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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회 [찐 토박이의 제주어]: 올레 바깥디 ᄒᆞᆫ어의 강 완 보난 (올레 밖에 잠깐 다녀와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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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회까지의 글에서 본 ‘제주어’, 어떠셨나요? 표준어와는 너무나 달라서 외국어보다 어렵진 않았나요?

    [찐 토박이의 제주어]가 전하는 오늘의 제주어는 제주 사람들의 ‘연대와 상생’의 의식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이웃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크게 화를 내기 보다 자신의 실수를 탓하며 상대방에게 가볍게 주의를 청하는 말을 준비했습니다.


    1. 오늘의 제주어: 예문과 표준어 번역

    < 예 문 >
    제주어마당에 날레 널엉 나뒁그네
    올레 바깥디 ᄒᆞᆫ어의 강 완 보난,
    삼춘네 쉐가 들언 ᄆᆞᆫ딱 허우대겨 부럼선게마씸.
    거 보난 자락 북부기 뒈싸졌수게.
    나도 멩심ᄒᆞ영 정낭 질러뒁 뎅겨사주마는,
    삼춘도 ᄒᆞ쏠 멩심ᄒᆞ영 쉐 잘 매놔사쿠다.
    번 역마당에 곡식을(말리려고) 널어 두고서
    골목 밖에 잠시 나갔다 와서 보니까,
    아저씨네 소가 와서 몽땅 엉망으로 휘젓고 있더라고요.
    그걸 보니까 속이 확 뒤집어졌잖아요.
    나도 명심해서 정낭을 꽂아두고 갔어야 했었지만,
    아저씨도 조금 명심해서 소를 잘 매어두어야 되겠어요.

    ※ 안내: 박스 안의 어휘는 제주어 옛한글 원형입니다.


    2. 주요 어휘 및 사용법 설명


    1) 주요 어휘의 발음

    ᄆᆞᆫ딱 (몬딱) ᄒᆞ쏠 (호쏠)
    ᄒᆞ영 (호영, 하영, 허영) 

    ※ 안내: 박스 안의 어휘는 제주어 옛한글 원형입니다. ( ) 안의 표기는 발음을 이해하기 위해 현대 발음 표기를 사용합니다.


    2) 어휘 해설

    마당에 날레 널엉 나뒁그네

    ⬛ 날레: <명사> 볕을 쐬기 위하여 멍석에 널어놓은 곡식. (예문에서는 ‘날레를’에서 <조사> ‘를’이 생략된 형태임).

    ⬛ 널엉: 널어 + -ㅇ. (뜻: 널어서).
      * 널다: <동사> 널다. 볕을 쬐거나 또는 드러내 보이려고 펼쳐 놓다.
      * -ㅇ: <연결어미> 용언 어간이나 어미 뒤에 붙어 앞선 동작이 지나거나 연속됨을 나타내는 연결어미(‘-서’의 뜻).

    ⬛ 놔뒁그네: 나두다 + -앙/엉 + -그네. (➔ 놔두어 + -그네 ➔ 나뒁그네).

    (해석: 놔두고 나서, 놓아두어서).

      * 놔두다: <동사> 놓아두다, 놔두다.

      * -그네: <어미> 동작의 완료 후 다음 동작으로 이어짐을 나타내는 연결어미 (-하고 나서, -서).
      ⬥ 예문: 나 밥 먹엉그네 곧 가키여. ➔ 번역: 나 밥 먹고 나서 곧 갈께).

    올레 바깥디 ᄒᆞᆫ어의 강 완 보난

    ■ 올레: 올레. (해석: 예문에서는 ‘올레의’에서 <조사> ‘의’가 생략된 것임),

      * 올레: <명사> 큰길에서 집 대문(정낭)까지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

    ■ 바깥디: 바깥 + 디. (해석: 바깥에, 밖에).

      * 바깥: <명사> 바깥, 밖.
      * 디: <조사> 부사격 조사 (바깥에/바깥으로). (= 듸),
      ⬥ 예문: 이녁 사는 디 어디라? ➔ 번역: 네가 사는 곳은 어디인가?
    ■ ᄒᆞᆫ어의: <명사> 잠깐 사이.
      ⬥ 예문: ᄌᆞ냑 전에 ᄒᆞᆫ어이 놀당 오쿠다. ➔ 해석: 저녁 전에 잠깐 놀다 오겠습니다). (= ᄒᆞᆫ숨, ᄒᆞᆫ시).
    ■ 강: 가다 + -앙. (뜻: 가서).

      * 가다: <동사> 가다.

      * -앙: <어미> 연결어미 (-해서, -하여).

      ⬥ 예문: 여기 왕 밥 먹으라. 번역: 여기 와서 밥 먹어라.

    ■ 완: 오다 + -아 + -ㄴ. (오아 ➔ 와 ➔ 완) (해석: 와서).

      * 오다: <동사> 오다.

      * -아: <어미> 양성모음 어간에 붙어 부사형을 이루는 어미.

      * -ㄴ: <어미> 용언 뒤에 붙어 앞서 일어난 동작을 나타내는 연결어미.

    ■ 보난: 보다 + -난. (해석: 보니까, 보니).

      * 보다: <동사> 보다.

      * -난: <어미> 이유나 상태의 확인을 나타내는 연결어미 (-니까, -고 보니).

    삼춘네 쉐가 들언 ᄆᆞᆫ딱 허우대겨 부럼선게마씸

    ⬛ 삼춘네: 삼춘 + 네. (해석: 삼촌네, 이 문장에서는 ‘이웃집 어른’, 아저씨 또는 아주머니를 뜻함.)
      * 삼춘: <명사> 삼촌. 부모의 형제. (참고: 제주에서는 자기의 부모 또래의 어른들에게 ‘삼춘’ 또는 ‘삼촌’이라고 다정한 의미로 부름).

      * -네: <접미사> 일부 대명사 뒤에 붙어 ‘집안’, ‘무리’, ‘들’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 쉐가: 쉐 + -가. (해석: 소가)

      * 쉐: <명사> 소(牛).

      * 가: <조사> 주격 조사.

    ⬛ 들언: 들다 + -언. (해석: 들어가서, 침범해서).

      * 들다: <동사> (남의 밭이나 구역에) 들어가다, 침범하다.

      * -언: <어미> 연결어미. ‘-고’, ‘-하여’, ‘-해서’.
      ⬥ 예문: 밥 먹언 보난 ➔ 해석: 밥을 먹고 보니.
    ⬛ ᄆᆞᆫ딱: <부사> 모두. (= 멘딱, 모도, 모두, 모신딱이, 문짝, ᄆᆞᆫ, ᄆᆞᆫ짝)

    ⬛ 허우대겨 부럼선게마씸: 허우대기다 + -여 + 불다 + -엄ㅅ + -언게(-엉게) + 마씸 (해석: 어지럽게 짓밟아 놓아 버리고 있더라고. 엉망으로 헝클어 놓아 버리고 있더라고요.)
      ※ 참고: ‘부럼선게’는 ‘불엄선게’에서 어간 받침 ‘ㄹ’이 탈락한 구어체 발음 형태임.
      * 허우대기다: <동사> (곡식·풀 등을) 어지럽게 짓밟아 놓다, 짚이나 풀 따위를 헝클어 놓다. (참고: 제주어사전에 수록되지 않았으나, 어르신들이 자주 사용하시던 생활 어휘)
      * -여: <어미> ‘ᄒᆞ다’ 동사나 용언 어간 뒤에 붙어 부사형을 만드는 어미.
      * 불다: <동사> (보조동사)-아/어/여 버리다. (앞말의 행동이 이미 끝났거나 이루어진 결과, 말하는 이가 아쉬운 감정이 남았음을 나타냄).
      * -엄ㅅ-: <선어말어미> -고 있-. 그 ‘동작을 계속하고 있는’이란 뜻을 나타내는 선어말어미. (= 엄시-).

      * -언게(-엉게): <어미> -던데. (과거에 사실을 회상하여 그 상대방도 긍정하게끔 나타내는 종결어미. = -엉게).
      * 마씸: <접미사> 서술어미 뒤에 덧붙여 존대를 나타내는 첨사. (= 마씀, 마슴, 마시, 마심, 마씨).

    거 보난 자락 북부기 뒈싸졌수게

    ⬛ 거 보난: 거 보(다) + -난. (해석: 그거 보니까).
      * 거: <대명사> ‘그거’의 준말
      * 보다: <동사> 보다.
      * -난: <어미> -니까. 앞으로 하려는 말에 대하여 원인이 되는 사유를 나타내는 연결어미. (⬥예문: 가젠 하난 ➔ 해석: 가려고 하니까)
    ⬛ 자락: ① <부사> 부쩍, 한껏, 몹시, 크게. (감정이나 상태의 정도가 매우 심함을 나타냄) ② <부사> 갑자기 힘있게 미는 모양.
    ⬛ 북부기: <명사> 허파. (= 부에)

    ⬛ 뒈싸졌수게: 뒈싸지다 + -엿수게. (해석: 뒤집어졌습니다, 뒤틀렸습니다)

      * 뒈싸지다: <동사> ① 뒤집어지다, 뒤틀리다, 몹시 뒤틀려 엉클어지다. (속이나 마음이 몹시 불쾌하거나 뒤집히는 상태) ② 뒤로 자빠지다.

      * -엿수게: <어미> 종결어미. 동작이나 상태가 완료되었음을 긍정하게끔 나타내는 정중한 종결어미 (-였지요, -었습니다).
      ⬥ 참고: ‘부아나다’를 ‘부에나다’ 또는 ‘북부기 뒈싸젓다(‘허파가 뒤집어졌다’의 뜻)고도 함.

    나도 멩심ᄒᆞ영 정낭 질러뒁 뎅겨사주마는

    ■ 나도: 나 + 도. (해석: 나도)

      * 나: <대명사> 나. (1인칭 대명사)

      * 도: <조사> 보조사. (-도)

    ■ 멩심ᄒᆞ영: 멩심ᄒᆞ다 + -영. (해석: 명심해서, 조심해서)

      * 멩심ᄒᆞ다: <동사> 명심하다, 유의하다, 조심하다.

      * -영: <어미> 연결어미. ① -고서. ② -여서.

    ■ 정낭: 정낭을. (문맥상 목적격 조사 ‘을’이 생략)

      * 정낭: <명사> 제주 전통 집 대문 위치에 걸쳐 놓는 나무 막대. 대문을 대신하는 나무 막대.

    ■ 질러뒁: 질르다 + 두다 + -엉, (해석: 가로질러 두고, 걸쳐 놓고).

      * 질르다: <동사> 찌르다. 틈이나 사이에 무엇을 꽂아 넣다. (문장에서는 ‘정낭을 정주석 구멍에 찔러두고서’, ‘정낭을 가로 세워두고서’의 뜻임)
    (막대기 따위를) 가로지르다, 걸쳐 놓다.

      * 두다: <보조용언> (어떤 행동을) 해 두다.

      * -엉: <어미> 연결어미. (-어서, -고서).

    ■ 뎅겨사주마는: 뎅기다 + -어사 + -주마는. (해석: 다녀야 했었지마는).
      * 뎅기다: <동사> 다니다. (= 뎅이다. ᄃᆞ니다, 고ᄃᆞ니다, ᄃᆞᆮ니다.)
      * -어사: <어미> -어야. 앞 절의 일이 뒤 절 일의 조건임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

      * -주마는: <어미> -지마는. 그 말을 시인하면서 다음 말에서 어긋나는 뜻을 나타내는 연결어미.
      ⬥ 참고: ‘뎅겨사주마는’ 뒤에 ‘못했지만’이 생략된 형태임. 즉, ‘다녀야 했었는데도 못했지만’의 뜻)

    삼춘도 ᄒᆞ쏠 멩심ᄒᆞ영 쉐 잘 매놔사쿠다

    ■ 삼춘도: 삼춘 + 도. (해석: 삼촌도).

      * 삼춘: <명사> 삼촌.
      * 도: <격조사> 도. 다른 것에 어느 것이나 포함시킴을 뜻하는 격조사.

    ■ ᄒᆞᄊᆞᆯ: <부사> 아주 자그만큼. (= ᄒᆞ꼼)

    ■ 멩심ᄒᆞ영 (앞 해석 참조)  

    ■ 쉐: <명사> 소. (본 문장에서는 ‘소가’에서 <조사> ‘가’ 생략된 형태임).

    ■ 잘: <부사> 잘, 옳고 바르게.

    ■ 매놔사쿠다: 매놓다(매어 놓다) + -어사 + -쿠다. (해석: 매어 놓아야겠습니다.)
      * 매놓다: <동사> ‘매어 놓다’의 축약형.

      * -어사: <어미> -어야. 앞 절의 일이 뒤 절 일의 조건임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
        * -쿠다: <어미> -겠습니다. 화자의 의도ㆍ추측을 나타내는 종결어미. (⬥예문: 이것으로 가져가쿠다. ➔ 해석: 이것으로 가져가겠습니다).


    3. 마무리: 토박이의 한마디

    오늘 소개해 드린 제주어 예문, 어떠셨나요?

    오늘은 제주의 올레에서 이웃 어른에게 말을 건네는 모습으로, 시골 마을에서 가끔씩 마주칠 만한 얘기입니다. 잠깐 골목길 밖에 볼 일이 있어서 미처 정낭을 세우지 않고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닥친 난감한 상황, 화가 치밀만한 상황에서도 너그럽고 담담하게 대처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남이 실수로 내 가슴을 후벼 팔 때, 길길이 날뛰며 남을 혼내기보다 너그러이 용서하는 마음으로 다음의 실수가 없도록 당부하며 서로를 보듬는 것은 어떨까요?

    이 글에 나오는 ‘올레’와 ‘정낭’에 대한 내용은 저의 ‘제주 이야기’ <제4회> 글에서 자세히 전해드렸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제주 이야기] 『<제4회> 닫혀 있으나 신뢰로 열리는 문, 제주의 지혜 ‘정낭’』


    제주 오리진(Jeju Origin)

    참고 자료

    * 『개정 증보 제주어사전』 (제주특별자치도, 2009)
    * 『제주어대사전 제주어왓 (시험 운영 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학연구센터)
    * 네이버 국어사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제4회> 닫혀 있으나 신뢰로 열리는 문, 제주의 지혜 ‘정낭’

    제주 초가집 입구 돌담 사이에 세 개의 나무 막대(정낭)가 가로로 모두 끼워져 출타 중임을 알리는 제주의 전통 정낭과 정주석 풍경

    (ai 이미지 생성)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를 전하는 ‘제주 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지난 3회에서는 거친 태풍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바람과 상생하는 <제주 돌담의 물리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바람의 길을 막지 않고 통과시키는 돌담의 유연함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제주 사람들의 삶 그 자체였지요.

    그 부드러운 곡선의 돌담은 각자의 집 앞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오늘은 그 돌담이 끝나는 곳, 마을 길에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의 집 입구에서 마주하게 되는 독특한 문화유산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제주의 전통 대문인 ‘정낭’, 그리고 대문으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제주의 진짜 ‘올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 조부모님 댁 입구에 들어설 때면, 거칠고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 사이에 정겹게 걸쳐놓은 길다란 나무 장대를 늘 보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시절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던 정낭에는 단순히 집 안과 밖을 구별하는 것 이상의 놀라운 과학과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위대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1. ‘올레’의 원래 의미와 현재 알려진 ‘올레길’의 차이

    ‘정낭’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정낭과 처음 마주치는 공간인 ‘올레’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흔히 ‘올레길 걷기’ 열풍으로 널리 알려져 사용 중인 ‘올레길’의 의미는 제주 전통의 ‘올레’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1) 전통적 의미의 올레

    ‘올레’는 ‘큰길이나 마을 길에서 집 마당까지 이어지는 돌담으로 둘러쌓인 좁은 골목길’을 뜻합니다.

    제주 초가집은 거센 바람을 막기 위해 큰길에서 마당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돌담을 디귿(⊏)자나 곡선 형태로 길게 쌓아 입구를 만들었는데, 이 공간을 ‘올레’라고 불렀습니다.

    2) 올레의 과학

    이 올레에는 제주 선조들의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올레는 넓고 크게 만들기보다 일부러 좁게 하거나 구부러지는 형태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면이 바다인 제주의 강한 바람이 큰길에서 집안으로 곧장 불어닥칠 때, 좁고 굽어진 돌담 골목인 올레를 통과하면서 바람의 속도가 줄어듭니다. 즉, 거센 바람이나 태풍으로부터 안마당과 초가집을 보호하는 ‘천연 바람 완충 지대’였던 셈입니다. 이 올레가 끝나는 지점, 즉 집 마당의 진짜 입구에서 우리는 제주의 대문인 ‘정낭’을 마주하게 됩니다.

    3) 의미가 확장된 요즘의 ‘올레길’

    지금 우리가 흔히 걷는 도보 여행 코스인 ‘제주 올레길’은 옛날부터 내려온 지명이 아니라, 2007년 (사)제주올레에서 제주도의 아름다운 도보 여행 코스를 개발하면서 붙인 ‘현대적인 브랜드 이름’입니다.

    “제주의 집 앞 골목을 뜻하는 ‘올레’처럼, 여행자들이 도보 여행을 통해 제주의 깊숙한 속살과 문화를 조용히 만나고 가라”는 의미를 담아 트레킹 코스를 ‘올레길’이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이 브랜드가 전 국민적으로 엄청난 히트를 치다 보니, 어느새 전국적으로 ‘길게 걷는 산책로나 등산로’ 전체를 뜻하는 대명사처럼 쓰이게 된 것입니다. 제주올레라는 말에는 ‘제주에 올래?’라는 초대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합니다.

    4) 아쉬움과 새로운 희망

    제주 토박이로서 전통적 의미의 올레가 사라져 가고 잊혀져 가는 현실에 아쉬움이 짙게 남습니다. 하지만 순기능이 크게 있기에 아쉬운 한 켠을 메꿀 수 있어서 다행으로 여깁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현재 제주의 올레길 정비, 해안 청소, 올래길과 접한 마을 주민들과의 상생을 위한 아이템 개발 등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들은 제주 관광의 주요 문화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제주올레가 제주를 넘어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제주 올레를 해외로 확장해 나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2. 정낭과 정주석, 바람의 섬이 만들어낸 과학적 구조와 아날로그 신호

    육지의 전통 가옥을 보면 나무로 짠 튼튼하고 빽빽한 대문이 집안을 꽉 막고 있지만, 제주의 시골집 입구에는 사방이 막힌 대문이 없었습니다. 대신 집 입구 양쪽에 구멍이 세 개씩 뚫린 커다란 돌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긴 나무 장대를 가로로 걸쳐두었습니다.

    이때 구멍 뚫린 돌기둥이나 나무기둥을 ‘정주석’ 또는 ‘정주목’이라 부르고, 그 사이의 나무 장대를 ‘정낭’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주목 없이 돌담 자체를 지지대 삼아 정낭을 얹거나 구멍에 끼워 사용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1) 정낭의 역할

    정낭’은 제주 전통가옥의 정식 대문입니다.

    단순히 기다란 장대 하나에 불과하지만, 정낭은 실제적인 대문과 울타리 역할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과거 중산간 지역에서는 소나 말을 방목하여 키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을길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가축들이 집 마당 안으로 불쑥 들어와 텃밭의 농작물을 망치거나 초가집을 훼손하는 것을 이 정낭이 완벽하게 차단해 주었습니다.

    2) 제주에 대문이 없었던 이유

    제주에는 왜 육지처럼 번듯한 대문이 없었을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제주의 거센 ‘바람’ 때문입니다. 사방이 꽉 막힌 대문은 사철 몰아치는 제주의 강한 태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문짝이 뜯겨 나가거나 돌담까지 무너뜨리기 십상입니다. 제주 사람들은 돌담을 쌓을 때처럼, 대문을 만들 때에도 자연과 싸우기보다 순응하는 법을 택했습니다. 나무 장대 몇 개로 이루어진 정낭은 바람이 아무리 세게 불어도 그 사이로 바람을 유유히 흘려보내기에 태풍에도 끄떡없는 가장 완벽한 대문인 셈입니다.

    3. 숫자와 위치로 소통하는 아날로그 메신저

    정낭이 가진 가장 흥미롭고 아름다운 점은 바로 이 나무 장대의 개수와 위치를 통해 이웃과 소통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스마트폰의 프로필 상태창이나 메신저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알리듯, 옛 제주 사람들은 정낭의 개수로 집주인의 현재 상황을 이웃들에게 실시간으로 전했습니다.

    1)정낭이 모두 내려져 있는 경우 (0개)

    집 안에 사람이 있으니 누구든 편하게 들어오라는 환대의 표시입니다.

    2) 정낭이 1개 걸려 있는 경우

    “집주인이 지금 아주 가까운 이웃집에 잠시 마실을 갔거나, 동네 거까이서 볼 일 보러 갔으니 곧 돌아옵니다.”라는 뜻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주인을 만날 수 있다는 다정한 안내문인 것이죠.

    3) 정낭이 2개 걸려 있는 경우

    “지금 집에서 조금 떨어진 밭에 일을 하러 나갔거나 멀리 나무를 하러 가서, 오후 늦게나 저녁때가 되어야 돌아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다음에 다시 찾아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4) 정낭이 3개 걸려 있는 경우

    “지금 먼 곳에 있는 다른 마을에 가거나, 며칠 동안 집을 비웁니다.”라는 뜻입니다.
    장대 3개가 꽉 채워져 걸려 있으면 이웃들은 집안에 아무도 없음을 인지하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5) 정낭을 1개 또는 2개만 사용하는 경우

    제주 초가집 입구 돌담 사이에 나무 막대(정낭) 한 개가 사선으로 비스듬히 걸쳐져 있어 집주인이 금방 돌아올 예정임을 알리는 모습

    (ai 이미지 생성)

    실제로는 1개 또는 2개만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정낭을 가로로 걸치면 집에 늦게 돌아온다는 뜻이고, 사선으로 비스듬히 걸치면 금방 돌아온다는 뜻이었습니다.

    6) 종합

    이처럼 정낭은 단순한 나무 장대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는 소리 없는 언어이자 가장 따뜻한 아날로그 메신저였습니다.

    4. 정낭이 증명하는 제주의 위대한 가치, 신뢰와 삼무(三無) 정신

    1) 역사 기록 속의 삼무

    1704년에 이형상이 제주 목사로 부임하던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저술한 제주도 지방지인 『남환박물』 에 기록한 것을 번역한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제주도의 토질이 척박해서 백성들은 가난한 삶을 살았다. 땅에는 바위와 돌이 널려 있고 흙이 덮인 곳이 드물어서 삼과 면화를 기르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의복과 음식이 항상 부족했다. 의복과 음식은 소박했으며,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다. 이렇듯 제주도 백성들은 항상 가난에 시달렸지만 물건을 훔치는 자가 없었다. 말이나 소, 농기구, 곡물을 들에 방치하여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보안 기능이 없는 정낭이 대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주의 ‘삼무(三無) 정신’ 덕분입니다. 제주의 삼무는 ‘도둑이 없고, 거지가 없으며, 대문이 없다’는 뜻입니다.

    2) 현대의 기술적 첨단 보안과 제주의 자치적 보안 시스템

    여기서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현대 과학의 패러다임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전 세계 정보보안 시장의 핵심 철학은 ‘제로 트러스트(Zero Trust)’입니다. 직역하면 “아무도 믿지 마라(Zero Trust), 그리고 항상 검증하라(Always Verify)”라는 뜻입니다.

    현대의 제로 트러스트 보안 시스템은 내부에 이미 들어와 있는 최고 경영자나 신뢰받는 직원이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절대 신뢰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불신 장벽에서 출발합니다. 방 안의 서류 하나를 열어볼 때마다, 컴퓨터 시스템에 접속할 때마다 끊임없이 생체 인증(지문·안면 인식)을 요구하며 “당신이 정말 권한이 있는 사람이 맞는지”를 매 순간 가혹하게 검증하는 기술입니다.

    불신이 깊어질수록 인간 사회가 감당해야 할 시스템 구축 비용과 심리적 피로감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마련입니다. 물리적인 형태만 보면 제주의 정낭은 이 제로 트러스트 관점에서 ‘보안 점수 0점’의 허술한 바리케이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제주의 정낭은 기술의 복잡성으로 불신을 제어하는 현대 공학의 패러다임을 정면으로 뒤집는 완벽한 ‘상호 신뢰의 공동체 규범’을 보여줍니다.

    결국 정낭은 기계 장치로 인간을 감시하는 삭막한 기술이 아니라, ‘정직’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의 힘으로 공간을 완벽하게 방어해 낸 인류 역사상 가장 고차원적인 ‘제로 비용의 인문학적 보안 시스템’이었던 셈입니다.

    3) 소결

    정낭은 힘으로 침입자를 때려눕히거나 시스템적으로 차단하는 ‘강제 보안’이 아닙니다. 정낭은 도둑을 막기 위한 ‘차단막’이 아니라, 이웃 간의 단단한 ‘신뢰와 약속’이었습니다.

    “지금 집을 비우니 안으로 들어오지 말아 달라.”는 주인의 무언의 요청을, 마을 사람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존중해 주었던 것입니다. 도둑이 없다는 상호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열려 있는 믿음직한 정낭이라는 대문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높은 철제 대문을 세우고, 삼중 잠금장치를 달고, CCTV를 24시간 가동하면서도 늘 불안해하며 살아갑니다. 아무도 믿지 말고 끊임없이 검증하라는 제로 트러스트의 철저한 불신 속에 스스로를 격리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에 대해 제주의 정낭은 완전히 반대의 결론을 내려주며, ‘진정한 안전과 평화는 철저한 감시가 아니라 서로를 믿는 신뢰에서 온다.’는 깊은 울림을 전해줍니다.

    5. 올레에서 마주하던 그리운 추억들

    돌담을 따라 굽어지는 올레길을 걸어 들어가면, 고풍스러운 초가집이 보이고, 그 입구 한쪽 끝에 단정하게 성낭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집에 돌아 왔을 때에, 반갑게 맞아주시던 할머니의 환한 미소가 고스란히 겹쳐옵니다.

    한 올레 안에는 여러 집들이 모여 있는 경우가 많으며 대개는 작은 골목이입니다.

    조부모님 집 앞의 올레는 비교적 넓고 꽤 긴 편이었습니다. 덕분에 또래의 마을 아이들이 여럿이 모여서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하고, 때로는 연날리기도 했던 장소여서 꽤나 많은 추억이 쌓인 공간입니다.

    가을이면 초가집 지붕에 얹은 묵은 새(‘띠’의제주 방언)를 교체하고 난 뒤에 지붕을 튼튼히 묶을 용도로 길게 집줄(‘새’로 만든 동아줄)을 꼬아 만들었습니다. 이때에 공동 작업으로 어른들과 함께 ‘호랭이’를 돌리던 올레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호랭이’는 끝의 구부러진 갈고리에 새끼줄을 걸어서 ‘ㄴ’자 형태의 손잡이를 돌리며 집줄을 꼬아나갈 때 쓰는 도구입니다. 제주 사투리인데 ‘우리말 샘’ 등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진 설명: 성읍 민속마을에서 초가 지붕 집줄 묶기과 집줄 만들기 시연 중이며, 여성 두 명이 호랭이를 돌리고 있는 모습임)

    6. 맺음말: 내 삶의 울타리를 허물고, 신뢰의 올레길을 걸을 시간

    선조들은 돌담에 구멍을 내어 바람을 통과시키는 유연함의 지혜를 보였습니다. 이제 우리도 현대의 거센 변화 속에서, 내면의 높은 벽을 허물고 미래를 바라보며 세계와 상생하고 공존하는 지혜를 이어가야 할 때입니다.

    비록 일상에서 진짜 정낭을 보기는 어려워졌지만, 제주 사람들이 수백 년간 지켜온 단단한 상생과 신뢰의 정신은 여전히 검은 돌담 사이에 따뜻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제주에 오실 기회가 있다면, 화려한 관광지 대신 제주의 옛 숨결이 담긴 조용한 시골 마을의 올레를 천천히 걸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대문 없이 열려 있는 제주의 정서가 지친 여러분의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줄 것입니다.

    이처럼 대지 위에서 이웃을 향해 빗장을 풀었던 제주인들의 위대한 신뢰와 상생의 법도는, 섬을 둘러싼 거칠고 가혹한 또 다른 영토인 ‘바다’ 위에서 더욱 경이로운 공동체 문명으로 피어납니다.

    다음 5회에서는 돌이 많고 바람이 몰아치는 삼다(三多)의 혹독한 결핍 속에서, 제주인들이 어떻게 절망을 딛고 뚝심 하나로 생존의 뿌리를 내렸는지 풀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집약되어 전 세계가 경탄하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의 위대한 연대와 상생의 사회학>을 품고 찾아오겠습니다.

    제주 오리진(Jeju Origin)

    참고 자료
    * 제주 부사 이형상이 쓴 제주도 박물지, 남환박물, 한경아
    * (사)제주올레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