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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회> ‘제주 해녀’의 위대한 연대와 상생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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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제주의 삼다(三多)를 말할 때 돌, 바람, 여자가 많다고 가볍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옛 선조들이 정의한 삼다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풍요가 아니라 철저한 ‘결핍’이었습니다. 농사지을 흙이 없을 정도로 지천에 널린 돌, 삶을 위협하는 바람, 그리고 바다에 남편과 아들을 빼앗겨 홀로 남은 여성들이 많다는 슬픈 뜻이었습니다.

    제주는 이 세 가지 결핍 중에서도 특히 ‘남성의 부재’라는 가장 아픈 결핍을, 섬을 이끌어가는 강력한 원동력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바로 유연한 뚝심으로 유네스코 유산이 된 ‘제주 해녀’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회에서는 신뢰의 메신저이자 소통의 철학이 담긴 ‘정낭과 삼무(三無) 정신’을 통해,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서로를 울타리 삼아 도둑과 대문 없이 살아온 제주 공동체의 위대한 사회학적 자치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서로에 대한 단단한 믿음이 있었기에 제주인들은 사방에서 들이치는 섬의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었지요.

    오늘 제주 오리진(Jeju Origin) 제5회에서는, 제주의 결핍이 어떻게 전 세계가 경탄하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제주 해녀’라는 위대한 유산으로 변모했는지, 그 숨겨진 통계와 인문학적 반전의 비결을 찾아 드립니다.

    지형과 기후가 주는 물리적 한계와 사회가 옭아매는 억압들을 유연한 소통 구조로 이겨낸 선조들의 지혜는, 대지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생존 방식을 가장 극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걸어 들어갈 이번 여정은, 제주를 상징하는 가장 오래된 단어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가슴 아픈 개념인 ‘여자가 많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삼다(三多)의 본질: 풍요가 아닌 가혹한 환경적 결핍의 서사

    우리는 흔히 관광지의 매력으로 삼다를 이야기하지만, 역사와 지질학의 렌즈로 들여다본 삼다는 인간의 생존을 끊임없이 위협하던 거대한 장벽이었습니다.

    (1) ‘돌이 많다는 것

    농사지을 기름진 흙이 넉넉지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2회차에서 다루었듯 다공성 현무암으로 가득한 땅은 물을 머금어 지하수를 키워내는 축복의 이면 속에, 지표면의 물을 너무 빠르게 통과시켜 버려 논농사를 지을 수 없게 만드는 농업적 결핍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빗물이 고이지 않고 지하로 스며드는 척박한 지표면 환경 탓에, 제주의 선조들은 벼농사 대신 거친 밭농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바람이 많다’는 것

    사시사철 몰아치는 칼바람과 태풍이 인간이 지은 집을 무너뜨리고 밭의 작물을 쓸어버리는 파괴적인 에너지가 되어 도처에 도사리고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제주에서 큰 바람에 의해 농작물이 피해를 입어 기근을 겪고 있기에 구휼을 청한다는 상소들이 수 없이 이어졌고, 심지어 조정에서는 굶어 죽은 자들이 많았기에 영혼들을 위해 제를 지내도록 하고 제문을 내리는 경우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한 예로, 정조실록(정조 20년 4월 3일, 1796년)의 기록에 의하면, 전라도 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탐라의 기근으로 곡식을 운반하고 나눠주는 문제에 대해 상소하였는데,

    “탐라(耽羅)에 몇 해 동안 계속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하게 되었으므로“,

    “다만 작년에 제주도의 호구가 다수 감소된 것은 오로지 요청한 곡물이 풍부하지 못하고 구제할 때 적당한 시기를 놓친 데에서 연유되었습니다.”라고 하여 제주의 식량이 넉넉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여자가 많다’는 것

    삼다(三多)의 하나인 ‘여자가 많다’는 것은 단순한 인구학적 통계가 아니라, 바다가 남성들을 삼켜버린 제주의 눈물겨운 결핍과 비극의 역사였습니다.

    조선시대 제주를 기록한 문헌들을 보면, 섬의 인구 중 여자의 비율이 남자를 압도했다는 기록들이 등장합니다. 이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제주의 남성들은 거친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태풍과 풍랑을 만나 표류하거나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게다가 자연재해가 심하여 농사를 망치기 일쑤인지라 기근을 견디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사리사욕을 채우는 관리들이 전복 등 해산물을 조정에 진상한다는 명목으로 필요 이상 가혹한 수준의 공물을 요구하며 끝없는 수탈을 자행했습니다.

    남자들은 공물의 할당량을 채우려면 위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장시간 잠수를 해야 하였기에, 과로와 병으로 쓰러지고 바다에서 숨지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결국은 살아남은 남성들마저 견디다 못해 섬 밖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섬을 탈출하여 타지에서 작은 어선에 의지하여 해산물을 채취하며 유랑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삼다(三多)의 통계적 수치는 결코 다정한 낭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수치가 문헌에 등장하는 350년 전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뒤에는 화산섬의 거친 환경과 가혹한 봉건 제도가 낳은 서글픈 비극이 숨어 있습니다.

    고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제주에서 전복을 따는 것은 여자인 ‘해녀’가 아니라 ‘포작인(鮑作人)’ 혹은 ‘포작간’이라 불린 남성들이었습니다.

    당시 왕실에 바칠 전복을 채취하던 제주의 남성들(포작인)은 무리한 심해 잠수와 거친 풍랑 속에서 수없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게다가 가혹한 공물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남성들이 목숨을 걸고 대거 섬을 탈출(밀항)하면서, 조선 정부가 200년간 ‘출륙금지령’을 내려야 했을 정도로 섬 안의 남성 인구는 극도로 황폐화되었습니다.

    결국 자연적 재해와 사회적 제도 속에서 사라진 남성들의 빈자리를 채우고, 섬의 경제와 공동체를 온전히 지탱해야 했던 것은 고스란히 제주 여인들의 몫이었습니다. 삼다의 ‘여다(女多)’는 낭만이 아니라, 남겨진 여인들이 대지와 바다를 짊어져야 했던 거대한 책임과 뚝심의 역사적 증거인 셈입니다.

    (4) 소결

    결국 ‘삼다’는 자연이 준 축복이 아니라, 사방이 막힌 화산섬에서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환경적 결핍의 총체였습니다. 그러나 제주인들은 이 세 가지 결핍 앞에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돌이 많으면 돌담을 쌓아 바람을 흘려보냈고(3회차 ‘제주 돌담의 물리학’), 남성 노동력이 부족해진 자리는 제주의 여인들이 스스로 대지와 바다를 책임지는 강인한 생산의 주체로 우뚝 서며 섬의 경제를 지탱하는 뚝심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결핍이 거대할수록, 그것을 돌파해 내는 제주인들의 정신적 역량 또한 더욱 단단해졌던 것입니다.

    2. 기록으로 보는 남자의 부족과 여자의 무거운 짐

    (1) 사례 1

    『남환박물(南宦博物)』은 숙종 30년(1704)에 이형상(李衡祥)이 제주 목사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저술한 제주도 지방지입니다. 이를 번역하여 집필한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장수하는 노인이 많고 여성들이 생계를 책임진 제주:

    제주도는 육지와 달리 풍토가 특수했기 때문에 관습과 풍속이 매우 독특하였다고 한다. (중략)

    제주도에는 오래전부터 질병이 적어서 일찍 죽는 사람이 없고 8~90세까지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600년대 전염병이 돌아서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는데도 불구하고 노인잔치를 열면 80세가 넘는 수백 명의 노인이 방문했다. 그들은 모두 건강하고 기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매년 배가 침몰하여 죽는 사람은 매우 많았다. 보통 남자들이 배를 타고 나가 일을 하므로 남자가 귀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귀하다 보니 여자들이 지는 부역은 매우 무거웠다. 관아에 바치는 미역과 전복들은 모두 여성들이 구해서 바쳤다. 보통의 살림집에서도 샘에서 물을 길어오는 일이라든지 곡식을 거두는 일, 땔감을 구하는 일 등 모든 힘든 일은 여인이 담당했다.

    제주도의 토질이 척박해서 백성들은 가난한 삶을 살았다.

    위와 같이 제주인들은 원래 강건한 체질로 장수하였지만, 거친 바다의 풍랑으로 많은 생명을 빼앗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사례 2

    (『제주여성사료집』을 인용한 <제주의소리> 기사 재인용)

    『수록 내용중 조선 숙종대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이형상이 훗날 편찬한 ‘남환박물’ 한 구절을 살펴보면 외지인이 바라본 제주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한 것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당시 이형상은 이렇게 묘사했다. 남아를 낳으면 ‘고래밥’이라 말하고 여아를 낳으면 기뻐한다.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다. (매년 패가 패몰하여 죽는 자가 심히 많은 까닭에 남자가 귀하고 여자가 천한 것이다. 아주 잔약한 자 또한 2~3인의 처를 가지게 되고, 혹은 10여인의 처를 둔 사람도 있다. 남아를 낳으면 즉 고래밥이라 말하고 심히 애중하지 않는다. 오직 여아를 낳은 연후에야 기뻐 말하기를 이는 우리를 봉양할 것이라 하니, 정상(情狀) 또한 측은하다)

    이형상이 바라본 제주남성은 ‘고래밥’이라고 제주사람 스스로 말할 만큼 바닷일을 하다 물에 빠져 죽는 희생자로서 그 또한 측은한 삶이었음을 지적하고 있지만, 오직 여아를 낳은 후에야 기뻐했다는 말 속에는 제주여성들의 탄생이 진정한 기쁨이 아닌 남성가장이 없는 가정을 평생 꾸려나가야 할 그 무거운 짐을 안타까이 여기고 있음도 엿보인다.』

    3. 제주와 외부간 단절의 역사: 출륙금지령

    제주인들이 조정에 내는 공물에 대한 압박을 알 수 있는 예를 보겠습니다.

    영조실록 127권, 영조 대왕 행장(行狀)을 보면,

    『동10월(冬十月)에 제주(濟州)에서 지실(枳實)을 바쳤는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듣건대, 관에서 탱자나무를 세어 백성에게 그 열매를 내라고 요구하므로 백성이 혹 나무를 흔들어 절로 말라 죽게 한다 하니, 어찌 딱하지 않은가? 제주로 돌려보내고 다시는 바치지 말게 하라.’하셨다.』

    (『국어사전』, 지실(枳實): <명사>, <한의>, 덜 익은 탱자를 썰어 말린 약재. 성질은 약간 차고, 가래를 없애며 배뇨 작용과 적취(積聚)를 다스리는 데 쓴다.)

    전복과 기타 해산물 및 약재 등 지나친 공물을 바치기에 버겁고, 중앙 관리와 지방 토호의 이중 수탈, 왜구의 빈번한 침입, 부역의 증대 등을 견디다 못해 제주를 탈출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타 지역에 유민의 수가 증가하고 제주 인구는 감소하였습니다.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제주는 지정학적으로는 일본과 중국을 잇는 거점 지역으로써 방위 전략상 중요하였고, 경제적으로는 명과의 말 무역에 있어서 말의 생산지이자 제주 지역 특산물 또한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제주 인구의 감소는 특산물의 진상, 군액의 축소 등으로 재정의 감축 우려가 심각한 과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제주 인구의 감소를 막기 위해서 특단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제주도민이 육지로 나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정책인 「출륙금지령」을 내린 것입니다.

    제주도민의 출륙을 막기 위해 선박 출입을 엄격히 조사한 후 ‘도항 증명서’를 발급하거나 불법적으로 출륙한 포작인들을 잡아 쇄환시키는 등의 강력하고도 적극적인 통제책을 펼쳤습니다.

    심지어 국법으로 제주도 여성은 육지인과의 혼인을 금하도록 정하였고, 제주도에서는 어선 건조마저 금지하였습니다.

    이 정책은 1629년(인조 7년)부터 순조 23년(1823)까지 약 20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강경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말엽 제주도의 인구수는 반으로 급격히 줄어 들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여러 곳에서, 당시의 제주인이 만든 어선은 비록 작았으나 워낙 빨라서, 유랑 지역의 관아에서 불법 출륙한 포작인들을 나포하여 돌려보내려고 시도를 할 때마다 번번히 실패하여 뾰죽한 대책이 없었을 정도로 제주의 어선 건조 기술과 항해 기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출륙금지령으로 인해 이전의 기술이 단절되었습니다. 반면에 외부와 고립된 생활을 하였기에 공동체 의식이 강화되고 제주 언어의 고유성과 민간신앙 및 제주 풍속이 보존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4. 통계로 본 제주의 인구 성비

    (1) 제주도 인구 및 성비 추이

    (2) 통계의 분석

    ① 현종실록(현종 13년)의 기록에 의하면, 대체로 호적에 들지 않은 여자가 매우 많은데, 호적에 있는 숫자만 기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남초 현상은 여자의 기록 누락이 원인으로 보입니다.

    이를 감안하여, 당시의 전국 성비를 100이라고 가정하여 환산한다면 제주 성비는 62.79에 해당됩니다. 이처럼 실제 제주의 성비는 매우 극심했었다고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사록에서도 제주에 남자가 극도로 부족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② 조선시대에는 제주가 전라도에 편입되어 있었고, 이후 전라남도에 속해 있다가 1946년도에 제주도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었습니다.

    이 때문인지 통계청의 인구조사에서도, 제주도를 1940년부터 행정구역을 구분하였기에 이때부터 성비 파악이 가능하였습니다.

    이 자료에 의하면 현대사가 시작된 이후에도 여전히 여성이 많았으며, 점차 성비 격차가 줄어들다가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불균형이 많이 해소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맨몸과 숨통의 과학: 사선(死線)의 바다를 개척한 해녀의 생체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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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다의 결핍 속에서 피어난 제주 정신의 정점이자, 바다라는 거친 영토를 개척한 주인공이 바로 ‘해녀’입니다. 제주 해녀의 물질은 기계 장치에 의존하는 현대의 스쿠버 다이빙과 달리, 오직 자신의 폐에 담긴 한 모금의 공기(숨)에만 의존하여 수심 10미터에 이르는 연안의 수중으로 하강하는 극단의 원시적 어로 활동입니다. 여기에는 공기통 하나 없이 맨몸으로 수압을 이겨내는 해녀들만의 경이로운 인체 생리적 적응의 과학이 숨겨져 있습니다.

    수심이 깊어질수록 수압은 10미터마다 1기압씩 증가합니다. 따라서 해녀들이 바닷속으로 하강할 때, 수심 10미터만 내려가도 지상의 두 배에 달하는 기압(2기압)이 신체를 누릅니다. 해녀의 신체는 이 거대한 외압으로 인해 혈액 내 질소 농도가 급격히 치솟고 폐가 극도로 압착되는 거대한 물리적 압박을 받습니다.

    이때, 내부 압력과 외부 수압의 불균형으로 인한 ‘압력 손상(Barotrauma)’의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결과로 체온 저하, 질소 마취 및 감압병 위험 증가 등의 급격한 생리적·물리적 변화를 겪게 됩니다

    ‘상군’ 해녀들은 수심 20m까지 내려가서 물질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 세월 바다를 누벼온 베테랑 ‘상군(上軍)’ 해녀들이라 할지라도, 수심 10m를 넘어서 물질을 지속하는 것은 신체적으로 엄청난 과부하를 동반하는 버거운 일입니다.

    소수의 최고 기량 해녀들이 맨몸으로 가닿는 수심 15m까지의 잠수도 때로는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하는 극한의 작업입니다. 이 깊이에서는 무려 지상의 2.5배에 달하는 거대한 외압(2.5기압)이 자칫 사선을 넘나들 수 있는 상태를 유발합니다. 또한 장비 없이 물질하는 해녀들로서는 그 깊이까지 숨을 참고 들어가고 나오는 시간을 감안하면 더욱 극한적인 작업입니다.

    이렇듯 과학적으로 살펴보면, 우리는 해녀들이 단순히 숨을 참는 고통을 넘어 귀가 찢어지고 폐가 찌그러지는 물리적 압박을 견디며 물질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반복적 물질 과정에서 체내 조직에 과도하게 용해된 질소는 해녀들이 평생을 안고 살아가는 지독한 ‘잠수병(두통과 관절통)’을 유발하며, 이를 훈장처럼 달고 살게 됩니다.

    과거 과학적 잠수 장비나 고무 잠수복이 없던 시절, 제주의 해녀들은 오직 광목으로 만든 얇은 ‘물소중이’ 한 장만 걸친 채 겨울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따뜻한 난류 덕분에 겨울철 제주의 수온은 13℃ 안팎을 유지했지만, 진짜 지옥은 물 밖에 있었습니다. 물속에서 나오자마자 해녀들의 살을 에는 듯 몰아치는 제주의 매서운 겨울 칼바람은 체감 온도를 순식간에 영하권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체온을 보호해 줄 현대식 고무 잠수복도 없던 시절에는, 물 안팎의 극심한 온도 차이 속에서 사지가 마비되는 저체온증의 공포를 맨몸으로 버텨내야 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저체온증의 위협 속에서, 해녀들의 신체는 심장박동수를 느리게 조절하고, 사지로 가는 혈류를 차단하여 뇌와 심장 등 핵심 장기로 산소를 집중시키며, 수심이 깊어질 때 폐가 손상되지 않도록 모세혈관의 혈액을 흉강으로 보내어 압력을 견디게 하는 고도의 ‘잠수 반사(Diving Reflex)’ 메커니즘을 스스로 진화시켰습니다. 수십 년 동안 거친 바다를 드나들며 단련된 해녀들의 폐활량과 심혈관계의 적응력은, 가혹한 환경이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인류학적 증거입니다.

    6. 해녀의 역사

    (1) 고대와 중세의 자취

    많은 남성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고 조정 관리들의 수탈을 피해 도망을 가서 그 수가 줄어들자, 홀로 남겨진 채 가정을 지켜야 했던 것은 결국 제주의 여성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주 여성들은 슬퍼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남겨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스스로 거친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결핍을 위대한 유산으로 바꾼 ‘제주 해녀’ 역사의 시작입니다.

    제주의 선조들은 매번 절망 대신 경이로운 반전을 선택했습니다. 남성의 비운 자리를 채우기 위해 맨몸으로 차가운 심해에 뛰어들었던 여인들, 오직 자신의 ‘숨의 길이’만큼만 수확하며 바다를 지켜낸 상생의 과학이 바로 그것입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제주 해녀의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문자왕과 관련된 문헌에 해녀가 등장하고 고려 숙종 때인 1105년에는 ‘해녀들의 나체 조업을 금한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조선 인조 때는 제주목사가 ‘남녀가 어울려 바다에서 조업하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도 있다고 하니, 오래전부터 해녀와 해남이 함께 조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해남은 포작인(鮑作人), 포작간(鮑作干) 등으로 불렸습니다. 제주도는 고려 때부터 전복과 미역을 왕실에 공물로 받쳤는데, 미역은 주로 해녀들이 땄고 전복은 포작인들이 담당하였습니다. 공물로 바쳐야 하는 전복의 할당량이 꾸준히 늘어나자 견디지 못하고 뭍으로 도망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해남들이 하던 역할을 점차 해녀들이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2) 제주 해녀들의 대외 진출의 시작

    제주도의 「출륙금지령」이 풀린 이후부터 제주도 사람들은 뭍으로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 해녀들도 육지부로 돈벌이를 위한 출가(出嫁)를 시작하였습니다. 경상도 일대를 시작으로, 강원도, 청진까지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였고, 이후 남해안, 서해안 및 도서 지역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해안 전체에서 물질을 하였습니다. 이후 해녀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각지와 블라디보스토크, 요동반도의 다롄, 산둥성의 칭다오까지 진출하였습니다.

    돈벌이를 위해 뭍으로 진출한 제주 해녀가 이토록 각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게 된 큰 이유는 현지 해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물질 수행 능력 덕분이었습니다.

    (3) 대외 진출 규모와 현실적 문제

    제주 해녀들은 각 지역에서 많은 인원들이 정착하여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해녀의 수는 정확한 숫자는 파악이 어려우나, 대략 약 9,000여 명에서 10,000명 내외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착한 해녀들의 평균 연령이 70~80대인 경우가 많은 고령화로 인해 매년 감소 추세이며, 일부 지역은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제주도내 지역에도 같습니다.

    7. 제주 해녀들의 뚝심의 자산 (해녀 문화의 유네스코 등재)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 문화’는 산소공급 장치 없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문화와, 공동체의 연대를 강화하며 해녀들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잠수굿, 물질을 나가는 배 위에서 부르는 해녀노래, 모녀 및 세대 간에 전승되는 여성의 역할 등 입니다.

    ‘제주 해녀 문화’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이런 문화가 지역의 독특한 정체성을 상징하고, 자연친화적인 방법으로 지속가능한 환경을 유지하며 관련지식과 기술이 공동체를 통하여 전승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중에 특히 눈여겨 볼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전 세계 유일의 무장구(無裝具) 잠수 공동체

    인위적인 호흡 장치 없이 맨몸으로 물질을 하는 여성 잠수공동체는 지구상에서 제주 해녀와 일본의 일부 지역에만 존재하는 독보적인 문화적 희소성을 기록합니다.

    일본은 해녀를 ‘아마(海女, あま)’라 부르며, 일본에는 18개 현에 2000여 명의 해녀가 있다고 합니다.

    제주와 일본 해녀는 장비와 복장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제주는 테왁, 일본은 둥근 나무통인 이소오케(磯桶)라는 부력 유지 기구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물질 방법은 서로 다릅니다.

    제주 해녀는 자신의 몸을 밧줄로 묶지 않고 자유롭게 잠수해 10~20m를 들어가는 등 누구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 않습니다.

    반면 일본 해녀는 두 가지 유형의 작업을 합니다.

    하나는 ‘후나도’(舟人·뱃물질)라고 하며, 부부가 배를 타고 나가서 작업을 하는데 해녀가 해산물을 채취하면 남자는 해녀 허리에 연결된 생명줄을 끌어당기며 남녀가 공동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유형은 ‘가치도’(徒人·갓물질)라고 하며, 해녀 홀로 작업하는 방식으로 부표에 7~8m의 밧줄을 허리에 연결해 부표와 멀리 떨어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제주 해녀들의 뚝심 중 하나는 지금도 차가운 겨울 파도를 뚫고 바다에 거침없이 뛰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물소중이’라 불리는 면 소재의 옷만 입고 물질했지만, 현재는 육지부와 제주도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해녀가 ‘고무 잠수복(고무 슈트, suit)’을 활용합니다.

    고무 잠수복은 단순히 옷이 아니라 부력과 체온 유지를 도와주는 생존 필수품입니다. 면옷을 입던 시절에는 겨울철 수온 때문에 물질 시간이 30분~1시간에 불과했지만, 고무 잠수복을 입으면서 3시간~5시간 이상 작업이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산소 공급 장치를 활용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제주 해녀의 정체성은 ‘맨몸 잠수(숨비질)’에 있습니다. 육지부에서 활동하는 제주 출신 해녀들 역시 산소통(SCUBA 장비)을 메고 물질하는 ‘머구리(잠수부)’와는 엄격히 구분됩니다.

    즉, 현대적 장비인 고무 잠수복을 입고 오리발을 착용하지만, 공기통은 절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폐활량으로만 숨을 참고 물질하는 방식을 100년 전 그날과 똑같이 고수합니다.

    이는 단순한 생존의 방식을 넘어, 자연을 지배하지 않고 오직 인간의 호흡만큼만 수확한다는 제주 해녀만의 철학이 전국에 이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척박한 땅에서 시작된 이 ‘숨비소리의 연대’는 이제 대한민국 해안 문화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해녀들은 물속으로 들어갈 때 가슴을 짓누르는 그 극한 속에서 숨을 참으며 바다가 숨겨둔 전복과 소라를 채취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물 위로 솟구치며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을 때, 제주 바다 전역에는 “호오이, 호오이” 하는 휘파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이것이 바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해녀들의 위대한 숨 고르기, ‘숨비소리’입니다. 이것은 급격한 산소 고갈로 인해 뇌의 의식이 끊어져서 익사할 위험을 막기 위해, 체내의 이산화탄소를 순간적으로 터뜨리듯 배출하고 산소를 흡수하는 생존의 호흡법입니다.

    (2) 연대와 상생(相生)의 바다 공동체 규약

    해녀 문화가 현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따뜻한 인문학적 울림은 물질이라는 거친 노동 이면에 흐르는 ‘연대와 상생의 자치 구조’에 있습니다. 바다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험한 공간이기에,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제주의 해녀들은 바다 위에 자신들만의 가장 공평하고 민주적인 공동체 사회를 구축했습니다.

    해녀 공동체는 기량에 따라 상군(上軍), 중군(中軍), 하군(下軍)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지만, 이 계급은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아닙니다. 기량이 뛰어난 상군 해녀들은 거친 조류가 흐르는 위험한 먼바다, 즉 ‘외여’까지 나가 작업합니다. 한편 하군 해녀들의 안전을 살피고, 물질 능력이 떨어지거나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한 노령 해녀(할망해녀)들을 위해서는 파도가 잔잔하고 수심이 얕은 연안의 바다인 ‘할망바당’을 별도로 지정해 양보했습니다. 이 구역은 상군과 중군 해녀들은 절대 침범하지 않는 공동체의 성역이었으며, 약자도 소외당하지 않고 평생 자신의 업을 이어가며 자립할 수 있도록 배려한 최고의 사회적 안전망이었습니다.

    또한, 물질을 마치고 물 위로 올라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해녀들의 서글프고도 아름다운 휘파람 소리인 ‘숨비소리’. 그 소리 역시 척박한 바다 깊은 곳에서 사투를 벌이고 살아 돌아왔음을 동료들에게 알리는 생명의 신호이자, “내가 여기 있으니 안심하고 물질하라.”는 서로를 향한 가장 따뜻한 연대의 메세지였던 것입니다.

    (3) ‘지속 가능한 생태적 공존의 지혜

    유네스코(UNESCO)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자연과의 상생을 실천하는 지속 가능한 어업 방식과 독창적인 공동체 문화입니다.

    해녀 공동체는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바다를 황폐화하지 않으며, 전복과 소라의 산란기에는 물질을 전면 금지하고 크기가 일정 센티미터 이하인 어린 개체는 채취하지 않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철저한 ‘자율적 자원 관리 규칙’을 수백 년간 유지해 왔습니다.

    이는 생태계 파괴에 직면한 현대 인류에게 환경과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 가장 명확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8. 내 고향 바닷가의 추억

    제가 자란 고향은 제주 서북부의 해안가에 위치한 애월읍 신엄리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10~20여명의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모습이나, 물질을 마친 후에 태왁을 짊어지고 줄줄이 이동하는 모습을 자주 봤습니다.

    마을 앞바다에서 헤엄을 치거나 낚시를 하다 보면, 바로 근처에서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해녀들이 물질할 때에 가끔씩 크기가 성인의 1.5배 정도 되어 보이는 덩치 큰 물고기 무리가 해녀들 근처까지 아주 가까운 바닷가로 다가오곤 했습니다.

    이들은 해녀들의 바로 곁을 검정색에 가까운 진회색의 매끄러운 몸통을 부드럽게 구부리며, 물 위로 파도치듯 물결형을 그리며 유유히 유영했습니다. 마을 해녀들은 이들을 ‘곰수기’라 하였고, 이들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 존재임을 알고 태연하게 물질에 집중했으며, 곰수기들도 거친 바다 위에서 마치 해녀들과 깊은 유대감을 나누는 듯 공존의 풍경을 완성해 주었습니다.

    이 곰수기들은 알고 보니 연안의 터줏대감인 남방큰돌고래 무리라고 합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곰수기라 불렀지만, 제주에서는 지역에 따라 돌고래를 방언으로 ‘곰새기’, ‘수애기’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9. 해녀 문화 단절의 우려

    올해 91세이신 작은할머니께서는 작년까지도 물질을 하셨습니다. 물속에서는 자유롭지만 땅에 올라오면 고령으로 힘에 부쳐했습니다. 작은할아버지께서는 물질을 마칠 시간에 맞춰서 스쿠터를 몰고 가서 채취한 해산물을 가지고 두 분이 함께 귀가하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마을에서 고령이라 위험하니 더 이상 물질을 않도록 권고를 하였기에, 여전히 물질을 하고픈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공동체에 피해를 줄까 우려하여 접었습니다.
    물질을 접기 전에도, 마을에 남아 있던 해녀 두 분 중에 한 분이 그만두어야 할 상황이 다가오자, 80세 전후인 해녀 한 분만 남게 될 터라 외로움을 걱정하던 차에, 마침 타 지역에서 온 젊은 여성 두 분이 물질을 희망하여 신입 해녀로 들어오면서 벗을 삼게 되었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다행입니다. 아마 제 고향 마을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도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며칠 전 유튜브를 보던 중에 외국인 여성이 해녀로 지원하여 활동 중인 모습을 보면서, 해녀 문화가 해외로 더 널리 알려지고 계승자가 늘어나는 계기가 될 듯싶어 반갑고 희망도 느꼈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지원자가 들어와서 전통을 계승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0. 글을 마치며: 당신의 내면에 ‘숨비소리’의 연대를 채울 시간

    1회차의 온기부터 오늘 5회차의 삼다와 해녀의 정신까지, 제주 오리진(Jeju Origin)의 여정은 척박함을 축복으로 전환해 온 거대한 반전의 에너지를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과거 육지의 잣대로 바라보았을 때 제주의 삼다는 결핍과 버려진 변방의 상징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주의 여인들은 그 결핍의 대지를 뚝심과 상생의 연대로 채워 넣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지속 가능한 해양 문명을 완성해 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적 결핍에 가로막히거나, 나를 흔드는 가혹한 시련의 바람 속에서 외롭게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절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제주의 해녀들은 우리에게 묵묵히 위로를 건넵니다. 내가 가진 삶의 숨의 길이(한계)를 인정하고, 바다가 주는 만큼만 욕심내지 않고 수용하며, 혼자가 아니라 곁에 있는 이웃과 숨비소리를 나누며 연대할 때 그 어떤 거친 파도도 이겨낼 수 있다고 말이죠.

    오늘 하루, 거친 세상의 파도 속에서 홀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힘겨워하고 있다면, 차가운 바다 속을 뚝심 하나로 들고 나와 숨비소리를 터뜨리던 제주의 해녀들을 가만히 가슴에 품어보면 어떨까요? 나를 가로막는 결핍 앞에서도 결코 나를 잃지 않고, 내 안의 가장 단단한 오리지널(Origin) 뚝심을 깨워 주변과 따뜻한 연대의 온기를 나누는 유연하고도 멋진 ‘맨도롱한’ 하루를 보내시는 것은 어떨지요?

    다음 글은 제주의 맛과 영양이 응축된 로컬 테크놀로지, 척박한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선조들이 미생물과 소통하며 만들어낸 위대한 <제주 전통 발효 음식의 바이오 과학> 속으로 들어가 제주의 색다른 반전 지혜를 이어가겠습니다.

    제주 오리진(Jeju Origin)

    참고 자료:

    * 국가기록원, 해녀의 역사,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제주 사료 참조)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학연구센터 『제주해녀문화 대백과사전』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학연구센터 『조선후기 제주지역 포작의 존재양태』, 김나영

    * 디지털제주문화대전, 출륙금지령
    * 제주해녀문화 대백과사전, 출륙금지령

    * 보물 제652호 이형상 수고본 『남환박물지』 국문 해제 (박상리·전현미)
    * 제주의 소리, <제주역사 속 여성들의 삶은 어땠을까?>
    (제주특별자치도 여성능력개발본부 『제주여성사료집』 오경생, 재인용)

    * 제주 부사 이형상이 쓴 제주도 박물지, 남환박물, 한경아

    * 일본 해녀 ‘아마(海女)’의 잠수문화, 제주신보
    * 참쉬운 의학용어사전, 압력손상(Barotrauma)