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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회> 닫혀 있으나 신뢰로 열리는 문, 제주의 지혜 ‘정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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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를 전하는 ‘제주 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지난 3회에서는 거친 태풍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바람과 상생하는 <제주 돌담의 물리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바람의 길을 막지 않고 통과시키는 돌담의 유연함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제주 사람들의 삶 그 자체였지요.

    그 부드러운 곡선의 돌담은 각자의 집 앞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오늘은 그 돌담이 끝나는 곳, 마을 길에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의 집 입구에서 마주하게 되는 독특한 문화유산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제주의 전통 대문인 ‘정낭’, 그리고 대문으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제주의 진짜 ‘올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 조부모님 댁 입구에 들어설 때면, 거칠고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 사이에 정겹게 걸쳐놓은 길다란 나무 장대를 늘 보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시절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던 정낭에는 단순히 집 안과 밖을 구별하는 것 이상의 놀라운 과학과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위대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1. ‘올레’의 원래 의미와 현재 알려진 ‘올레길’의 차이

    ‘정낭’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정낭과 처음 마주치는 공간인 ‘올레’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흔히 ‘올레길 걷기’ 열풍으로 널리 알려져 사용 중인 ‘올레길’의 의미는 제주 전통의 ‘올레’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1) 전통적 의미의 올레

    ‘올레’는 ‘큰길이나 마을 길에서 집 마당까지 이어지는 돌담으로 둘러쌓인 좁은 골목길’을 뜻합니다.

    제주 초가집은 거센 바람을 막기 위해 큰길에서 마당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돌담을 디귿(⊏)자나 곡선 형태로 길게 쌓아 입구를 만들었는데, 이 공간을 ‘올레’라고 불렀습니다.

    2) 올레의 과학

    이 올레에는 제주 선조들의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올레는 넓고 크게 만들기보다 일부러 좁게 하거나 구부러지는 형태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면이 바다인 제주의 강한 바람이 큰길에서 집안으로 곧장 불어닥칠 때, 좁고 굽어진 돌담 골목인 올레를 통과하면서 바람의 속도가 줄어듭니다. 즉, 거센 바람이나 태풍으로부터 안마당과 초가집을 보호하는 ‘천연 바람 완충 지대’였던 셈입니다. 이 올레가 끝나는 지점, 즉 집 마당의 진짜 입구에서 우리는 제주의 대문인 ‘정낭’을 마주하게 됩니다.

    3) 의미가 확장된 요즘의 ‘올레길’

    지금 우리가 흔히 걷는 도보 여행 코스인 ‘제주 올레길’은 옛날부터 내려온 지명이 아니라, 2007년 (사)제주올레에서 제주도의 아름다운 도보 여행 코스를 개발하면서 붙인 ‘현대적인 브랜드 이름’입니다.

    “제주의 집 앞 골목을 뜻하는 ‘올레’처럼, 여행자들이 도보 여행을 통해 제주의 깊숙한 속살과 문화를 조용히 만나고 가라”는 의미를 담아 트레킹 코스를 ‘올레길’이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이 브랜드가 전 국민적으로 엄청난 히트를 치다 보니, 어느새 전국적으로 ‘길게 걷는 산책로나 등산로’ 전체를 뜻하는 대명사처럼 쓰이게 된 것입니다. 제주올레라는 말에는 ‘제주에 올래?’라는 초대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합니다.

    4) 아쉬움과 새로운 희망

    제주 토박이로서 전통적 의미의 올레가 사라져 가고 잊혀져 가는 현실에 아쉬움이 짙게 남습니다. 하지만 순기능이 크게 있기에 아쉬운 한 켠을 메꿀 수 있어서 다행으로 여깁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는 현재 제주의 올레길 정비, 해안 청소, 올래길과 접한 마을 주민들과의 상생을 위한 아이템 개발 등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들은 제주 관광의 주요 문화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제주올레가 제주를 넘어 국제적 네트워크를 통해 제주 올레를 해외로 확장해 나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2. 정낭과 정주석, 바람의 섬이 만들어낸 과학적 구조와 아날로그 신호

    육지의 전통 가옥을 보면 나무로 짠 튼튼하고 빽빽한 대문이 집안을 꽉 막고 있지만, 제주의 시골집 입구에는 사방이 막힌 대문이 없었습니다. 대신 집 입구 양쪽에 구멍이 세 개씩 뚫린 커다란 돌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긴 나무 장대를 가로로 걸쳐두었습니다.

    이때 구멍 뚫린 돌기둥이나 나무기둥을 ‘정주석’ 또는 ‘정주목’이라 부르고, 그 사이의 나무 장대를 ‘정낭’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주목 없이 돌담 자체를 지지대 삼아 정낭을 얹거나 구멍에 끼워 사용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1) 정낭의 역할

    정낭’은 제주 전통가옥의 정식 대문입니다.

    단순히 기다란 장대 하나에 불과하지만, 정낭은 실제적인 대문과 울타리 역할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과거 중산간 지역에서는 소나 말을 방목하여 키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을길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가축들이 집 마당 안으로 불쑥 들어와 텃밭의 농작물을 망치거나 초가집을 훼손하는 것을 이 정낭이 완벽하게 차단해 주었습니다.

    2) 제주에 대문이 없었던 이유

    제주에는 왜 육지처럼 번듯한 대문이 없었을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제주의 거센 ‘바람’ 때문입니다. 사방이 꽉 막힌 대문은 사철 몰아치는 제주의 강한 태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문짝이 뜯겨 나가거나 돌담까지 무너뜨리기 십상입니다. 제주 사람들은 돌담을 쌓을 때처럼, 대문을 만들 때에도 자연과 싸우기보다 순응하는 법을 택했습니다. 나무 장대 몇 개로 이루어진 정낭은 바람이 아무리 세게 불어도 그 사이로 바람을 유유히 흘려보내기에 태풍에도 끄떡없는 가장 완벽한 대문인 셈입니다.

    3. 숫자와 위치로 소통하는 아날로그 메신저

    정낭이 가진 가장 흥미롭고 아름다운 점은 바로 이 나무 장대의 개수와 위치를 통해 이웃과 소통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스마트폰의 프로필 상태창이나 메신저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알리듯, 옛 제주 사람들은 정낭의 개수로 집주인의 현재 상황을 이웃들에게 실시간으로 전했습니다.

    1)정낭이 모두 내려져 있는 경우 (0개)

    집 안에 사람이 있으니 누구든 편하게 들어오라는 환대의 표시입니다.

    2) 정낭이 1개 걸려 있는 경우

    “집주인이 지금 아주 가까운 이웃집에 잠시 마실을 갔거나, 동네 거까이서 볼 일 보러 갔으니 곧 돌아옵니다.”라는 뜻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주인을 만날 수 있다는 다정한 안내문인 것이죠.

    3) 정낭이 2개 걸려 있는 경우

    “지금 집에서 조금 떨어진 밭에 일을 하러 나갔거나 멀리 나무를 하러 가서, 오후 늦게나 저녁때가 되어야 돌아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다음에 다시 찾아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4) 정낭이 3개 걸려 있는 경우

    “지금 먼 곳에 있는 다른 마을에 가거나, 며칠 동안 집을 비웁니다.”라는 뜻입니다.
    장대 3개가 꽉 채워져 걸려 있으면 이웃들은 집안에 아무도 없음을 인지하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5) 정낭을 1개 또는 2개만 사용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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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는 1개 또는 2개만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정낭을 가로로 걸치면 집에 늦게 돌아온다는 뜻이고, 사선으로 비스듬히 걸치면 금방 돌아온다는 뜻이었습니다.

    6) 종합

    이처럼 정낭은 단순한 나무 장대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는 소리 없는 언어이자 가장 따뜻한 아날로그 메신저였습니다.

    4. 정낭이 증명하는 제주의 위대한 가치, 신뢰와 삼무(三無) 정신

    1) 역사 기록 속의 삼무

    1704년에 이형상이 제주 목사로 부임하던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저술한 제주도 지방지인 『남환박물』 에 기록한 것을 번역한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제주도의 토질이 척박해서 백성들은 가난한 삶을 살았다. 땅에는 바위와 돌이 널려 있고 흙이 덮인 곳이 드물어서 삼과 면화를 기르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의복과 음식이 항상 부족했다. 의복과 음식은 소박했으며,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다. 이렇듯 제주도 백성들은 항상 가난에 시달렸지만 물건을 훔치는 자가 없었다. 말이나 소, 농기구, 곡물을 들에 방치하여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다.』

    보안 기능이 없는 정낭이 대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주의 ‘삼무(三無) 정신’ 덕분입니다. 제주의 삼무는 ‘도둑이 없고, 거지가 없으며, 대문이 없다’는 뜻입니다.

    2) 현대의 기술적 첨단 보안과 제주의 자치적 보안 시스템

    여기서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현대 과학의 패러다임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전 세계 정보보안 시장의 핵심 철학은 ‘제로 트러스트(Zero Trust)’입니다. 직역하면 “아무도 믿지 마라(Zero Trust), 그리고 항상 검증하라(Always Verify)”라는 뜻입니다.

    현대의 제로 트러스트 보안 시스템은 내부에 이미 들어와 있는 최고 경영자나 신뢰받는 직원이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절대 신뢰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불신 장벽에서 출발합니다. 방 안의 서류 하나를 열어볼 때마다, 컴퓨터 시스템에 접속할 때마다 끊임없이 생체 인증(지문·안면 인식)을 요구하며 “당신이 정말 권한이 있는 사람이 맞는지”를 매 순간 가혹하게 검증하는 기술입니다.

    불신이 깊어질수록 인간 사회가 감당해야 할 시스템 구축 비용과 심리적 피로감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마련입니다. 물리적인 형태만 보면 제주의 정낭은 이 제로 트러스트 관점에서 ‘보안 점수 0점’의 허술한 바리케이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제주의 정낭은 기술의 복잡성으로 불신을 제어하는 현대 공학의 패러다임을 정면으로 뒤집는 완벽한 ‘상호 신뢰의 공동체 규범’을 보여줍니다.

    결국 정낭은 기계 장치로 인간을 감시하는 삭막한 기술이 아니라, ‘정직’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의 힘으로 공간을 완벽하게 방어해 낸 인류 역사상 가장 고차원적인 ‘제로 비용의 인문학적 보안 시스템’이었던 셈입니다.

    3) 소결

    정낭은 힘으로 침입자를 때려눕히거나 시스템적으로 차단하는 ‘강제 보안’이 아닙니다. 정낭은 도둑을 막기 위한 ‘차단막’이 아니라, 이웃 간의 단단한 ‘신뢰와 약속’이었습니다.

    “지금 집을 비우니 안으로 들어오지 말아 달라.”는 주인의 무언의 요청을, 마을 사람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존중해 주었던 것입니다. 도둑이 없다는 상호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열려 있는 믿음직한 정낭이라는 대문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높은 철제 대문을 세우고, 삼중 잠금장치를 달고, CCTV를 24시간 가동하면서도 늘 불안해하며 살아갑니다. 아무도 믿지 말고 끊임없이 검증하라는 제로 트러스트의 철저한 불신 속에 스스로를 격리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에 대해 제주의 정낭은 완전히 반대의 결론을 내려주며, ‘진정한 안전과 평화는 철저한 감시가 아니라 서로를 믿는 신뢰에서 온다.’는 깊은 울림을 전해줍니다.

    5. 올레에서 마주하던 그리운 추억들

    돌담을 따라 굽어지는 올레길을 걸어 들어가면, 고풍스러운 초가집이 보이고, 그 입구 한쪽 끝에 단정하게 성낭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집에 돌아 왔을 때에, 반갑게 맞아주시던 할머니의 환한 미소가 고스란히 겹쳐옵니다.

    한 올레 안에는 여러 집들이 모여 있는 경우가 많으며 대개는 작은 골목이입니다.

    조부모님 집 앞의 올레는 비교적 넓고 꽤 긴 편이었습니다. 덕분에 또래의 마을 아이들이 여럿이 모여서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하고, 때로는 연날리기도 했던 장소여서 꽤나 많은 추억이 쌓인 공간입니다.

    가을이면 초가집 지붕에 얹은 묵은 새(‘띠’의제주 방언)를 교체하고 난 뒤에 지붕을 튼튼히 묶을 용도로 길게 집줄(‘새’로 만든 동아줄)을 꼬아 만들었습니다. 이때에 공동 작업으로 어른들과 함께 ‘호랭이’를 돌리던 올레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호랭이’는 끝의 구부러진 갈고리에 새끼줄을 걸어서 ‘ㄴ’자 형태의 손잡이를 돌리며 집줄을 꼬아나갈 때 쓰는 도구입니다. 제주 사투리인데 ‘우리말 샘’ 등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진 설명: 성읍 민속마을에서 초가 지붕 집줄 묶기과 집줄 만들기 시연 중이며, 여성 두 명이 호랭이를 돌리고 있는 모습임)

    6. 맺음말: 내 삶의 울타리를 허물고, 신뢰의 올레길을 걸을 시간

    선조들은 돌담에 구멍을 내어 바람을 통과시키는 유연함의 지혜를 보였습니다. 이제 우리도 현대의 거센 변화 속에서, 내면의 높은 벽을 허물고 미래를 바라보며 세계와 상생하고 공존하는 지혜를 이어가야 할 때입니다.

    비록 일상에서 진짜 정낭을 보기는 어려워졌지만, 제주 사람들이 수백 년간 지켜온 단단한 상생과 신뢰의 정신은 여전히 검은 돌담 사이에 따뜻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제주에 오실 기회가 있다면, 화려한 관광지 대신 제주의 옛 숨결이 담긴 조용한 시골 마을의 올레를 천천히 걸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대문 없이 열려 있는 제주의 정서가 지친 여러분의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줄 것입니다.

    이처럼 대지 위에서 이웃을 향해 빗장을 풀었던 제주인들의 위대한 신뢰와 상생의 법도는, 섬을 둘러싼 거칠고 가혹한 또 다른 영토인 ‘바다’ 위에서 더욱 경이로운 공동체 문명으로 피어납니다.

    다음 5회에서는 돌이 많고 바람이 몰아치는 삼다(三多)의 혹독한 결핍 속에서, 제주인들이 어떻게 절망을 딛고 뚝심 하나로 생존의 뿌리를 내렸는지 풀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집약되어 전 세계가 경탄하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의 위대한 연대와 상생의 사회학>을 품고 찾아오겠습니다.

    제주 오리진(Jeju Origin)

    참고 자료
    * 제주 부사 이형상이 쓴 제주도 박물지, 남환박물, 한경아
    * (사)제주올레 홈페이지

  • <제3회> 제주 돌담의 물리학: 구멍 숭숭 뚫린 돌담이 태풍을 이겨내는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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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제주의 진짜 숨은 이야기를 전하는 ‘제주 오리진(Jeju Origin)’입니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화산섬 제주의 땅속이 어떻게 ‘다공성 화산회토’와 ‘송이(Scoria)’라는 천연 오리털 패딩을 입고 ‘맨도롱한 온기’를 스스로 유지하는지 알아 보는, <제주의 대지가 품은 ‘맨도롱한’ 비밀과 축복>을 함께 풀었습니다.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생명이 살기 좋은 온도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제주의 흙은 그 자체로 거대한 자연의 지혜였습니다.

    오늘은 그 대지의 온기를 품은 채, 사방에서 불어오는 거센 섬바람과 매년 찾아오는 강력한 태풍으로부터 제주의 삶을 지켜내 온 거대하고 경이로운 구조물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바로 제주의 집 주위와 들판을 묵묵히 두르고 있는 ‘제주 돌담’입니다.

    시멘트 한 줌 바르지 않고 거칠게 툭툭 쌓아 올린 것처럼 보이는 이 돌담에는, 현대의 첨단 건축공학으로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놀라운 ‘유체역학의 물리학’이 숨어 있습니다. 거센 태풍의 한복판에서도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바람의 길을 열어주며 자리를 지켜낸 제주 돌담의 비밀을 지금부터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제주 돌담의 형태와 오늘의 이야기

    제주의 돌담들은 그 쓰임새에 따라 울담, 밭담, 산담, 잣담, 원담, 성담 등 여러 형태가 있지만, 오늘은 울담과 밭담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

    (1) 바람을 막고 경계를 나누는 ‘울담’

    울담은 집의 경계를 나누고 집안에 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았습니다.

    (2) 토양과 농작물을 지키는 ‘밭담’

    밭담은 농사를 짓는 밭에 타인 소유의 농지와 경계를 나누며, 말이나 소 또는 야생동물들이 농작물을 해치는 것을 막고, 제주의 거친 바람에 흙이 날려버리거나 농작물이 쓰러지는 것을 줄이려 하였고, 때로는 비에 토양이 쓸려나가는 것을 방지하려고 쌓았습니다.

    (3) 엉성함 속에 감춰진 외담의 미학

    이 돌담들은 두텁게 쌓는 산담, 원담, 성담들과 달리 한 줄로 쌓는 외담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모양을 다듬어서 규격화하는 게 아니고 돌이 생긴 모습 그대로 쓰다 보니, 크기와 모양이 제멋대로인지라 불규칙하게 얹혀 있고 그 사이로 반대편 풍경이 훤히 보일 만큼 구멍이 숭숭 뚫려 있습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마치 성의 없이 대충 쌓아 놓은 것처럼 엉성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2. 제주 돌담에 대한 어린 시절의 추억들

    시골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울담 너머 이웃집에는 제법 큰 앵두나무가 있었습니다. 열매가 빨갛게 익을 무렵에는 그 새콤달콤한 유혹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면 이웃집 어른들이 볼까 봐 마음졸이며 울담 구멍 사이로 팔을 쑥 집어넣어서 몰래 앵두를 따먹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 글을 쓰고 나서 채 한 달도 되지 않는 6월 중순경이면 따먹을 때가 되겠군요.

    앞집 아이와 또는 옆집 아이들하고 울담 구멍사이로 얼굴을 보며 웃으며 떠들고, 유리구슬과 종이딱지를 교환하던 생각들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어제 일처럼 느껴집니다.

    이렇듯 외담으로 쌓은 돌담은 온통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건너편과 고스란히 소통되는 공간입니다.

    3. 흑룡만리(黑龍萬里), 제주의 대지를 지키는 검은 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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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를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면, 검은색 현무암으로 쌓은 돌담들이 불규칙한 모양으로 끝없이 이어지며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검은 용이 대지 위를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듯한 장관을 연출합니다. 그 길이가 자그마치 1만 리(약 4,000km)에 달한다고 하여 선조들은 이를 ‘흑룡만리(黑龍萬里)’라 불렀습니다. 실제로는 2만 2,000여km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므로, 이는 중국의 만리장성과 비슷한 길이가 됩니다.

    (1) 흑룡만리 돌담의 역사

    ‘탐라지’ 풍속편에 의하면, 김구가 1234년에 제주판관으로 임명되어 6년을 제주에서 보내면서 풍속을 규찰하고 단속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김구가 판관이 되어 백성의 고통을 물어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로써 제주의 돌담 역사는 약 800여년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의문점: 돌담이 태풍을 견디는 비결은?

    앞서 얘기한 대로 이 돌담들은 단순히 땅의 경계를 나누는 선이 아니었습니다. 거센 바닷바람에 집을 보호하고, 밭의 흙과 씨앗이 날아가는 것을 막아주는 방풍벽이자, 애써 키운 농작물을 보호하는 생명선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이한 점이 있습니다. 육지의 담장들은 시멘트나 진흙을 꼼꼼히 채워 바람 한 점 통하지 않게 단단하게 쌓아 올리는데, 제주의 돌담은 손으로 툭 밀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집과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태풍에 무너질 때도, 이 구멍 숭숭 뚫린 돌담들은 끄떡없이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도대체 어떤 원리가 숨어 있는 걸까요?

    4. 돌담 구멍의 ‘유체역학’: 정면 충돌을 피하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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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으로 밀면 넘어질 듯 엉성한 돌담이 태풍을 견디는 첫 번째 비밀은, 바람을 ‘막아서는’ 대신 ‘흘려보내는’ 길을 선택한 바로 그 ‘비어 있는 구멍’에 있습니다.

    물리학과 유체역학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공기)은 거대한 에너지를 가진 유체입니다.

    틈새 없이 꽉 막힌 단단한 시멘트 벽은 강한 태풍이 불어올 때 바람의 압력(풍압)을 온몸으로 정면에서 받아내야 합니다. 바람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벽이 받는 압력은 그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여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결국 바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벽 전체가 통째로 넘어지거나 균열이 가게 됩니다. 정면으로 맞서다 부러지는 셈입니다.

    반면, 제주의 돌담은 태풍이 몰아치면 그 거센 바람을 정면으로 막아서지 않습니다. 대신 돌과 돌 사이에 뚫린 수많은 구멍 속으로 바람이 통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공기역학적으로 바람이 돌담의 좁은 구멍들을 통과할 때 마찰과 와류(소용돌이)가 발생하면서, 바람이 가진 거대한 운동 에너지가 순식간에 분산되고 약화됩니다. 즉, 돌담을 통과하기 전에는 초속 30~40m에 달하던 파괴적인 태풍이, 구멍들을 거치고 나면 어느새 야성을 잃고 온순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5. 중력과 마찰력이 빚어낸 ‘허튼층쌓기’의 구조학

    제주 돌담이 무너지지 않는 또 다른 비밀은 구조적 안정성에 있습니다. 제주의 전통 돌담은 네모반듯하게 깎인 돌을 규칙적으로 쌓는 대신, 각기 다른 크기와 형태를 가진 불규칙하고 거친 현무암들을 가로세로 줄눈을 맞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대로 흐트려 쌓는 ‘막쌓기(허튼층쌓기)’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네모난 돌들은 지진이나 충격이 오면 한꺼번에 미끄러지며 무너지기 쉽지만, 거친 표면을 가진 현무암들은 서로의 요철(튀어나오고 들어간 부분)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게 됩니다. 접착제를 쓰지 않는 대신, ‘돌 자체의 무게(중력)’와 돌과 돌이 맞닿은 면의 ‘마찰력’만으로 지탱되는 구조입니다. 바람이 불어와 돌담이 미세하게 흔들릴 때, 이 불규칙한 돌들은 오히려 틈새를 찾아 더 단단하게 가라앉으며 서로를 꽉 움켜쥐는 독특한 역학적 성질을 가집니다.

    6. 비움의 물리학: ‘베르누이의 정리’가 적용되는 고정력

    앞서 살펴본 유체역학과 구조학의 원리를 종합하면, 여기에는 현대 물리학의 정수인 ‘베르누이의 정리(Bernoulli’s theorem)’가 경이로울 정도로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제주대학교 대학원의 한 연구 논문에서는 이 흥미로운 상호작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출처: 제주대학교 대학원 학위논문 내용 참고

    “이러한 베르누이의 원리를 제주 돌담에 적용한다면, [그림 Ⅳ-19]에서와 같이 돌담의 틈새를 지나는 바람의 경우, 주위의 공기에 비하여 큰 속력으로 돌담 틈새를 지나므로 돌담의 틈새는 주위보다 낮은 압력이 되며, 주위와의 압력차로 인한 힘이 돌담의 틈새 방향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압력차로 인한 틈새 방향으로 향하는 힘은 돌을 누르는 힘으로, 이 힘은 돌의 무게에 의하여 돌들 사이의 접촉면에 수직으로 작용하는 힘과 함께 수직항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마찰력을 크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상 논문 인용)



    논문의 분석처럼, 바람이 좁은 돌 틈을 통과할 때 속도가 빨라지면서 구멍 내부의 압력이 급격히 낮아집니다. 이때 압력이 높은 바깥쪽 공기가 돌담 중심 방향으로 돌들을 ‘꾸욱 움켜쥐고 누르는 힘’을 발생시킵니다. 이 힘이 돌의 무게(중력)와 결합하여 돌과 돌 사이의 마찰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제주의 돌담은 바람이 불어도 그 형태가 바람의 저항을 유연하게 흘려보내는 구조를 띠고 있어서 담장이 받는 전체적인 저항은 애초에 최소화 됩니다.게다가 울퉁불퉁하고 돌 자체에 미세한 구멍(기공)이 많은 현무암이기에 돌들끼리의 마찰력은 배가되고,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상태에서 중력과 내력이 동시에 작용하니, 태풍 속에서 돌담은 무너지기는커녕 더욱 단단한 요새로 변신하게 됩니다.

    바람이 돌담을 무너뜨리려고 거세게 몰아칠수록, 역설적이게도 유체역학적 압력차에 의해 돌담은 스스로를 더 단단하게 결속시킵니다. 외부의 충격을 흡수하여 스스로 구조적 균형을 찾아가는 일종의 ‘유연한 완충 시스템’인 셈입니다.

    7. 우주에서 활용할 ‘제주 돌담’의 지혜

    매우 흥미로운 신문기사가 있어서 간략히 소개합니다. 원문과 관련 사진을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경향신문, 2024.08.11.), (어린이 조선일보, 2025.05.29.)

    앞으로 달 기지에 수시로 왕복을 하려면, 로켓 이착륙 시 로켓 엔진 때문에 폭풍이 발생하면서 달 기지와 장비, 사람을 강타할 공산이 큽니다. 또한 달에서는 1년에 1,000번 이상 모래 폭풍이 불 정도로 자주 발생한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전통적인 ‘제주 돌담’ 축조 방식과 유사하게 이착륙장 주위를 원형으로 ‘담장’을 쌓자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스위스 연구진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합니다.

    스위스 연구팀 100여 명이 세계 곳곳에 담장을 찾아 나섰는데, 처음에는 콘크리트 장벽이나, 철근과 나무로 만든 장벽이 후로로 뽑혔으나, 달의 폭풍을 견딜 수 없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큐멘터리에서 제주 돌담을 보고 착안하였으며, 연구팀이 달과 비슷한 환경을 만든 뒤, 그곳에서 제주 돌담을 쌓는 실험에 성공했고 그 돌담은 거센 인공 바람에 끄떡없었다고 합니다.

    거센 바람을 구멍 사이로 유연히 흘려보내는 제주 돌담의 심성이 조만간 우주의 모래 폭풍까지 잠재우게 될 듯합니다.

    8. 생명을 살리는 ‘비움’과 ‘소통’의 로컬 정서

    인간의 삶과 정서 역시 이 돌담의 과학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과거 척박한 화산섬에서 거친 바다와 태풍을 마주하며 살아야 했던 제주 사람들은 자연을 정복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유연하게 비켜서서 소통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돌담의 구멍은 단순히 바람만 흘려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울담 너머로 이웃집의 안부를 확인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대화의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단단하고 묵직한 돌을 가지고 가장 부드럽고 유연한 ‘비움’의 미학을 실천한 제주 돌담은, 거친 환경을 슬기롭게 극복해 낸 로컬의 가장 아름다운 유산입니다.

    9. 글을 마치며: 꽉 막힌 벽 대신, 마음의 돌담을 쌓을 시간

    첫 회 이야기에서 만나본 마음의 밸런스를 잡아주는 ‘맨도롱한 온기’, 2회에서는 대지가 품은 다공성의 단열 비밀과 축복‘ 그리고 오늘은 거센 태풍을 유연하게 흘려보내는 ‘돌담의 유체역학’까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주가 우리에게 건네는 온기와 과학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메시지로 귀결됩니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일상의 온도를 유지하고, 삶에 들이치는 모진 시련의 바람 앞에서는 온몸으로 맞서 상처받기보다 내 마음속에 작은 ‘구멍’ 하나를 내어 유연하게 흘려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차가운 세상의 벽 앞에 힘겨워하고 있다면, 내 마음의 담장을 시멘트벽처럼 꽉 막아두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가만히 돌아보면 어떨까요? 거센 바람의 길을 열어주어 스스로를 지켜내는 제주의 돌담처럼, 조금은 비워두고 조금 더 유연해지는 ‘맨도롱한’ 하루를 보내시는 것은 어떨지요?

    그동안 ‘제주 오리진(Jeju Origin)’의 시리즈 연재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제주의 매우 독특한 문화인 <신뢰로 열리는 문, 제주의 지혜 ‘정낭’>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앞으로 ‘제주 오리진(Jeju Origin)’은 더욱 깊이 있고 매혹적인, 가장 제주다운 가치와 원형의 기록을 담은 새로운 이야기로 여러분을 찾아오겠습니다.

    제주 오리진(Jeju Origin)


    ■ 참고 문헌 (References)

    * 홍경모, 「과학교육 학습자료로서의 제주 전통 돌담에 대한 연구」,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 경향신문, 미래 달 로켓 이착륙장에 ‘제주 돌담’ 쌓자고?…이유는 ‘이것’, 2024.11.08.

    * 어린이 조선일보, 스위스가 달에 짓는 로켓 공항! 구멍 숭숭 ‘제주 돌담’에서 아이디어 얻었어요!, 2025.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