하여 멍석에 널어놓은 곡식. (예문에서는 ‘날레를’에서 <조사> ‘를’이 생략된 형태임).

    ⬛ 널엉: 널어 + -ㅇ. (뜻: 널어서).
      * 널다: <동사> 널다. 볕을 쬐거나 또는 드러내 보이려고 펼쳐 놓다.
      * -ㅇ: <연결어미> 용언 어간이나 어미 뒤에 붙어 앞선 동작이 지나거나 연속됨을 나타내는 연결어미(‘-서’의 뜻).

    ⬛ 놔뒁그네: 나두다 + -앙/엉 + -그네. (➔ 놔두어 + -그네 ➔ 나뒁그네).

    (해석: 놔두고 나서, 놓아두어서).

      * 놔두다: <동사> 놓아두다, 놔두다.

      * -그네: <어미> 동작의 완료 후 다음 동작으로 이어짐을 나타내는 연결어미 (-하고 나서, -서).
      ⬥ 예문: 나 밥 먹엉그네 곧 가키여. ➔ 번역: 나 밥 먹고 나서 곧 갈께).


    올레 바깥디 ᄒᆞᆫ어의 강 완 보난

    ■ 올레: 올레. (해석: 예문에서는 ‘올레의’에서 <조사> ‘의’가 생략된 것임),

      * 올레: <명사> 큰길에서 집 대문(정낭)까지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

    ■ 바깥디: 바깥 + 디. (해석: 바깥에, 밖에).

      * 바깥: <명사> 바깥, 밖.
      * 디: <조사> 부사격 조사 (바깥에/바깥으로). (= 듸),
      ⬥ 예문: 이녁 사는 디 어디라? ➔ 번역: 네가 사는 곳은 어디인가?
    ■ ᄒᆞᆫ어의: <명사> 잠깐 사이.
      ⬥ 예문: ᄌᆞ냑 전에 ᄒᆞᆫ어이 놀당 오쿠다. ➔ 해석: 저녁 전에 잠깐 놀다 오겠습니다). (= ᄒᆞᆫ숨, ᄒᆞᆫ시).
    ■ 강: 가다 + -앙. (뜻: 가서).

      * 가다: <동사> 가다.

      * -앙: <어미> 연결어미 (-해서, -하여).

      ⬥ 예문: 여기 왕 밥 먹으라. 번역: 여기 와서 밥 먹어라.

    ■ 완: 오다 + -아 + -ㄴ. (오아 ➔ 와 ➔ 완) (해석: 와서).

      * 오다: <동사> 오다.

      * -아: <어미> 양성모음 어간에 붙어 부사형을 이루는 어미.

      * -ㄴ: <어미> 용언 뒤에 붙어 앞서 일어난 동작을 나타내는 연결어미.

    ■ 보난: 보다 + -난. (해석: 보니까, 보니).

      * 보다: <동사> 보다.

      * -난: <어미> 이유나 상태의 확인을 나타내는 연결어미 (-니까, -고 보니).


    삼춘네 쉐가 들언 ᄆᆞᆫ딱 허우대겨 부럼선게마씸

    ⬛ 삼춘네: 삼춘 + 네. (해석: 삼촌네, 이 문장에서는 ‘이웃집 어른’, 아저씨 또는 아주머니를 뜻함.)
      * 삼춘: <명사> 삼촌. 부모의 형제. (참고: 제주에서는 자기의 부모 또래의 어른들에게 ‘삼춘’ 또는 ‘삼촌’이라고 다정한 의미로 부름).

      * -네: <접미사> 일부 대명사 뒤에 붙어 ‘집안’, ‘무리’, ‘들’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 쉐가: 쉐 + -가. (해석: 소가)

      * 쉐: <명사> 소(牛).

      * 가: <조사> 주격 조사.

    ⬛ 들언: 들다 + -언. (해석: 들어가서, 침범해서).

      * 들다: <동사> (남의 밭이나 구역에) 들어가다, 침범하다.

      * -언: <어미> 연결어미. ‘-고’, ‘-하여’, ‘-해서’.
      ⬥ 예문: 밥 먹언 보난 ➔ 해석: 밥을 먹고 보니.
    ⬛ ᄆᆞᆫ딱: <부사> 모두. (= 멘딱, 모도, 모두, 모신딱이, 문짝, ᄆᆞᆫ, ᄆᆞᆫ짝)

    ⬛ 허우대겨 부럼선게마씸: 허우대기다 + -여 + 불다 + -엄ㅅ + -언게(-엉게) + 마씸 (해석: 어지럽게 짓밟아 놓아 버리고 있더라고. 엉망으로 헝클어 놓아 버리고 있더라고요.)
      ※ 참고: ‘부럼선게’는 ‘불엄선게’에서 어간 받침 ‘ㄹ’이 탈락한 구어체 발음 형태임.
      * 허우대기다: <동사> (곡식·풀 등을) 어지럽게 짓밟아 놓다, 짚이나 풀 따위를 헝클어 놓다. (참고: 제주어사전에 수록되지 않았으나, 어르신들이 자주 사용하시던 생활 어휘)
      * -여: <어미> ‘ᄒᆞ다’ 동사나 용언 어간 뒤에 붙어 부사형을 만드는 어미.
      * 불다: <동사> (보조동사)-아/어/여 버리다. (앞말의 행동이 이미 끝났거나 이루어진 결과, 말하는 이가 아쉬운 감정이 남았음을 나타냄).
      * -엄ㅅ-: <선어말어미> -고 있-. 그 ‘동작을 계속하고 있는’이란 뜻을 나타내는 선어말어미. (= 엄시-).

      * -언게(-엉게): <어미> -던데. (과거에 사실을 회상하여 그 상대방도 긍정하게끔 나타내는 종결어미. = -엉게).
      * 마씸: <접미사> 서술어미 뒤에 덧붙여 존대를 나타내는 첨사. (= 마씀, 마슴, 마시, 마심, 마씨).


    거 보난 자락 북부기 뒈싸졌수게

    ⬛ 거 보난: 거 보(다) + -난. (해석: 그거 보니까).
      * 거: <대명사> ‘그거’의 준말
      * 보다: <동사> 보다.
      * -난: <어미> -니까. 앞으로 하려는 말에 대하여 원인이 되는 사유를 나타내는 연결어미. (⬥예문: 가젠 하난 ➔ 해석: 가려고 하니까)
    ⬛ 자락: ① <부사> 부쩍, 한껏, 몹시, 크게. (감정이나 상태의 정도가 매우 심함을 나타냄) ② <부사> 갑자기 힘있게 미는 모양.
    ⬛ 북부기: <명사> 허파. (= 부에)

    ⬛ 뒈싸졌수게: 뒈싸지다 + -엿수게. (해석: 뒤집어졌습니다, 뒤틀렸습니다)

      * 뒈싸지다: <동사> ① 뒤집어지다, 뒤틀리다, 몹시 뒤틀려 엉클어지다. (속이나 마음이 몹시 불쾌하거나 뒤집히는 상태) ② 뒤로 자빠지다.

      * -엿수게: <어미> 종결어미. 동작이나 상태가 완료되었음을 긍정하게끔 나타내는 정중한 종결어미 (-였지요, -었습니다).
      ⬥ 참고: ‘부아나다’를 ‘부에나다’ 또는 ‘북부기 뒈싸젓다(‘허파가 뒤집어졌다’의 뜻)고도 함.


    나도 멩심ᄒᆞ영 정낭 질러뒁 뎅겨사주마는

    ■ 나도: 나 + 도. (해석: 나도)

      * 나: <대명사> 나. (1인칭 대명사)

      * 도: <조사> 보조사. (-도)

    ■ 멩심ᄒᆞ영: 멩심ᄒᆞ다 + -영. (해석: 명심해서, 조심해서)

      * 멩심ᄒᆞ다: <동사> 명심하다, 유의하다, 조심하다.

      * -영: <어미> 연결어미. ① -고서. ② -여서.

    ■ 정낭: 정낭을. (문맥상 목적격 조사 ‘을’이 생략)

      * 정낭: <명사> 제주 전통 집 대문 위치에 걸쳐 놓는 나무 막대. 대문을 대신하는 나무 막대.

    ■ 질러뒁: 질르다 + 두다 + -엉, (해석: 가로질러 두고, 걸쳐 놓고).

      * 질르다: <동사> 찌르다. 틈이나 사이에 무엇을 꽂아 넣다. (문장에서는 ‘정낭을 정주석 구멍에 찔러두고서’, ‘정낭을 가로 세워두고서’의 뜻임)
    (막대기 따위를) 가로지르다, 걸쳐 놓다.

      * 두다: <보조용언> (어떤 행동을) 해 두다.

      * -엉: <어미> 연결어미. (-어서, -고서).

    ■ 뎅겨사주마는: 뎅기다 + -어사 + -주마는. (해석: 다녀야 했었지마는).
      * 뎅기다: <동사> 다니다. (= 뎅이다. ᄃᆞ니다, 고ᄃᆞ니다, ᄃᆞᆮ니다.)
      * -어사: <어미> -어야. 앞 절의 일이 뒤 절 일의 조건임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

      * -주마는: <어미> -지마는. 그 말을 시인하면서 다음 말에서 어긋나는 뜻을 나타내는 연결어미.
      ⬥ 참고: ‘뎅겨사주마는’ 뒤에 ‘못했지만’이 생략된 형태임. 즉, ‘다녀야 했었는데도 못했지만’의 뜻)


    삼춘도 ᄒᆞ쏠 멩심ᄒᆞ영 쉐 잘 매놔사쿠다

    ■ 삼춘도: 삼춘 + 도. (해석: 삼촌도).

      * 삼춘: <명사> 삼촌.
      * 도: <격조사> 도. 다른 것에 어느 것이나 포함시킴을 뜻하는 격조사.

    ■ ᄒᆞᄊᆞᆯ: <부사> 아주 자그만큼. (= ᄒᆞ꼼)

    ■ 멩심ᄒᆞ영 (앞 해석 참조)  

    ■ 쉐: <명사> 소. (본 문장에서는 ‘소가’에서 <조사> ‘가’ 생략된 형태임).

    ■ 잘: <부사> 잘, 옳고 바르게.

    ■ 매놔사쿠다: 매놓다(매어 놓다) + -어사 + -쿠다. (해석: 매어 놓아야겠습니다.)
      * 매놓다: <동사> ‘매어 놓다’의 축약형.

      * -어사: <어미> -어야. 앞 절의 일이 뒤 절 일의 조건임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
        * -쿠다: <어미> -겠습니다. 화자의 의도ㆍ추측을 나타내는 종결어미. (⬥예문: 이것으로 가져가쿠다. ➔ 해석: 이것으로 가져가겠습니다).


    3. 마무리: 토박이의 한마디

    오늘 소개해 드린 제주어 예문, 어떠셨나요?

    오늘은 제주의 올레에서 이웃 어른에게 말을 건네는 모습으로, 시골 마을에서 가끔씩 마주칠 만한 얘기입니다. 잠깐 골목길 밖에 볼 일이 있어서 미처 정낭을 세우지 않고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닥친 난감한 상황, 화가 치밀만한 상황에서도 너그럽고 담담하게 대처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남이 실수로 내 가슴을 후벼 팔 때, 길길이 날뛰며 남을 혼내기보다 너그러이 용서하는 마음으로 다음의 실수가 없도록 당부하며 서로를 보듬는 것은 어떨까요?


    이 글에 나오는 ‘올레’와 ‘정낭’에 대한 내용은 저의 ‘제주 이야기’ <제4회> 글에서 자세히 전해드렸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제주 이야기] 『<제4회> 닫혀 있으나 신뢰로 열리는 문, 제주의 지혜 ‘정낭’』


    제주 오리진(Jeju Origin)


    참고 자료

    * 『개정 증보 제주어사전』 (제주특별자치도, 2009)
    * 『제주어대사전 제주어왓 (시험 운영 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학연구센터)
    * 네이버 국어사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제1회 [찐 토박이의 제주어]: 사라져가는 소중한 보물, ‘제주어’ 연재를 시작하며

    부제: 두린 ᄆᆞᆼ생이 (어린 귀염둥이)

    현무암 돌담과 귤나무가 보이는 제주 전통 초가집의 마루에 정갈한 상차림이 차려져 있습니다. 어린아이(두린 몽생이)가 마루에 앉아 볼을 빵빵하게 밝은 표정으로 밥과 반찬(촐레)을 맛있게 오물오물 먹고 있으며, 옆에 앉은 할머니는 수건을 머리에 쓰고 아이를 사랑 가득한 눈빛과 미소로 바라보고 있는 정겹고 따뜻한 일러스트입니다.

    (그림: ai생성)

    1. 제주어의 독창성과 가치, 그리고 연재 취지

    흔히 ‘제주 사투리’ 또는 ‘제주 방언’으로 불리는 ‘제주어’는 단순히 한반도 육지 언어의 변형이나 사투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제주어는 그 독창성과 역사성을 인정받아 국제표준화기구(ISO)로부터 독립된 고유 언어 코드(jje)를 부여받은 명실상부한 독립적 언어 자산입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형태인 ‘아래아(ㆍ)’와 옛 어휘, 문법 구조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언어의 살아있는 박물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주어는 현재 유네스코(UNESCO)로부터 ‘소멸 위기 언어’ 4단계인 ‘아주 심각한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제주어를 듣고 이해하기 어려워하면서, 수천 년간 제주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지탱해 온 언어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에 ‘제주오리진(Jeju Origin)’에서는 소중한 제주어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누구나 일상에서 쉽고 친근하게 제주어를 접하고 이어나갈 수 있도록 [찐 토박이의 제주어] 연재를 시작합니다.

    앞으로 꾸준히 제주어 문장을 선보이며, 그 속에 담긴 정서와 재미있는 생활 속 사용법을 알기 쉽게 전해드리겠습니다.

    언제든 편하게 들러 제주어의 매력을 함께 느끼고 나누어 주시길 기대합니다.


    2. 오늘의 제주어

    < 예문 >
    제주어에고~, 우리 두린 ᄆᆞᆼ생이,
    ᄎᆞᆯ레도 옴막옴막 잘 먹엄저.


    3. 문장 번역 및 어휘 해설

    1) 표준어로 번역

    < 예문 >
    번 역아이고~, 우리 어린 귀염둥이,
    반찬도 오물오물 잘 먹고 있네.


    2) 주요 어휘 및 사용법 설명

    ⬛ ᄆᆞᆼ생이 (몽생이)⬛ ᄎᆞᆯ레 (촐레)

    ※ 안내: 제주어 옛한글 원형 어휘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괄호 안에 현대 발음을 함께 표기합니다.

    ⬛ 두린: <형용사> 어린.
      * 두린아기: <명사> 어린아기.
      * 두린때: <명사> 나이가 어리고 생각이 아직 모자란 시기.
      * 두리다: <형용사> 어리다.
    ⬛ ᄆᆞᆼ생이(몽생이): <명사> 1. 망아지(어린 말). 2. 동물의 새끼나 어린아이를 귀엽게 부를 때 사용.
      * ‘두린 몽생이’: 1. ‘어린 망아지’, 2. ‘귀여운 어린 아이’.
    ⬛ ᄎᆞᆯ레(촐레): <명사> 반찬(주로 밥과 곁들여 먹는 장, 젓 따위의 반찬)
    ⬛ 옴막옴막: <부사> 음식물 따위를 입안에 연이어 넣어 먹는 모양.
    ⬛ 먹엄저: 먹고 있다.
      * -엄저: <어미> -고 있다. 그 동작이 계속되고 있다는 뜻의 종결어미.
      * 먹다 <동사> + -엄저 <어미> = 먹엄저.
      * 뒤집다 <동사> + -엄저 <어미> = 뒤집엄저.
      * (옷이) 젖다 <동사> + -엄저 <어미> = (옷이) 젖엄저.

    4. 토박이의 한마디

    어릴 적 밥상머리에 앉아 반찬을 오물오물 잘 먹고 있으면, 할머니께서 곁에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에고~ 우리 두린 몽생이 잘 먹엄저” 하고 정답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원래 ‘몽생이’는 어린 망아지를 뜻하지만, 제주 할망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내 새끼를 부르는 따뜻한 대명사였습니다.

    독자 여러분 곁에도 사랑스러운 ‘두린 몽생이’가 있으신가요? 오늘은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정겨운 제주어 한마디를 건네보시는 건 어떨까요?


    5. 마무리하며

    오늘 소개해 드린 제주어 한마디, 어떠셨나요?

    정겨운 제주어 단어 하나가 가족과의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따뜻한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제주어는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우리가 지속하여 가꾸고 유지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앞으로 계속 전해드릴 [찐 토박이의 제주어]를 통해 제주어의 매력을 느끼시고, 소멸해가는 제주어를 지켜내는 작은 걸음에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제주어의 가치와 역사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으시다면 [제주 이야기] 카테고리의 <제8회> 글 “고대어의 원형을 품은 ‘제주어(濟州語)’, 소멸 위기에 처하다” 편도 함께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제주 오리진(Jeju Origin)

    참고 자료

    * 『개정 증보 제주어사전』 (제주특별자치도, 2009)

    * 『제주어대사전 제주어왓 (시험 운영 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학연구센터)
    * 네이버 국어사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